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2장 사대부의 원림과 회화
  • 3. 눈과 마음이 노닐 만한 원림 그림
  • 사가 원림에서 바라본 그림과 같은 풍경
조규희

18세기에 들어와 사족들의 제택 원림을 그린 그림들도 활발하게 제작되었는데, 실제 이들이 경교에 마련한 호사스러운 세거지와 별서 원림은 이상적인 원림도 속에 묘사되었던 장소 이상으로 운치 있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낙산(駱山) 아래 세거지를 마련하였던 연안 이씨 집안은 정원 안의 조경과 건물로 십경(十景)을 정하기도 하였다.155)강명관, 「조선 후기 경화 세족과 고동 서화 취미」, 『조선시대 문학 예술의 생성 공간』, 소명출판, 1999, 282∼283쪽. 이 시기 문집에는 당대 원림에 관한 다양한 글들과 원기(園記)들이 보인다.

이춘제(李春躋, 1692∼1761)는 1740년(영조 16)에 후원에 새로이 모정(茅亭)을 짓고 주변을 조경한 뒤, 이를 기념하여 정선에게 두 폭의 원림도를 그리게 하였다. 그런데 이 중 삼승조망도(三勝眺望圖)는 특정인의 원림에서 소유주의 시선을 통해 조망되는 경관을 담고 있어 회화식 지도처럼 택원을 중심으로 장원의 전경을 부감한 전대의 그림들과는 경물을 배치한 점이나 경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개인 원림을 한쪽에 배치하고 이곳을 통해 조망한 경관을 화면의 주된 대상으로 삼아 마치 원림 주인인 조망자의 시선 앞에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지는 것처럼 보인다.

정선은 일견 감상화처럼 보이는 이 그림에 화면 우측으로 ‘사직(社稷),’ ‘인경(仁慶)’을, 북악산 쪽으로는 ‘삼청(三淸)’과 ‘회맹단(會盟壇)’을, 그 앞으로는 석주들만이 남은 폐허화된 ‘경복(景福)’을, 그리고 멀리 ‘종남(終南)’과 ‘관악(冠岳),’ ‘남한(南漢)’ 등 도성 주변 일대를 화폭 속에 담으면서 아주 작은 글씨로 지명을 적어 넣었다. 또한, 지명이 부기된 경물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정선은 그 밖의 주변 풍경은 연무로 가렸다. 원림 주인의 조망 대상에 특정 경물들이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정선이 담장 밖의 경치를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차경(借景)을 원림도의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56)조선 후기 지식인의 차경 인식과 산수화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필자가 2006년 12월 한국 미술사 학회에서 “가원망팔경도(家園望八景圖)와 조선 후기 차경(借景)에 대한 인식”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규희, 「가원조망도(家園眺望圖)와 조선 후기 차경(借景)에 대한 인식」, 『미술 사학 연구』 257, 한국 미술사 학회, 2008.

확대보기
정선의 삼승정도
정선의 삼승정도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정선의 삼승조망도
정선의 삼승조망도
팝업창 닫기

삼승조망도에서 주요 경물에 여전히 지명을 부기하고 있다는 점과 신축한 정자에서 조망하는 경물들이 모두 팔경인 점은 전대의 회화식 지도의 형식인 사천장팔경도와 통하는 점이 있다. 즉, 정선은 조선 중기에 성행한 별서팔경도의 전통을 택원에서 팔경을 조망하는 형식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이 점은 그가 그린 또 다른 원림도인 육강현도(六岡峴圖)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이 쓴 “자농은당망육강현(自農隱堂望六岡峴)”이라는 화제가 있어 ‘농은당에서 조망한 육강현의 경치’를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다.

확대보기
정선의 육강현도
정선의 육강현도
팝업창 닫기

원림 내부의 모습보다 원림에서 바라본 경관이 그림의 주된 대상이 되던 당시의 풍조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지락와도(知樂窩圖)에서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 작품은 1759년(영조 35)에 완성된 지락와를 기념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화면 하단에 적힌 강세황의 발문에 의하면 1761년(영조 37)에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해주 정씨 종가인 정택조(鄭宅祚, 1702∼1771)의 지락와에 강세황이 초청되어 그린 것이라고 한다.157)이 작품에 관해서는 변영섭, 「강세황(姜世晃)의 지락와도(知樂窩圖)」, 『고고 미술』 181, 한국 미술사 학회, 1989 ; 조규희, 앞의 글, 2008, Ⅴ장 “강세황(姜世晃)의 「지락와도」와 조선 후기 조도(造圖)에서의 차경의 실행(實行)” 참조. 강세황의 문집에 이 발문이 제지락와팔경첩후(題知樂窩八景帖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지락와를 중심으로 주변 팔경의 전경을 그린 지락와팔경도(知樂窩八景圖)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심 제재인 지락와는 화면 하단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더구나 일부만이 잘려서 그려졌고, 오히려 주변의 경관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도 정선의 삼승조망도처럼 가원에서 조망한 경관을 담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망을 하는 장소와 원림 주인이 그림에서 배제된 점은 삼승조망도보다 농은당망육강현도와 통하는 면이 있다. 강세황은 발문의 말미에서 지락와도가 벽에다 걸어 놓고 감상하도록 제작된 것임을 말해 준다. 그림 같은 원림 주변의 강산이 한 폭의 산수화가 되어 벽을 장식하게 된 것이다. 이 경지야말로 자신의 원림이 있는 곳이 그대로 한 폭의 산수화이자 집 벽에 걸린 이 풍경이 그 자체로 지락와 주변의 진경인 것이다. 즉, 지락와에서 조망되는 경관은 바로 강세황의 그림을 통해 재인식된 산수 풍경이었던 것이다.

확대보기
강세황의 지락와도
강세황의 지락와도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