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2장 사대부의 원림과 회화
  • 4. 명승명소도 속의 사가 원림
조규희

조선 후기에 들어와 유람 풍조가 성행하면서 사족가의 명원 역시 유람의 대상이 되었다. 화폐 경제의 발달로 인한 시장 경제의 활성화와 소비문화의 확산은 이러한 유람 문화의 성행과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다음의 시 한 수는 이러한 문화적 풍조를 잘 반영한다.

강 위의 배를 살지언정 / 寧買江上船

강가의 정자는 사지 않으리 / 不買江畔樓

정자를 사봐야 한곳에 있을 뿐이지만 / 買樓坐一處

배를 사면 마음껏 널리 놀 수 있다네158)김창흡, 『삼연집』 권3, 「저도왕반(楮島往返)」 ; 이승수, 『삼연 김창흡 연구』, 안동 김씨 삼연공파 종중, 1998, 123∼124쪽. / 買船放遠遊.

앞의 시는 김창흡이 한강을 주유하며 탐승하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이지만, 별서를 사기보다는 배를 사서 유람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토지의 매입보다는 소비와 유람에 부를 사용하겠다는 것으로 이러한 그의 진술은 당시 한양의 문화적 풍조를 반영한 측면이 있었다. 유람 풍조 속에서 유행한 명승명소도(名勝名所圖) 역시 자신의 원림에서 조망한 경관을 담은 앞 절의 그림들처럼 눈과 마음이 노닐 만한 그림이었다.

명승명소도는 역사적으로 자연적 경관보다 인문적 경관이 더욱 중시된 그림이었다. 특정 승경지에 부여된 문화적인 가치가 그 지역을 명승지이자 명소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개인의 별서 역시 별서 주인이 갖는 문화적 지위와 그 장소가 갖는 역사성으로 인해 새로운 명승명소도의 화제가 될 수 있었다. 별서 주인은 당대의 이름난 문사들에게 별서도를 돌리며 시문을 청하여 전장도(田莊圖)적인 별서도의 성격을 문화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으로 전환시켰을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자신의 소유지를 명소화시킴으로써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자신의 별서를 대대로 명원으로 인식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별서 주인의 문화적 욕구는 조유수(趙裕壽, 1663∼1741)의 다음 글에서 보듯이 자신의 별서를 일련의 전형화된 명승명소도 속에 포함시키고자 하였던 바람을 낳기도 하였다.159)이 점에 관해서는 조규희, 「별서도(別墅圖)에서 명승명소도(名勝名所圖)로-정선(鄭歚)의 작품을 중심으로-」, 『미술사와 시각 문화』 5,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2006 참조.

