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2장 사대부의 원림과 회화
  • 1. 장원과 별서도
  • 임진왜란 이후 사대부가의 선세별서도
조규희

임진왜란은 사대부들의 삶에서 많은 것을 앗아간 전쟁이었다. 이러한 전쟁을 경험한 17세기 조선 사족가에서는 후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줄 선조의 유업들이 또다시 병화(兵火)로 분실되거나 흩어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들을 모아 가전(家傳) 시화첩으로 제작하려는 경향이 대두하였다.90)이 점에 관해서는 조규희, 앞의 글, 2006, Ⅲ장 2절 “경교 사가(京郊士家)와 가전 시화첩(家傳詩畵帖)” 참조. 특히, 가문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기념한 그림이나 장원을 기록한 그림을 중심으로 시화첩을 만들어 가보로 삼곤 하였다.91)임진왜란 직후 성행한 사가 행사도 제작에 관해서는 조규희,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 경교 사족들의 문화와 사가 행사도(私家行事圖)」,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사회 평론, 2006 참조.

오랫동안 공들여 가꾸어 온 별서를 한순간에 잃은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대대로 내려오던 별서를 회상하며 추화(追畵)한 그림인 선세별서도(先世別墅圖)를 제작하는 풍조가 생겼다. 폐허가 된 선조의 구거(舊居)를 그려 두 어 선조의 유업을 기억하고자 한 이러한 풍조는 허진(許震)의 경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허진은 양천현 남쪽의 죽촌(竹村)에 선대부터 내려오던 별서를 갖고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촌락이 폐허가 되자 이에 그 경치를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읊어 시화첩으로 제작하였다.92)이정귀(李廷龜), 『월사집(月沙集)』 권16, 「제허장진죽촌화첩 허장구유소장재양천수변 종죽위촌 난후위허 화기형승이영지 잉차기운(題許丈震竹村畵帖許丈舊有小莊在陽川水邊種竹爲村亂後爲墟畵其形勝以詠之仍次其韻)」. 『죽촌화첩』에 관해서는 조규희, 앞의 글, 2006, 128∼131쪽 참조.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봉차허경력죽촌도시운(奉次許經歷竹村圖詩韻)에는 허진이 죽촌도(竹村圖)를 제작한 경위가 잘 드러나 있다.

중추부(中樞府) 경력(經歷) 허진 공은 가정(嘉靖) 신유년 생원이다. 연세 팔십이었으되 가난하여 은퇴할 수가 없었다. 일찍이 선조의 별장(先世別墅)이 양천현 남쪽에 있어서, 대나무를 심어 수풀을 이루었기에 죽촌이라 불렀다. 산과 들에 상당히 재미를 느껴 늙어 돌아갈 땅으로 삼으려 하였다. 임진년의 병란으로 촌락이 폐허가 되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참담하게 남은 것이 없어 옛 가업이 싹쓸이 되니 수습할 도리가 없었다. 물고기와 새, 구름과 안개는 꿈을 꾸어 보아도 헛수고일 뿐이라 회상하여 그리고 시로써 감회를 기록하였다.93)이안눌(李安訥), 『동악집(東岳集)』 권2, 습유록상(拾遺錄上), 「봉차허경력죽촌도시운(奉次許經歷竹村圖詩韻)」.

죽촌도는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허진 집안의 선세별서를 그린 그림으로 허진은 폐허가 된 자신의 별서를 회상하여 직접 추화하고 시를 지은 후 윤두수, 윤방, 이호민, 이덕형, 유근, 이정귀, 이수광 같은 당대의 명망 있는 대표적 문장가들에게 시문을 받아 화첩으로 제작하였다.

