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를 내면서
조인수

조선 왕조 500여 년간을 통하여 성리학(性理學)은 지배적 통치 이념이면서 사회적 실천 윤리로서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성리학은 원래 중국 송나라 때 공자와 맹자에 뿌리를 둔 유교 사상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으로 새롭게 변모시킨 것으로 13세기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그러나 성리학이 들어온 고려 말기에는 불교가 극성하여 성리학은 크게 번성하지 못하였다. 조선의 개창과 더불어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면서 도덕주의를 강조하는 성리학 이념은 치열한 이론적 탐구와 성실한 실천을 거듭하면서 서서히 사회 전반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였다.

성리학을 체득하여 몸소 실천한 계층은 사대부(士大夫)였다. 성리학의 우주관과 세계관에 따르면 이(理)와 기(氣)가 작용하는 우주 만물의 원리는 사람에게도 관통하고 있으므로, 천지인(天地人)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에 맞는 것이 인의예지(仁義禮智)이며 이를 실천하는 도덕적 삶을 달성하고자 일상에서 지켜야 하는 것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다. 조선 사대부는 이것을 몸소 수양하여 체득하는 군자(君子)가 되는 것을 지고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인륜 도덕을 철학적 차원에서 궁리하면서 학문 연마에 몰두하는 것이 사 대부들의 주된 임무였지만, 동시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고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이 과정에서 각종 문화 예술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사대부의 필수 교양으로 간주하였던 시(詩), 서(書), 화(畵)의 방면에서는 섬세한 정서를 담백한 필치로 담아내는 문인화(文人畵)라는 독특한 흐름을 발달시켰다. 이상적인 자연의 경관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한 산수화(山水畵)와 주변의 식물을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四君子)로 승화시킨 것이 대표적인 문인화이다. 그림과 함께 주제에 호응하는 시문(詩文)을 세련된 서체로 써넣어 삼절(三絶)을 이루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 밖에도 제의적(祭儀的) 차원에서 조상과 스승을 그린 초상화(肖像畵), 사회 교화를 염두에 둔 교훈적인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 뜻이 맞는 동기나 친우들의 모임을 기록한 아회도(雅會圖), 명승 경개(名勝景槪)를 유람하고 와유(臥遊)의 뜻을 실은 실경산수화, 백성의 일상을 담아낸 풍속화(風俗畵), 국토와 경향 각지(京鄕各地)의 지리를 기록한 지도(地圖) 등이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후원하고 향유한 그림들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에 사대부라는 특정한 사회 성원들이 함께 공유하고 계승하였던 시각적 문화 활동에 주목하였다.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 미술의 영역에서 확인되는 사대부들의 문화적 활동을 검토하여 미술과 사대부의 삶이 만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밝혀보고자 하였다. 사대부의 삶과 어우러지는 미술은 사대부 문화의 독특한 성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동시에 그 사회가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여러 모습을 하나의 문화적 맥락으로 이어 준다. 이는 철학이나 문학같이 관념의 세계를 다루는 것과는 달리 사대부의 미의식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일상생활의 영역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사대부 문화 속의 미술은 그동안 많이 거론하던 문인화와 사군자라는 제한된 범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의 다양한 미술품을 포괄한다. 따 라서 이 책에서는 예(禮), 원림(園林), 유람(遊覽), 길상(吉祥), 취미(趣味) 등을 주제로 삼아 사대부의 미술을 새롭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주제들과 미술의 관계는 당시 사대부들이 향유하던 문화 안에서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상식이었다. 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라 굳이 상세히 언급하고 기록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좁은 범위로 제한된 미술품을 중심으로 사대부 문화를 이해하는 태도에서 탈피하여 이제는 시각적 조형물 전반으로 지평을 넓혀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사대부의 문화적 이상이 구체적으로 구현된 각종 물품을 시각 문화 또는 물질 문화의 맥락에서 다시 검토하여 생생한 면모를 되살리고자 한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시각적 자료들을 사대부 문화를 설명하는 보조 수단으로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사대부 문화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로서 미술품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사대부들의 의식이 어떻게 물질적 측면과 시각적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가를 살피면서, 한편으로는 미술이 어떤 방식으로 사대부들의 면모를 갖추는 데 이바지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결국 문화의 내재적 측면과 외양적 측면을 상호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미술적 재현이란 사대부 문화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인 측면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미술이 사대부 문화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고 보는 것이다. 성리학이라는 특정한 환경 속에서 시각적 현상들은 사대부의 삶을 규정하고, 이는 다시 미술품에 투영된다. 사대부의 문화는 학문을 연마하는 서재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향유하고 소유한 다양한 시각적 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사대부의 시각 문화를 총체적으로 규명하였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사대부들의 이념이 드러나는 회화를 중심으로 치우쳐 논의한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사대부 시각 문화가 한국의 시각 문화 또는 조선시대 시각 문화 일반 속에서 어떻게 구별되는가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 라 할 수 있다.