오호라, 원백(元伯)이 동쪽의 경승지로 가는 것은 가히 집대성하여 빠짐이 없다고 할 것이나 유감스러운 점이 있다. 내가 걱정되는 것은 영해(嶺海)를 다 갖추면서 풍호(豐鎬)와 호주(鄠柱) 사이를 생략하여 내 작은 수옥정(漱玉亭)만을 한번 그리는 데 빠뜨린 것이다. 일원이여! 만약 이 노인네를 일으키어 한번 나의 누추한 곳을 돌아보게 하면 곧 또한 다리미질한 것 같은 못의 기이함을 반드시 감상하며 흔연히 붓을 들어 스스로 묘사하여 마침내 한상호산(漢上湖山)의 누대 경관을 그려 또한 한 화첩을 이룰 것이다. 그런즉 어찌 그윽한 계곡의 경색을 발하여 한도(漢都)의 경치를 더 보태지 못하겠는가. 그를 위해 길을 쓸고 기다릴진저. 무오(1738)년 상원전이일(上元前二日).160)유홍준, 「겸재 정선의 『구학첩』과 그 발문」, 유홍준·이태호 편, 『유희삼매(遊戲三昧), 선비의 예술과 선비 취미』, 학고재, 2003, 107∼108쪽 재인용. 2003년도 학고재 전시에서 정선의 『구학첩』의 일부 그림과 발문이 처음으로 공개되었으며 현재는 삼성 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앞의 글은 정선이 남한강 유역의 명승지를 그린 『구학첩(丘壑帖)』을 제작하면서 충북 괴산 연평면 조령산 아래 있던 조유수의 별서인 수옥정을 빠뜨렸음을 지적한 글이다. 이 글로 미루어 정선의 명승명소도에 포함된 승경지에 위치한 별서와 누정들 중에는 이렇게 특정 지역에 별서를 마련하였던 원림 주인들의 요청에 따라 화폭에 담은 경우도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원림도는 특정 원림의 주인과 그곳을 그린 그림의 수혜자가 동일하던 제작 관습에서 18세기에 들어와 정선의 작품을 통해 일련의 명승명소도 화첩 속의 한 장면으로 포함되거나 불특정 다수를 위한 한 폭의 감상화로 그려지게 되었다. 화첩 외에 단독으로 그려진 이러한 그림으로 정선의 청풍계도(淸風溪圖)를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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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귀래정도
정선의 귀래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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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낙건정도
정선의 낙건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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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개인 소장의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을 살펴보면 이 화첩에는 귀래정도(歸來亭圖), 낙건정도(樂健亭圖), 소악루도(小岳樓圖), 이수정도(二水亭圖), 소요정도(逍遙亭圖), 선유봉도(仙遊峯圖), 양화진도(楊花津圖), 개화사도(開花寺圖)의 여덟 폭이 실려 있다. 이 중 다섯 엽(葉)이 한강 변의 별서와 누정을 화제로 삼고 있으며, 양화진도나 선유봉도는 개인의 별서를 화제로 삼고 있지는 않으나 실상 그림의 제재는 당대에 이 지역의 경관을 소유하였을 누군가의 별서를 중심 대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귀래정도, 낙건정도, 소악루도는 정선 당대에 특정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별서를 대상으로 한 작 품이었다. 낙건정도는 당대의 감식가이자 수장가로 유명한 김광수(金光遂, 1699∼1770)의 부친인 낙건정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집을 그린 것이며, 귀래정도는 안동 김문의 김광욱(金光煜, 1580∼1656)이 마련한 귀래정을 그린 것으로 정선 당대에는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의 소유였다. 소악루는 이유(李瑠, 1675∼1753)가 자신의 세거지 뒤편에 1737년(영조 13)에 지은 별채였다.161)귀래정과 낙건정에 관해서는 김시민의 「춘유귀래정기(春遊歸來亭記)」 및 이덕수(李德壽, 1673∼1744)의 「낙건정기(樂健亭記)」 참조. 이 두 기문(記文)은 최완수, 『겸재의 한양 진경』, 동아일보사, 2004, 306쪽과 311쪽에 소개되어 있다(최완수, 앞의 책, 283∼287쪽과 304∼313쪽). 정선은 이수정이나 소요정과 같이 지은 지 오래된 별서 외에 이렇게 비교적 최근에 신축된 개인의 별서도 명승명소도의 주제로 택하였는데, 소악루도에는 이유의 세거지와 그 아래쪽으로 조경한 연못과 초정(草亭), 주변의 전호인 민가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소악루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소악후월도(小岳侯月圖)라는 운치 있는 그림의 제재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선의 그림에서 특정인에게 의미 있는 개인 공간이 전형화된 명승명소도의 대표적인 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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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소악루도
정선의 소악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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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소요정도
정선의 소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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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이 양천 현감으로 부임한 이후 그린 양천 지역의 그림들은 이후 하나의 본이 되어 『양천팔경첩』 같은 일련의 작품들로 제작된 듯하다. 정선의 양천 지역 명승명소도들은 그를 따르던 후배 화가들에게도 화본이 된 것으 로 생각되는데, 김희성(金喜誠, ?∼1763 이후)의 아들인 김후신(金厚臣)이 성첩(成帖)한 것으로 전해지는 김희성 집안의 가전화첩인 『불염재주인진적첩(不染齋主人眞蹟帖)』에는 김희성이 그린 소요정도(逍遙亭圖), 춘생와도(春生窩圖), 개화사도(開花寺圖), 양천현해도(陽川縣廨圖) 등 양천 지역을 그린 네 폭의 그림이 전한다.162)『불염재주인진적첩(不染齋主人眞蹟帖)』에 관해서는 권윤경, 「조선 후기 『불염재주인진적첩(不染齋主人眞蹟帖)』 고찰」, 『호암 미술관 연구 논문집』 4, 호암 미술관, 1999, 118∼144쪽 참조. 이 그림들은 모두 정선이 그린 양천의 명승명소도들과 거의 같은 구도와 화풍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특히, 소요정도와 개화사도는 정선의 『양천팔경첩』에 들어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한 형식의 그림이며, 양천 관아를 그린 양천현해도 역시 정선의 『경교명승첩』에도 실려 있는 작품이다. 김희성이 그린 춘생와도는 강세황이 이 그림에 적은 화평에서 “겸 옹(謙翁)과 비교해도 더욱 정치하고 아름답다.”라고 평한 것으로 보아 현재 전하지는 않으나 정선 역시 이곳을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춘생와는 송진명(宋眞明, 1688∼1738)이 지은 것으로 춘생와도 역시 정선 당대의 인물이 소유한 개인 별서를 양천의 대표적인 명승명소도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었다.163)춘생와에 대해서는 『경기지(京畿誌)』(1842∼1843) 제4책 양천현읍지(陽川縣邑誌) 누정조(樓亭條) ; 권윤경, 앞의 글, 12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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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성의 소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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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성의 춘생와도
김희성의 춘생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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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명은 정선과 김희성이 모두 그린 개화사도의 중심 제재인 개화사(開花寺)에서 글공부를 한 후 영의정이 되어 1737년(영조 13)에 개화사를 크 게 중수한 소론 탕평 재상이었던 송인명(宋寅明, 1689∼1746)의 종형이기도 하다. 송인명의 별서인 장밀헌(藏密軒) 역시 『경교명승첩』의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에 그려져 있음을 최완수가 고증한 바 있어,164)최완수, 앞의 책, 301쪽. 송인명과 개화사에 대해서는 같은 책, 14∼321쪽 참조. 이 지역은 송인명, 송진명 등 여산(礪山) 송씨 지신공파(知申公派)의 별서가 선대로부터 존재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정선은 이병연(李秉淵, 1671∼1751)과의 약속으로 『경교명승첩』에 전하는 양천 지역의 실경을 열 폭으로 그린 바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이때의 화본들을 바탕으로 발전시켰을 양천 지역의 명승명소도들에는 당시의 집권층이던 소론 탕평파이자 이병연과 인척이나 교유 관계가 있었던 특정 인물들의 별서들이 선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65)낙건정과 귀래정, 소악루의 주인이었던 김동필이나 김시민, 이유는 모두 이병연과 인척 간으로 연결되어 있거나 친분이 깊은 집안의 인물들이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이들의 별서를 그린 그림들이 정선뿐 아니라 정선을 따른 김희성 같은 화원 화가에 의해서도 제작되었다는 것으로 특정인의 별서가 불특정 다수에게 수용될 수 있는 전형화된 명승명소도의 주된 대상이 되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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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독락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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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청휘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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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양의 북촌을 그린 명승명소도들 중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을 살펴보면,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본에는 청풍계도(淸風溪圖), 독락정도(獨樂亭圖), 청휘각도(淸暉閣圖), 대은암도(大隱岩圖), 백운동도(白雲洞圖), 창의문 도(彰義門圖), 청송당도(聽松堂圖), 취미대도(翠微臺圖)가, 간송 미술관 소장본에는 대은암도, 청풍계도, 자하동도, 독락정도, 청송당도, 필운대도, 수성동도, 취미대도가 그려져 있다.