이안눌의 앞의 글로 미루어 허진은 80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죽촌도를 중심으로 한 『죽촌화첩』을 계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노년을 지내려고 가꾸어 왔던 별서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그곳에서 80세의 수연 잔치를 베풀지는 못하였지만, 대신 구거를 회상하여 그린 작품을 여러 문사들에게 보이고 이를 토대로 시문을 받아 기념 시화첩을 제작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화첩을 만들기 위해 사대부가에서는 그림에 이어 시문들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든 횡권(橫卷)을 여러 사람에게 돌린 후 시문이 다 모이면 이를 나누어 화첩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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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의 화개현구장도
이징의 화개현구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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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된 이항복(李恒福)의 옛 처소를 그림으로 남긴 후손 이세구(李世龜, 1646∼1700)도 그의 동강정사도발(東岡精舍圖跋)에서 “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곳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그림으로 전하고 서문을 지었으니 단지 집안의 보배로 삼기 위해서만은 아니다.”라고 한 바 있다.94)동강정사도발(東岡精舍圖跋)에 대해서는 조규희, 앞의 글, 2006, 177∼178쪽 참조. 병화로 어수선했던 17세기 조선 전체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선세별서도의 제작은 선조의 구거를 기억하고 기념해 두려는 측면과 함께 선조가 물려 준 장원 지역을 기록해 두어 앞으로의 유실에 대비하고자 한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란으로 파손되고 소실된 선세의 소유지를 담은 선세별서도는 허진의 죽촌도나 이세구의 동강정사도(東岡精舍圖)의 경우처럼 후손들이 직접 그린 일종의 ‘사인화(士人畵)’였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데, 이렇게 사족들이 직접 자신의 장원 그림에 참여하는 것은 17세기 이후의 별서도 제작에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였다. ‘회상하여 그렸다(追畵作圖)’는 허진의 선세별서도처럼,95)이안눌, 『동악집』 권22, 습유록 상, 「봉차허경력죽촌도시운」. 전란으로 소실된 명유(名儒)의 구장(舊莊)을 추사(追寫)한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와 같은 선학의 구거도 역시 17세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형식 중의 하나이다.

화개현구장도는 지리산 화개현에 있던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옛 별장인 악양정(岳陽亭)을 그린 것으로 정여창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세운 남계 서원(藍溪書院)의 유생들이 보낸 구장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인조 조 제일의 화원이었던 이징(李澄, 1581∼?)이 1643년(인조 21)에 제작한 작품이다.96)안휘준·이정섭, 「29.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 『동산 문화재 지정 보고서』(’90 지정편), 문화재 관리국, 1991, 228∼232쪽 ; 조규희, 「조선시대의 산거도(山居圖)」,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38∼40쪽.

정여창 가문은 누대에 걸쳐 내외변에서 전래된 토지와 노비로 세거지인 함양에 상당한 재지적 기반을 갖고 있었으며 노비가 ‘기백구(幾百口)’에 이르는 부호가였다. 정여창의 유집(遺集)에 의하면 함양과 악양 및 서울에 전택이 있었다고 한다.97)이수건, 『영남 사림파의 형성』,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9, 191∼192쪽.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은 정여창이 진주의 악양현에다 별서를 만들고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악양이라 명하였다고 하였다.98)정여창(鄭汝昌), 『일두집(一蠹集)』 권3, 시장(詩章), 「악양정(유호인)(岳陽亭(兪好仁))」. 정여창의 악양 별서는 산수승경과 농지를 겸비한 곳으로 규모가 매우 컸다고 한다. 정여창은 일찍이 악양정의 승경을 아껴 그림으로 그려 두고 싶어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99)정여창, 『일두집』 권3, 부록(附錄), 「악양정중건기(岳陽亭重建記)」 및 「화개도발(신익성)(花開圖跋(申翊聖))」. 따라서 이 작품은 소유주가 발원하여 장원의 형승을 담는 별서도와는 달리 후학들이 추모의 마음을 담아 적은 글에 의지하여 화가가 관념적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즉, 그림의 제작 의도 자체가 그림의 실경적 측면보다는 정여창을 추모하고 기리는 마음이 우러나오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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