간략하게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제1장 ‘예를 따르는 삶과 미술’은 사대부가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규범인 예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조형물을 살펴본다. 예를 기초로 한 생활 규범과 각종 의례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미술품을 통하여 현실에 적용되었다. 이들 물품은 심미적인 요소가 중시되는 감상용 작품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함의가 우선하는 의례 용품이다. 이러한 미술품은 엄숙하고 경건한 예의 세계를 매개해 주면서도 미적 속성으로 사대부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구체적인 사례로써 예의 이념과 실천을 그림과 도표로 설명하는 예서(禮書)의 도설(圖說)을 새롭게 주목하여 사대부 문화에서 시각 자료의 역할을 규명한다. 특히, 태극 문양의 기원과 유행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현실에서는 예를 실천하는 여러 장소가 있다. 이를 효를 실행하고 조상신을 받드는 사당(祠堂), 성현과 스승을 모시는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조상 숭배의 차원에서는 혼령이 깃드는 신주와 초상, 그리고 육신의 안식처인 무덤과 이를 치장하는 각종 석물을 유교적 상장례의 측면에서 다룬다. 그 밖에 성현도(聖賢圖), 행실도(行實圖), 평생도(平生圖) 등을 예로 들어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일상생활의 규범을 교훈적으로 제시하는 그림을 설명한다.

지금까지 회화, 조각, 건축 등 미술의 분류에 따라 각각 다른 맥락에서 다루었던 미술품을 사대부 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예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이로써 예를 따르는 사대부의 삶은 다양한 미술품을 통하여 온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고, 동시에 아름다운 시각적 조형물은 예를 매개함으로써 사대부의 문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장 ‘사대부의 원림과 회화’는 사대부에게 수양의 공간이면서 삶의 터전이 되는 원림(園林)과 관련된 회화를 문화사 측면에서 다룬다. 원림은 한 편으로는 은둔을 위한 피난처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족적인 경제 기반이 되었기에 풍류와 생활이 함께하는 공간이다. 사대부의 성장과 더불어 향촌의 원림은 문학과 미술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특히, 집안 대대로 내려오거나 새로 단장한 원림을 그린 별서도(別墅圖)의 경우에는 산수화로서의 특성과 더불어 소유한 토지를 기록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상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명승도(名勝圖) 형식을 따르기도 하지만, 지도식(地圖式) 구도를 취하거나 구체적인 지리적 정보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적극적으로 시각화하려는 사대부 문화와 관련이 있다.

한편, 한양과 근교에 사는 사대부들은 번잡한 도시 속에서도 이상적인 원림을 만들고자 하여, 산거도(山居圖)를 통하여 이러한 소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비록 낙향하여 별서에 은거하는 꿈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처소에 상상하는 원림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걸어 놓고 그 속으로 은둔하려 하였다. 경교(京郊)에 위치한 원림을 묘사한 그림은 그곳에서 보이는 경관을 함께 포함함으로써 가깝고 먼 경치를 끌어들이는 차경(借景)의 원리를 회화에 적용시키기도 한다. 이후 일부 사대부의 유명한 원림은 명소가 되어 유람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 기념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사대부 개인의 별서가 문중의 상징이 되고 다시 명소가 되면서 향유층이 확대되고, 이에 따라 원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면서 이를 재현하는 그림도 변모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3장 ‘만남과 유람’은 사대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모임을 하고 여러 곳을 유람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그림을 설명한다. 성리학 예법에 따라 노인을 공경하는 관습은 기로회(耆老會)를 유행시켰고 이를 그림으로 기록하여 경사스러운 행사를 기념하였다. 같은 관청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 친목을 도모하고 결속을 다지는 모임을 기록한 계회도(契會圖)는 시문까지 곁들여 흥취를 돋우었다. 이러한 계회도는 아름다운 산수화를 배경으로 태평성대를 드러내는 사대부 관료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 밖에도 가 족과 이웃 간의 경사스럽고 축복받은 모임인 양로연(養老宴), 경수연(慶壽宴), 회갑연(回甲宴) 등을 상세히 그려 내어 집안에서 대대로 소중히 간직하였다. 또한, 뜻이 맞는 친구들과의 친밀한 만남인 아회(雅會), 시회(詩會), 전별연(餞別宴) 등을 풍류 넘치는 그림으로 제작하여 오랫동안 기억하고자 하였다.

