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1장 예를 따르는 삶과 미술
  • 3. 혼령이 깃드는 곳
  • 신주, 가상의 몸체
조인수

신주는 어버이의 혼령이 의지할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위패(位牌)이다. 나무로 만든 신주에는 조상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죽은 사람의 육체를 떠난 조상의 혼을 모신 가상의 신체인 셈이다. 고대에는 시동(尸童)이라 하여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상징하는 손자를 대신 상 위에 앉히고 제사를 모시기도 하였다.22)『예기』, 곡례(曲禮), 증자문(曾子問), 교특생(郊特牲) 등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는 제사를 지낼 때 제기만 차려 놓고 주인공이 없으니 허무하고 적막해서 애통함을 그칠 수 없어 시동을 앉히게 된 것이다. 그 후 점차 나무 판 위에 죽은 사람의 작위와 이름을 쓴 신주로 대신하여 모셨다. 신주를 만들기 전에는 나무를 엇갈려 만든 중(重), 비단을 묶은 속백(束帛)이나 혼백(魂帛)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23)최순권, 「신주고」, 『생활 문물 연구』 2, 국립 민속 박물관, 2001, 61∼90쪽. 상장례 절차에서 시신을 정결하게 한 후 새 옷을 입히는 습(襲)을 마치면 영좌(靈座)를 설치하고 혼백을 안치한다. 혼백은 육체를 떠난 고인의 혼이 의지하는 곳으로 비단이나 명주, 베를 묶어서 만든 후 종이 상자에 넣어 교의 위에 모신다. 장례를 마친 후 신주를 만들고 나면 혼백은 무덤이나 사당 근처에 파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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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집람』의 속백
『가례집람』의 속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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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시신이 무덤에 묻힘과 동시에 바로 준비한 목판에 이름을 적어 신주를 완성한다. 이로써 혼령은 신체에서 신주로 옮겨간 것으로 간주된다. 신주를 만드는 나무의 종류도 정해져 있다. 상주(喪主)가 처음 올리는 제사인 우제(虞祭) 때는 뽕나무로 우주(虞主)를 만들고, 상이 난 이듬해에 지내는 제사인 연제(練祭) 때는 밤나무로 연주(練主)를 만든다. 또한, 우제 때 혼백을 신주로 바꾸고 혼백은 무덤의 옆에 묻는다. 만일 신주를 만들지 않을 때는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혼백을 상청(喪廳)에 봉안한다. 부제(祔祭)는 졸곡(卒哭)을 지낸 다음날 지내는 제사로, 고인의 새 신주를 이미 사당에 모신 조상들의 신주 곁에 모실 때 지내는 제사이다. 이때 대(代)가 지난 5대조 조상의 신주는 사당이나 무덤 곁에 묻는다. 이는 조상신은 영속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단 조상 가운데 종묘나 문묘에 배향된 경우, 공신이 된 사람, 왕의 사위나 왕비의 부모, 그 밖에 국가에 공훈이 있거나 학식이 뛰어난 학자의 경우는 신주를 없애지 않는 불천위로 모신다.24)홍승재·박언곤, 앞의 글, 107쪽의 각주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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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의 제작
신주의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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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든 신주는 보통 4대 약 100여 년간 모시며 조상을 대신하여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대 문헌과 유교 의례서에는 신주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고 상세한 도해와 더불어 구체적인 형식까지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신주는 명실공히 조상 숭배의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초에는 사당의 설립과 신주의 사용을 보급하기 위해서 신주가 없는 경우 종이로 만든 지방(紙榜)을 사용하도록 권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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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 도, 주독
신주, 도, 주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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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오례의』에 따르면 밤나무로 신주를 만들되 높이 1척 2촌(약 24㎝), 너비 3촌(약 6㎝), 두께는 1촌 2푼(약 2.4㎝)인데, 위를 5푼 깎아서 둥글게 만들고, 머리 한 치 아래에서 앞을 파내어 턱을 만들어 구별을 짓는다. 백분으로 전면을 칠하고 ‘현고모관부군신위(顯考某官府君神位) 효자모봉사(孝子某奉祀)’라고 쓰고, 함중(陷中)에는 ‘모국고모관모공휘모자제기신주(某國故某官某公諱某字第幾神主)’라고 쓰며 벼슬이나 봉호(封號)가 없으면 생시의 호(號)를 쓴다. 신주는 비단으로 만든 도(韜)라고 부르는 덮개로 씌워 놓기도 한다.25)『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87, 예고(禮考)34, 6.

신주와 위패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구조는 다르다. 신주는 전신, 후신, 받침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전신과 후신을 합쳐 받침대에 끼이게 하고, 양 옆면에 함중과 연결되는 구멍이 있다. 반면, 위패는 몸체와 받침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위패와 신주의 명칭을 구별하지 않고 서로 혼용하였다.

신주는 주독(主櫝)이라고 하는 나무 궤에 모셔 둔다. 주독은 좌우와 뒤쪽은 막고 앞과 위쪽을 틔우며 바닥은 두꺼운 나무판을 대서 신주를 받치게 된다. 이를 좌식(坐式)이라 하였다. 뚜껑은 아래를 틔운 상자처럼 만들어서 위에서 끼워 덮는데 이를 개식(盖式)이라 한다. 그런데 독식(櫝式) 또는 양창(兩牕)이라고 부르는 감실 형태도 있어, 이들을 함께 사용해도 되는지 다소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결국 신주를 비단으로 만든 도에 넣고 이 를 좌개식의 독에 넣어 다시 양창독에 보관하는 경우도 종종 생겨났다.26)국립 민속 박물관, 『한국의 제사』, 국립 민속 박물관, 2003, 118∼120쪽. 이 경우 양창은 주독을 보관하는 감실의 역할을 하며 조상의 넋을 모시는 가구로 가옥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경건한 마음으로 신주를 대하면서 이렇게 다양한 보관 방법이 발달한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 신주는 교의(交椅)에 올려 놓는다. 교의는 의자 형태의 사당용 가구로 사람이 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주를 봉안하기 위한 것으로 좌판(坐板)이 좁고 다리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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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집람』의 독좌식
『가례집람』의 독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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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독
양창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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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는 비록 작은 나뭇조각에 불과하지만 조상의 혼령이 담겨 있는 성스러운 물건이다. 따라서 집안에서 가장 소중히 다루고 간직해야만 했다. 불이 나거나 전란으로 피신을 해야 할 때도 제일 먼저 신주를 모셔야 했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땅에 묻어 보전해야만 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신주를 안전하게 보존하였을 경우에는 칭송을 받았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지탄을 면하지 못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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