이 화첩들에 그려진 장소들은 대부분이 개인 별서와 시인, 묵객들이 주로 찾던 대표적 경승지이자 시회처들이다. 안동 김씨의 세거지인 청풍계를 그린 청풍계도를 비롯하여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이 백악산 아래 세거지 동쪽에 지었던 한 칸의 모정인 독락정을 그린 독락정도는 국립 중앙 박물관과 간송 미술관 소장의 두 화첩 모두에 실려 있다.166)김수흥(金壽興), 『퇴우당집(退憂堂集)』 권10, 잡저(雜著), 「독락정기(獨樂亭記)」. 한편,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된 화첩에는 청휘각도가 들어 있는데, 청휘각은 옥류동의 처소에 김수항이 새로 지었던 건물이었다.167)김수항(金壽恒), 『문곡집(文谷集)』 권6,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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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대은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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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흥의 독락정도
장시흥의 독락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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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암 역시 이병연가의 취록헌(翠麓軒)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정선은 이병연 형제의 부탁으로 취록헌도를 제작한 바 있다.168)이병성(李秉成), 『순암집(順庵集)』 권5, 「제취록헌도후(題翠麓軒圖後)」. 『장동팔경첩』의 대은암도들은 모두 그림의 주 대상으로 특정인의 원림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들은 원림 주인과 그림을 받을 자가 일치하였던 취록헌도와는 다르게 불특정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명승명소도로 제작된 것이었다. 정선의 화풍을 따랐던 영·정조대의 화원 화가 장시흥(張始興) 역시 『장동팔경첩』을 남기고 있는데, 간송 미술관 소장품인 정선의 독락정도와 장시흥의 독락정도는 구도나 필치 면에서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들 화원 화가 외에 정선의 손자인 정황(鄭榥)이 그린 대은암도가 전한다. 이렇게 『장동팔경첩』에 실린 그림의 제재 대부분은 사족가의 명원을 포함하여 이미 오 래전부터 선비들의 유상지(遊賞地)가 된 곳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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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의 대은암도
정황의 대은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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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청풍계도
정선의 청풍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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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풍상으로 보면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 속의 그림들은 대부분 노년의 필치를 보여 주어서 『양천팔경첩』이나 『장동팔경첩』의 그림들을 정선이 대체로 60대 이후인, 화가로서의 완숙기에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은 절정기에 이른 화가가 인기 있는 주제와 형식의 그림들을 수요자들의 요구에 의해 반복적으로 재생산하였을 가능성을 말하여 준다. 특히, 그의 후배 화가들 역시 거의 같은 구도와 양식으로 이들 작품을 답습하였다는 점은 이러한 그림들이 당시에 매우 인기가 높았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필자가 확인한 청풍계도는 『장동팔경첩』의 작품들 외에 1739년(영조 15)에 제작한 간송 미술관 소장본과 역시 축화로 제작된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본 및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본과 삼성 미술관 리움 소장본이 전한다. 이 밖에 이동주의 『우리나라의 옛 그림』에 소개된 청풍계 도가 알려져 있다. 이 작품들은 기본적인 구도와 형식을 유지하면서 시점과 그림의 내용을 조금씩 변형하였는데, 삼성 미술관 리움 소장본은 화사하게 채색되어 있는 점이 매우 새롭다. 이렇게 특정인의 세거지가 다양한 형식과 화풍으로 여러 폭 제작되었다는 점은 정선의 그림에서 사적인 맥락 속에서 제작되던 개인의 사유지 그림이 특정한 제작 맥락 없이 보편적으로 유통될 수 있는 한 폭의 감상화로 제작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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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청풍계도
정선의 청풍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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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팔경첩』이나 『장동팔경첩』에 선택된 대상들은 대부분 한양과 한강 주변의 이름난 행락처들과 승경지에 위치한 개인 원림들이었다. 특히, 『장동팔경첩』의 작품들은 수성동도나 필운대도 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시회와 유람의 중심지로서 한양의 명소인 곳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러한 그림들은 그곳을 유람하였거나 그곳에서 모임을 가졌던 이들에게 기념화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명승명소도는 특정 장소를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한 이들이 원하던 그림이었다는 점에서 정선의 화첩 속 대상지가 많은 사람이 와서 노닐고 감상하며 모임을 가졌던 곳이었다는 점은 이 그림들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즉 누구라도 소유할 수 있는 그림이었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 즉, 18세기에 유람이나 경제활동을 위해 한강을 오갔던 이들이나 유흥 문화를 즐기던 이들에게 이러한 명승명소도들은 매우 선호된 기념품이기도 하였을 것이다.169)클루나스는 중국 명대에도 여행 문화가 성행하면서 이러한 여행을 기념하는 기념품(souvenirs)으로서 명승명소도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기한 바 있다. 명말의 명승명소도 판본의 보급은 좀 더 저렴하게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켰을 것이다. 당시 강남에서 소주(蘇州)와 함께 상류층의 대표적 유람 도시였던 항주(杭州)를 대상으로 『해내기관(海內奇觀)』과 같은 산수 판본이 나온 것도 이러한 여행 문화의 유행 속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Craig Clunas, Picture and Visuality in Early Modern China,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pp.83∼85).

