•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4장 불교 조각의 제작과 후원
  • 3. 후원자의 신분층과 시주 목적의 변화
  • 고려시대
정은우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로 자리 잡으면서 왕실과 귀족들에 의한 불교 후원이 강하게 이루어졌으며, 불교 신앙의 보편화와 더불어 일반 대중들도 폭넓게 불사를 후원하였다. 당시 많은 작품이 조성되었겠지만, 현재 남아 있는 예와 연관성이 적어 상의 모습이나 특징, 만든 장인 및 후원자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오히려 고려시대 불상 조각의 후원자에 대해서는 문헌이나 불상 발원문에 기재된 시주자 이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 불교 미술의 단월이었던 후원자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은 이전 시대에 비해 많은 편인데,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서거정(徐居正) 등의 편저인 『동문선(東文選)』, 이행(李荇)·홍언필(洪彦弼) 등이 펴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비롯하여,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익재난고(益齋亂藁)』,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최자(崔滋)의 『보한집(補 閑集)』 등 당대의 유명한 문사(文士)들의 문집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록들에는 대부분 고려 중기 이후의 내용이 많아 고려 후기 후원자의 불사 활동을 좀 더 풍부하게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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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지 석불 입상
개태사지 석불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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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건국 후 수도 개경(개성)을 중심으로 법왕사, 왕륜사, 개국사를 비롯한 10대 사찰을 건립하였고 여기에 안치할 다양한 작품도 조성하였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킨 936년 그 위업을 알리기 위해 그 자리에 개태사(開泰寺, 충남 논산)를 창건하였고 친히 소문(疏文, 부처나 명부전 앞에 죽은 이의 죄와 복을 아뢰는 글)을 남겼다. 개경 10대 사찰 중의 하나였던 왕륜사에는 5m에 달하는 장륙 비로자나 삼존불을 988∼997년에 조성하였는데 본존불은 금, 협시 보살은 소조였다고 한다. 이 불상은 영험이 많아 당시 가장 유명한 불상 중의 하나였다고 전하며, 규모, 재료, 관련 설화 등으로 볼 때 왕실 불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법인 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은 광종 즉위년인 949년 석가 삼존상을 조성하고 955년(광종 6)에는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삼존상을 주조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서산 보원사지 철조 여래 좌상을 그 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의종 때 백선연(白善淵)은 석가 탄신일에 맞추어 왕의 나이대로 동불(銅佛) 40구를 조성하고 관음도 40구를 그려 복을 빌었다. 이상의 예는 고려 초기부터 왕실과 귀족, 고급 승려들이 불교 신앙을 주도하였고, 또한 이들에 의한 불사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려 준다.

고려 후기에는 비교적 많은 기록과 작품을 통해 후원자와 시주 목적 등 을 확인할 수 있다.133)고려 후기 불교 미술의 후원자에 대해서는 정은우, 앞의 글, 2002 참조. 왕실에 의한 불사라든지 귀족, 부원(附元) 세력가, 유학을 근본으로 하는 문사층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전에 비해 다양하고 풍부한 기록과 작품이 남아 있다. 그리고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원 황실과 귀족들의 불사도 흥미롭다. 특히, 제국 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에서부터 마지막 노국 대장 공주(魯國大長公主)까지 일곱 명의 원나라 공주가 고려에 시집을 오고, 반대로 세 명의 고려 여인이 원나라로 건너가 황후(奇皇后, 충선왕과 순비(順妃)의 딸. 명종 후비로 추정. 김심(金深)의 손녀. 인종의 후비(后妃) 답리마실리황후(答里麻失里皇后))가 되었던 사례는 이러한 문화 교류에 기폭제적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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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주의 초상
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주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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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왕실 계층의 후원자였던 왕과 왕비들의 불사가 대표적이다. 특히, 호불 왕이었던 충선왕은 다양한 종파의 승려들과 친밀하게 지냈으며 불사 또한 대대적으로 행하였다. 궁전을 사원으로 전환한 민천사(旻天寺)의 창건과 불상 3,000여 구를 조성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공민왕은 특히 내세 신앙에 심취하였는데 노국 대장 공주와 사별한 후 지은 공주의 영전(影殿)과 불전(佛殿)에 대한 기록을 보면 호사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다. 즉, 1370년에 지은 관음전은 기둥이 9개에 그 규모가 높고 넓어 3층 대들보를 올리다가 눌려 죽은 자가 26명이며, 1371년에 지은 종루와 망새 공사 때는 망새 장식에 황금 659냥, 백은 800냥이 들었다고 하며, 공민왕이 암살당하는 1374년까지도 완성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왕비들의 불사도 역시 이어졌는데 충렬왕비 제국 대장 공주는 자신의 부모를 위해 묘련사(妙蓮寺)를 창건하였으며, 충렬왕비이자 충선왕비를 지낸 숙비(淑妃)는 1310년(충선왕 2) 일본 가가미 진자(鏡神寺) 소장의 수월관음도를 남겼다. 고려의 왕과 왕비들의 불사는 주로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한 개인적인 바람 또는 사후 명복을 빌기 위한 내세 신앙과 관련되며, 때로는 나라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위민적(慰民的) 옆면도 고려되었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귀족들의 불사도 많았는데, 주로 소규모의 사찰을 창건한다든지 불상, 불화, 사경 등을 안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사의 목적은 의례적이지만 황제와 임금의 수명을 축원하면서 자신과 가문의 번영을 이어가고자 하는 세속적 염원과 더불어, 내세에서도 그 생활을 이어가고자 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 잘 알려진 예로 청계사(淸溪寺)를 창건한 조인규(趙仁規, 1227∼1308) 가문, 자신의 집을 금자대장사경소(金字大藏經所)로 삼았던 승지 염승익(廉承益, ?∼1302), 명장 최영(崔瑩, 1316∼1388)의 금주(衿州) 안양사탑(安養寺塔) 중수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능 옆에 사찰을 창건하고 불상을 조성하여 사후 명복을 비는 풍습도 유행하였다.

