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1장 예를 따르는 삶과 미술
  • 5. 옛사람에게 배우는 교훈
  • 성현도, 성현을 공경하는 그림
조인수

고려시대에는 문묘에 공자와 성현들의 소조상이나 영정이 모셔져 있었고, 공신당(功臣堂)에도 공신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향(安珦, 1243∼1306)은 원나라에 가서 공자와 주자의 초상 및 주자의 저술을 가지고 돌아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하였으며, 조선 초기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이 공자 초상화를 가져왔다.48)조선미, 「공자성적도고」, 『미술 자료』 60호, 국립 중앙 박물관, 1998, 12쪽. 따라서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가 성리학 도입과 더불어 함께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성주(星州)에서 공부하던 중 공자 사당을 참배하였는데, 그곳에서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제자들의 소조상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 낡고 퇴락하여 괴이한 데 놀란 김종직은 알부자묘부(謁夫子廟賦)를 짓고 모두 나무 신주로 교체하도록 주장하였다.49)김시황, 『한국 예학 산고』, 푸른 사상, 2002, 275∼282쪽. 그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이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당시 공자를 모신 사당에서 신주 대신 조각상을 모신 경우가 종종 있었음을 알려 준다. 앞서 살펴본 대로 세종대에 이러한 초상을 철폐하려고 했으나 이후 성리학의 정착과 더불어 유교 관련 성현들의 초상화는 다시 사용되었다. 공자의 초상화는 중국에서 궐리사(闕里祠)에 봉안하는데, 1687년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조선에도 궐리사를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50)김봉렬, 『김봉렬의 한국 건축 이야기 2: 앎과 삶의 공간』, 돌베개, 2006, 214쪽. 오산의 궐리사는 정조가 1792년(정조 16)에 세웠고 공자의 초상을 봉안하였다. 따라서 문묘, 서원, 향교 등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널리 배향하였고 주자의 초상화도 모셨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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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초상
안향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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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초상
송시열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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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선현도 많이 모셨는데, 최초의 서원인 소수 서원(紹修書院)에 안향을 배향하고 그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성리학자로서 예학에 조예가 깊었던 송시열의 초상은 가묘뿐만 아니라 서원과 영당에도 모셔졌고 널리 후세의 추앙을 받았다. 이것은 조상 숭배에서 초상화를 제의적 목적으로만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성현과 스승을 공경하기 위해서 초상화를 감계적(鑑戒的)으로도 이용하는 것이다. 훌륭한 선인의 가르침을 따르고 모범으로 삼아 자신을 채찍질하는 교훈적 그림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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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단예악도(杏亶禮樂圖)
행단예악도(杏亶禮樂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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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생활에서 성현의 초상을 가까이 둔 사례도 있다. 성리학자 장흥효(張興孝, 1564∼1633)는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사당과 주자의 화상에 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은 송조 명현(宋朝名賢)들의 초상화를 책상 위에 그려 놓고 그 아래에 찬(讚)을 붙여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그 앞에 단정히 꿇어 앉아 찬을 한 번 읽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고 한다.51)오수경, 「안동 선비의 문화 의식과 향토 문화 창달」, 『안동의 선비 문화』, 아세아문화사, 1997, 105∼106쪽 및 114쪽.

한편, 유학을 창시한 공자의 생애를 그림으로 표현한 공자 성적도(孔子聖跡圖)가 많이 제작되었다. 이는 공자의 탄생부터 성인으로 추앙받기까지의 행적을 묘사한 것으로 많게는 100장면이 넘는 경우도 있고 돌에 새기거나 목판화로 찍어 내기도 하였다.52)조선미, 앞의 글, 199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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