한편, 18세기에 들어와 중국과의 교역이 활기를 띠고 상업적인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에 가져갈 넓은 의미의 선물, 혹은 무역품으로서 조선의 명승지와 명소를 중국의 문인화풍인 남종화풍(南宗畵風)으로 소화해 낸 정선의 그림이 선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서울에서는 문인 지식층의 서적에 대한 관심과 수장 욕구에 대한 열망이 매우 커지면서 중국에서 엄청난 양의 서적을 수입하는 장서가들이 출현하였다.170)조선 후기 경화세족들의 장서 문화에 대해서는 강명관, 「조선 후기 서적의 수입·유통과 장서가의 출현-18, 19세기 경화 세족 문화의 한 단면-」, 『조선시대 문학 예술의 생성 공간』, 소명출판, 1999, 253∼276쪽. 이 시기 경화 사족들에게는 고서화 수집보다도 장서에 대한 욕구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돈복(辛敦復, 1692∼1779)이 엮은 야사집(野史集)인 『학산한언(鶴山閑言)』에 전하는 다음의 글은 정선의 명승명소도들을 가장 많이 소장하였던 이병연에게 있어서도 정선의 그림은 그의 장서 취미를 위한 하나의 재화로서의 가치를 지녔던 측면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하루는 내가 사천 이 공(李公)에게 가서 그 시렁 위를 보니 중국본 상아꽂이 책을 쌓아 벽 위를 그것으로 둘러 놓았다. 내가 이르기를 “척장(戚丈), 당판 책이 어떻게 이렇게 많습니까?” 하니 이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천오백 권이나 되는데 모두 내가 사왔네.” 한참 있다 또 말하기를 “모두 정원백(鄭元伯)에게서 나온 줄을 남이 누가 알겠나. 북경 그림 가게들은 원백의 그림을 심히 중히 여겨서 비록 손바닥 크기의 조각만 한 종이의 그림일지라도 비싼 값으로 사지 않음이 없다네. 나와 원백이 가장 친한 까닭으로 그 그림을 가장 많이 얻었는데 매양 연사(燕使)의 행차에 크기를 막론하고 곧 그에 붙여 보내 볼 만한 책을 사오게 하였더니 그런 까닭으로 능히 이처럼 많기에 이를 수 있었다네.”라고 하였다.171)신돈복(辛敦復), 『학산한언(鶴山閑言)』, 『야승(野乘)』 21책 : 최완수,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 334쪽 재인용.