유학적 지식을 갖춘 문사들의 불사도 고려 후기의 독특한 특징이다. 문사들은 가치 기준을 성리학에 두면서도 승려들과 두터운 친분 관계를 유지하거나 불교를 후원하고 동참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이들은 개인적인 신앙보다는 자신들이 모셨던 왕과의 인연이나 긴밀한 관계라든지 불교를 깊이 신앙하는 부모를 위하여 직접 불사를 주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문사들의 개인적인 불교 신앙보다는 유교의 충효 사상을 실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후기의 특이한 후원자 그룹은 원나라의 황실과 귀족들이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거의 없었던 특이한 사례로, 당시 정치적 배경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고려 후기에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와의 교섭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전례 없는 밀접한 관계가 맺어졌다. 오랫동안 원나라 궁전에 머물렀던 충선왕과의 인연으로 원 황제 무종의 황후가 개성 민 천사에 대장경을 서사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순제(順帝, 1333∼1367)와 기황후(奇皇后)는 고려 내 사찰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순제와 기황후는 고려와의 인연으로 대대적인 불사를 단행하였다. 순제는 황제가 되기 전 11살의 나이에 태자의 신분으로 황해도 장연 대청도에 유배되었다가 원나라로 돌아간 이후 황제가 된 인물이다. 유배 당시 해주 신광사(神光寺) 중창(重創) 불사를 약속하였고 돌아가 황제가 된 후 이 약속을 실행에 옮겼다. 기황후는 원나라에 보내진 공녀(貢女) 출신으로 1340년 제2 황후가 되었고 1365년에는 제1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우리나라 출신으로 중국의 정후(正后)가 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기황후의 불사는 규모가 크고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는데 1343∼1345년(충혜왕 복위 4∼충목왕 1)에 이루어진 장안사(長安寺) 중창 불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장안사 불사는 순제와 기황후 사이에 태어난 황태자를 황제에 옹립하기 위한 목적과 관련되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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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지 10층 석탑
경천사지 10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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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황실의 고려 내 불사와 함께 원나라 귀족들의 불사 역시 성행하였는데 현재 전하는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그 예의 하나이다. 경천사는 원 승상 탈탈(脫脫)의 원찰로서 기황후는 보주(寶珠)와 장번(長幡)을 직접 보냈으며 석탑을 건립할 때 원나라 장인들도 합세하였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 후기에 원나라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원나라 장인들의 고려 입국이다. 정사(正史)에 기재된 원나라 장인들의 고려 입국은 이전에는 없었던 특이한 현상으로 원나라 황실 공주들과 혼인한 결과일 것이다. 1277년(충렬왕 3) 제국 대장 공주의 초청으로 겨울 궁전을 짓기 위해 온 목장 노인수(盧仁秀), 제주에 궁전을 짓기 위해 온 목장 원세(元世), 1346년(충목왕 2) 연복사(演福寺) 동종을 주조한 절강성(浙江省) 출신의 하덕귀(何德貴), 하방달(何邦達), 조명원(趙明遠), 그리고 장안사와 신광사 중창을 위해 온 장인 등은 정사와 작품에 직 접 기재된 인물들이다. 이 밖에도 원나라 장인들이 조성하여 개성 성균관에 봉안한 오성(五聖)과 십철(十哲)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이 문헌에 전한다. 즉, 원나라 황실과 귀족들로 이루어진 후원자 그룹은 단순한 금전만이 아니라 작품의 조형성까지 관여함으로써, 고려 후기 미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 불교 미술의 후원자는 왕실에서부터 귀족층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고, 국제성까지 띠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도 빼놓을 수 없다. 불화, 사경, 불상 복장 등과 같은 현존 작품에 남아 있는 후원자 가운데는 군부인(郡夫人)이라는 명칭이 많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온양 민속 박물관 소장의 1302년 복장 발원문에 기재된 창녕 군부인(昌寧郡夫人), 충남 청양의 1346년 장곡사 금동 약사여래 좌상의 낙랑 군부인(樂浪郡夫人), 1346년 서산 문수사 금동 여래 좌상의 금산 군부인(金山郡夫人) 등이 있다. 그뿐 아니라 불화, 사경, 사찰 중수의 단월들 가운데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군부인은 남편이나 아들의 신분에 따라 어머니나 부인에게 봉작(封爵)된 것으로 본관(本貫)의 지명을 붙여 수여하였던 것 같다. 군부인이 각종 불사에 적지 않게 등장하는 것은 고려 후기 불사에 여성의 참여가 높았음을 알려 주는 동시에, 남편의 지위와 경제력이 곧 그 부인에 직결되는 고려 후기 사회의 구조적 현상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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