넓은 세상을 견문하고 체험하는 여행은 사대부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중국과 일본으로의 사행(使行)을 비롯하여 관리의 자격으로 각 지방을 돌아보는 순력(巡歷)은 중요한 공무였다. 이러한 공적인 행적을 기록하며, 방문지의 풍물과 지형을 묘사한 그림이 지도 또는 실경산수화의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이에 못지않게 사대부들은 개인적인 차원의 유람도 중시하였다. 세상에 대한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성정을 도야하는 방편으로 명승 명소를 찾아다니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이는 조선 후반기에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경향의 화풍을 유행시킨다. 성리학 심화와 더불어 현실 관조와 유람 취미, 그리고 서양 화풍의 자극까지 수용한 진경산수화를 사대부들은 즐겨 그리고 감상하였다.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은 화초나 새 같은 주위의 자연물을 통해서 우주의 섭리를 통찰하고자 했던 사대부들의 심성이 반영된 미술품에 주목한다. 성리학 자연관과 이에 기초한 미의식은 사대부들로 하여금 동식물에 자신의 심정을 실어 표현하도록 하였다. 군자적 풍모와 덕성을 지닌 대나무, 불굴의 절개와 은자의 초탈함을 상징하는 매화, 자신의 도리를 꿋꿋이 실천하는 듯한 난초, 시련을 극복하여 본분을 지키려는 국화 등이 사군자(四君子) 그림으로 널리 사랑받으면서 충절(忠節)과 은일(隱逸)을 따르는 사대부의 삶을 대변해 주었다. 학문을 연마하고 심성을 수양하면서 여가를 이용해서 화초와 동물을 기르는 가운데 체득한 고상한 감수성이 붓끝을 통해 형상화된 것이다.

사대부들은 과거 급제, 무병장수, 부귀영화 등 인간 본연의 현실적인 염 원을 화조화(花鳥畵)에 등장하는 여러 동식물을 통하여 기원하였다. 잉어, 쏘가리, 게, 백로, 사슴 등으로 등과(登科)를 나타내고 십장생, 고양이, 대나무 등으로 장수를 축원한다. 그림 속의 꽃과 새 그리고 동물은 현세 구복적인 길상(吉祥)의 상징으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단아한 사대부의 풍모를 의인화시켜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는 일상생활에까지 스며들어 도자기, 문방구, 의복, 시전지(詩箋紙) 등의 생활 기물에도 다양하게 적용되었다. 사군자를 간결하게 그려 넣은 청화 백자와 길상적인 소재를 응용한 문방사우(文房四友)는 아름다운 장식 효과와 풍부한 상징이 어우러져 있다. 이들 미술품으로 말미암아 정갈하고 소박한 미감을 선호한 사대부의 마음과 정신은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제5장 ‘고미술 취미의 탄생’은 사대부의 생활에서 미술을 애호하는 기호와 취향을 주목하여 고동 서화(古董書畵)를 수집하고 감상하는 취미를 살펴본다. 성현들의 손때가 묻은 옛 기물을 소중히 여기는 호고청완(好古淸玩)의 풍조가 조선 중기부터 문인 문화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오래된 물건을 귀중하게 여기고 상찬(賞讚)하는 가치관이 싹트면서 수기(修己)의 차원에서 자아를 닦고 기르는 방편으로 옛 기물을 애호하였다. 사대부들이 관심을 쏟은 고동 서화의 수집 대상으로는 법첩(法帖)과 명화(名畵)를 비롯하여 문방사보(文房四寶), 인장(印章), 서적, 거문고, 청동기 등으로 다양하였다.

이후 옛것을 모으고 즐기며 보존하는 사대부들의 풍류는 당색(黨色)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성행하였으며, 안목과 학식을 겸비해야 올바르게 즐길 수 있는 청아한 취미로 여겨졌다. 높은 감식안을 갖추고 옛 물건들의 가치를 판별할 수 있는 감상가들이 등장하고 고동 서화의 본격적인 수집이 널리 확산되면서 애완물(愛玩物)에 집착하고 몰두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호고 취미의 열풍은 기술직 중인(中人) 이하로까지 확산되면서 호사적이고 물욕적인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번잡한 세상일에서 물러 나 한가롭게 여가를 즐기고 심성을 어루만지는 차원을 벗어나 위세를 과시하거나 이익에 얽매여 사치품에 몰두하는 풍조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앞과 같은 다섯 개의 주제를 통하여 이 책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생활 속에 가득했던 문화의 향기를 느껴보고, 그들이 즐긴 풍류에서 멋들어진 흥취를 찾아 본다. 사대부들은 예를 기초로 감정을 적절하게 통제하면서도 일상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다양한 물건을 만들고 사용하였다. 그림을 비롯한 각종 미술품들은 사대부 문화의 독특한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이며, 우리의 많은 물음에 대하여 기꺼이 대답해 줄 것이다.

2007년 10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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