이처럼 이병연은 중국에 가는 사신 일행을 통해 북경 가게에 정선의 그림을 팔아 중국의 서책을 사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소장하고 있던 『금강첩(金剛帖)』을 동네 사람에게 30냥을 받고 팔기도 하였다.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정선의 그림들은 이처럼 대내적으로 유통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의 무역에서 일종의 교역품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학산한언』에는 역관들도 정선의 그림을 구해 북경에 가서 중국 물건들과 바꿨다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이로써 역관배들은 겸재의 그림을 얻으면 모두 기이한 재화로 보았다.”고 한다.172)최완수, 앞의 책, 1993, 335쪽.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중국에서 본 그림들을 기록한 열상화보(冽上畵譜)에는 정선의 대은암도에 관한 언급이 있어, 『장동팔경첩』의 대표적 작품이었던 대은암도처럼 개인의 원림이 주된 대상으로 그려진 경교 명승명소도들이 중국으로도 전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173)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관내정사(關內程史), 열상화보(冽上畵譜). 이렇게 18세기에 들어와 유람과 행락 문화의 성행과 기행 문학의 발달, 성시산림의 문화 아래 그림을 통해 은거하려는 풍조 속에서 활발하게 제작되기 시작한 명승명소도들은 하나의 사치품이자 일종의 교역품 같은 재화적인 역할도 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전대에 한 사람의 주문자를 위해 제작되던 특정인의 원림 그림은 이제 특정 가문에만 의미 있는 그림이 아니라 당대의 명화가에 의해 제작된 한 폭의 감상화인 명승명소도로서 누구에게든지 팔릴 수 있는 상품의 가치도 갖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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