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2장 사대부의 원림과 회화
  • 1. 장원과 별서도
  • 명나라에서 온 사신과 중국의 원림도
조규희

현재 전하는 기록들을 볼 때 조선시대에 제작된 가장 이른 시기의 별서도는 조선 초기의 사대부인 성석린(成石璘, 1338∼1423), 성석연(成石珚, 1357∼1414) 형제의 별서를 그린 그림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곡연좌도(獨谷讌坐圖)와 독곡산보도(獨谷散步圖)는 성석린의 별서를, 그리고 사가정도(四佳亭圖)는 성석연의 별서를 그린 그림이다.68)이 작품들에 대해서는 조규희, 『조선시대 별서도(別墅圖) 연구』, 서울 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26∼34쪽 참조. 창녕 성씨(成氏) 가문은 고려 말 신흥 세력으로 과거를 통해 명문 집안이 되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성세한 조선 초기의 주도적 가문들 중의 하나였다.69)서인원, 『조선 초기 지리지(地理志) 연구-『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중심으로-』, 혜안, 2002, 219∼222쪽.

도성 가까운 곳에 별서를 마련하고 거주하는 곳을 ‘독곡(獨谷)’이라 명하였던 성석린은 노년에 독곡에서 편안히 거처하는 모습과 주위를 거닐며 산보하는 모습을 각각 화공을 시켜 그리게 하고 이를 기념하여 당대의 문장가들에게서 시문을 받았다. 그런데 이첨(李詹, 1345∼1405)의 독곡산보도기(獨谷散步圖記)에 의하면 ‘독곡’은 아담하여 그윽하고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 그의 성품인 동시에 거주하는 처소의 이름이었다.70)『동문선(東文選)』 권77, 「독곡산보도기(獨谷散步圖記)」. 이런 면에서 이 그림들은 독곡이라는 별서에서 성석린이 한가로이 지내는 모습을 담은 작품일 뿐 아니라 ‘독곡’이라는 당호가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그의 성품을 시각화한 초상 같은 작품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주인공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으로 초상화라는 형식 외에 서재 또는 산수 속에 앉아 있는 인물로 나타내거나 혹은 인물을 배제하고 그의 집이나 소유 토지만을 그린 경우는 중국의 서재도(書齋圖) 혹은 원림도류(園林圖類)의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71)중국 명대의 “Portrait in a Landscape”에 관해서는 Anne De Coursey Clapp, The Paintings of Tang Yi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 제4장 참조. 특히, 명대에 소주(蘇州)의 예술계에서는 자신의 아호(雅號)를 붙인 원림을 기념하기 위한 그림인 소위 ‘별호도(別號圖)’의 범주로 이해되는 그림들이 종종 제작되었다. 중국에서 이러한 그림은 직업 화가에게 주문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동일한 사교의 범위 안에 있는 사인(士人) 화가가 특정인의 처소에 초대받아 그리게 되는 일종의 사회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그림이기도 하였다.72)Craig Clunas, Art in China,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p.154∼155. 문인화가들의 이러한 ‘사회적 의무의 이행’이라는 독특한 문화적 양상을 명대 문인화가 문징명(文徵明)의 경우를 통해 살펴본 글로는 Craig Clunas, Elegant Debts: The Social Art of Wen Zhengming,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4. 성석린의 독곡을 대상으로 한 그림들 역시 이러한 원·명대 문인 문화를 공유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 점은 성석린의 동생 성석연이 성석린과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별서를 그린 그림을 소장하게 된 배경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성석연은 개성 남쪽에 위치한 도라산(都羅山)의 남쪽에 정자를 마련하고 “사계절의 즐거운 흥을 사람들과 같이 즐긴다.”는 정자(程子)의 말을 취해 자신의 정자 이름을 사가정(四佳亭)이라고 지었는데, 명나라에서 온 사신 태복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그 말을 듣고 아름답게 여겨 그 전경을 그려 놓고 시가(詩歌)도 지었다는 사실이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의 사가정기(四佳亭記)에 적혀 있다.73)변계량(卞季良), 『춘정집(春亭集)』 권5, 「사가정기(四佳亭記)」.

