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5장 불교 의례와 의식 문화
  • 1. 불교 의례와 시각 문화
  • 의식, 한 시대를 읽는 문화 코드
정명희

사찰에서 열리는 큰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한 가지 이상의 소망을 안고 왔다. 가뭄이 끝도 없이 계속되어 한 해 농사를 망칠 위기이거나,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전쟁으로 마을과 사회가 황폐해진 일 등은 사람들에게 닥친 어려움 중에서도 큰일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기근과 같은 자연재해, 역병과 전염병은 전쟁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낼 만큼 두려운 존재였다. 현실에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불교 의식을 마련하였다. 마을 공동체 전체가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도 승려들은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 앞에서, 대웅전 앞마당에서 재(齋)를 올렸다. 오랜 병을 앓는 가족이 있거나 세상을 떠난 부모가 있는 집에서는 절에서 어김없이 의식이 치렀다. 불교 의식을 통해 나쁜 기운은 물러가고 세상에 억울함을 품은 원혼(寃魂)은 영혼의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의식은 사람들의 기도를 불보살에게 보내는 통로였다. 고통과 갈등으로 응어리진 마음은 종교에 의지함으로써 위로받고, 위로받은 사람들은 다시 생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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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의식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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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리 조상들은 세계가 살아 있는 자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홍수와 가뭄, 병충해의 재앙은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덕이나 나라의 운명을 반영하는 것이었다.135)농작물의 흉년이나 자연재해, 전염병 등 국가의 재난에 대해 고대 사회의 왕들은 하늘에 제사 지냄으로써 책임을 지고자 하였고 이에 실패할 경우 왕이 쫓겨나거나 살해되는 일까지 있었다(나희라, 「고대 한국의 이데올로기와 그 변화」, 『한국사상사학』 23, 한국사상사학회, 2004, 181쪽). 역병과 전염병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각 시대의 종교와 사상은 과거 조상들의 세계 인식에 기반하여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총동원되었다. 시대에 따라 어려움의 종류는 달랐다. 유난히 외부로부터 침입이 많아 나라가 위태롭던 때, 자연재해가 계속되어 농작물의 피해가 컸던 때, 전염병이 돌아 한 마을의 사람들이 갑작스레 죽음을 맞은 안타까운 상황 등 각각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의식이 개최되었다.

의례(儀禮)는 각 종교에서 행하는 예법이자 신앙의 내용을 절차화한 것으로, 형식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종교에 존재한다. 의례가 좀 더 광의의 의미라면, 의식(儀式)은 의례가 드러나는 구체적인 행위나 절차와 관련된 개념이다. 일정한 신앙 행위가 규칙적으로 행해지면서 의식이라는 틀을 갖게 되었다. 시대에 따른 신앙의 차이로 불교 의식은 계속 변화되어 왔다. 그런 데 의례로서 정립되기 위해서는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정례화되어야 하였다.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사회 구성원에게 용인받는 과정을 통해 의식은 신앙 행위에 있어 하나의 규범이 되었다. 때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의 생활에 관습적으로 굳어지면서 세시 풍속이나 민속 행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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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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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는 설행 시기와 빈도, 장소 등 분류 기준에 따라 여러 구분이 가능하다. 승려들의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삭발, 목욕, 세탁, 울력 등은 생활 속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한 수행의 연장선이란 의미에서 일상 신앙 의례로 정립되었다. 또한, 석가 탄신일(釋迦誕辰日), 열반일(涅槃日), 성도일(成道日), 우란분일(盂蘭盆日)처럼 불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날에 열리는 의례는 불교의 세시 의례가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불단에 공양을 올리는 조석 예불(朝夕禮佛), 수행을 위해 선원에서 지켜야 하는 선원 예불(禪院禮佛), 경전을 읽는 송경 의식(誦經儀式) 등이 승려가 지켜야 할 의례라면, 불공을 드리거나 법회에 참석할 때 신도들이 지켜야 할 의례도 일종의 불교 의례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전체가 당면한 위기나 치병, 수명 연장과 같은 개인적 바람을 해결해 주는 의식뿐 아니라 불보살에게 공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절차, 사찰에서 생활하는 승려들이 지키는 계율, 재가 신도들이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금기와 의례도 모두 큰 범주의 불교 의례이다.

의례의 분류 기준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어떤 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 다른 범주에 속하기도 한다. 죽은 후 갚아야 할 생전의 죗값을 미리 갚는다 는 데서 유래한 예수재(預修齋)는 천도(薦度) 의례의 하나였으나, 점차로 윤달에 열리는 불교의 대표적인 세시 의례가 되었다. 매해 음력 7월 15일 개최되는 우란분재(盂蘭盆齋)는 조상의 극락왕생을 위한 천도 의례가 불교의 세시 의례이자 민간의 풍습으로 자리 잡은 경우이다.

고대의 많은 불교 의식이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되었지만, 의식의 절차와 구성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악업을 깨끗이 함으로써 수행을 대신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의례를 특히 자신의 수행을 기본 골격으로 한다는 점에서 자행 의례(自行儀禮)라고 한다. 이에 비해 불보살의 힘을 빌려 현실의 고난을 타개하려는 의례는 타행 의례(他行儀禮)라고 한다. 모든 의식과 의례에는 몸과 마음과 뜻을 청정하게 함으로써 현세를 해탈하고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 담겨 있다.136)정각, 『한국의 불교 의례』, 운주사, 2002, 23∼25쪽.

예불 행위가 이루어지는 사찰에는 다양한 종류의 불교 문화재가 존재한다. 사찰의 의례 문화에는 미술, 음악, 공연, 건축, 사상 등 한 시대의 여러 문화가 포함된다. 의례 공간인 건축, 특정한 사물, 의식의 수행 절차를 기술한 의식집(儀式集), 의식구(儀式具)와 같이 유형적인 것도 있지만 불교 음악인 범패, 나비춤과 바라춤, 의식 절차처럼 무형의 문화 또한 광범위한 의미의 의례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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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춤
바라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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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손쉽게 사찰 전각을 건축의 분야로, 불보살상과 불교 회화, 불교 공예는 각기 조각과 회화, 공예라는 분야로 분류하여 생각한다. 이 유물들은 각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연구자에 의해 연구된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의 신앙 의례 속에서 상호 관련을 맺으며 역동 적으로 기능하던 것이다. 따라서 의식구, 의식 불화라는 개별체보다 의례라는 하나의 복합체 속에서 각각의 개별 요소가 어떻게 역할을 수행하였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식의 접근을 통해 각기 서로 다른 영역의 것으로 보았던 불교 미술품의 의미와 기능을 좀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의식도 시대의 신앙적 흐름과 의식을 행하던 사람들의 요구나 혹은 그 밖의 다양한 요인에 의해 변화하였다. 지금까지 전승되는 의례의 경우에도 신앙과 교리에 따라 형식과 내용이 바뀌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더구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 의례를 복원하는 것은 어렵다. 한 시대의 의식 문화는 불교 교리, 철학, 사상보다 그 시대의 문화사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더 잘 보여 준다. 과거 사람들의 삶이 근거하고 있던 가치관과 그들이 공유하던 관념 체계로서의 세계관이 의식 문화를 통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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