축맹헌은 1401년(태종 원년) 6월에 조선에 온 명나라의 사신으로 시와 그림을 잘하였다고 하며 사람들에게 그려준 것이 많아 민간에 전하는 그의 수적(手跡)이 많았다고 한다.74)이긍익(李肯翊), 『국역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민족문화추진회, 1982, 별집 제5권, 조사(詔使) ; 권근(權近), 『양촌집(陽村集)』 권9, 「봉교제진차사신소경축맹헌운 2수(奉敎製進次使臣少卿祝孟獻韻二首)」 ; 성현, 『용재총화』 권1, 솔 출판사, 1997 참조. 축맹헌이 성석연의 별서를 그리고 시문을 지어 준 것은 원나라 말기 이래 중국 엘리트 문화 속에 자리 잡은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전통은 이미 고려 후기 사대부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성석린, 성석연 형제의 별서도 제작은 고려 말기 서재도 제작의 전통을 이은 것이기도 하였다.75)고려 말 사대부의 서재도에 관해서는 조규희, 앞의 글, 2006, 22∼25쪽 참조. 다만, 명나라의 사신인 축맹헌이 특별히 성석연의 별서를 대상으로 한 사가정도(四佳亭圖)를 그렸다는 사실은 조선시대에 특정 사대부가의 별서가 시문 외에 그림으로 기념되는 풍조를 상류층 사이에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사회에서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전쟁의 참화와는 별도로 양국의 왕래가 잦아져 명나라 문인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계기가 되어 한양 문화의 국제화를 촉진시켰다.76)한영우, 「이수광(李睟光)의 학문과 사상」, 『한국 문화』 13,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2, 429∼431쪽. 이때 직간접적으로 수용된 중국의 문인 문화는 전란 후 집안의 토지 및 건물뿐 아니라 선조의 유품과 같은 분재(分財)의 대상이 되는 집안의 재산들을 기록하고 기념해 두려 한 사회적 풍조와 더불어 원림도의 제작을 다시 촉발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77)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족가의 문화적 인식에 관해서는 조규희, 앞의 글, 2006, 82쪽과 87쪽 ; Jahyun Kim Haboush, “Dead Bodies in the Postwar Discourse of Identity in Seventeenth-Century Korea: Subversion and Literary Production in the Private Sector,”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62, no. 2(May 2003), pp.41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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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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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1598년(선조 31)에 조선에 왔다 1600년에 돌아 간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과 1606년(선조 39)에 조선에 온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각각 이덕연(李德演)의 이수정(二水亭)에서 접대를 받았던 것으로 기록에 전하는데, 만세덕은 이수정을 그린 그림과 시를 남겼으며 주지번도 이수정에 관해 시문을 지었다고 한다.78)이산해(李山海), 『아계집(鵝溪遺)』 권6, 기류(記類), 「이수정기(二水亭記)」 및 권4, 노량록(露梁錄), 「이수정(二水亭)」 ; 이덕형(李德馨), 『한음선생문고(漢陰先生文稿)』 권2, 「제이수정권(題二水亭卷)」 ; 허목(許穆), 『기언(記言)』 별집(別集) 권10, 「이수정시화첩발(二水亭詩畵帖跋)」. 만세덕이 그렸다는 이수정도(二水亭圖)는 이 시기 별서도의 형식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세덕첩(萬世德帖)』으로 전하는 화첩 중의 실경도라고만 기존에 소개된 작품은 화첩 그림의 좌측면 하단에 ‘이수정’의 표시가 있어 이 작품이 당시에 만세덕이 그렸다는 이수정도와 관련 있는 작품일 것으로 생각된다.79)이동주, 「겸재 일파(謙齋一派)의 진경산수(眞景山水)」, 정양모 책임 감수, 『겸재 정선(謙齋鄭歚)』 한국의 미 1, 중앙일보사, 1984, 167쪽 ; 이수미, 「조선시대 한강 명승도(漢江名勝圖) 연구-정수영(鄭遂榮)의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을 중심으로-」, 『서울학 연구』 6, 서울학 연구소, 1995, 227∼228쪽.

이 작품은 이수정이 위치한 곳에서 삼각산과 용산의 잠두봉을 바라본 방향으로 그렸는데, 그림의 중단에는 ‘희우정어촌(喜雨亭漁村),’ ‘백로주(白鷺洲)’라고 적혀 있으며 이수정 오른쪽으로 솟아오른 산에는 ‘엄지산(嚴之山)’이라는 글씨가 명기되어 있다. 이와 같은 명승명소도(名勝名所圖) 형식은 원나라 말기 이래의 문인화 전통을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다음 절에서 살펴볼 17세기 초반에 제작된 사천장팔경도(斜川庄八景圖)에서 사천장(斜川庄)과 주변의 경물에 지명을 넣은 형식은 회화식 지도의 전통뿐 아니라 임진왜란 후에 조선에 소개된 명대의 명승도 판본이나 이수정도처럼 명나라 사신이 직접 전해 준 중국의 명승도 전통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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