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3장 만남과 유람
  • 1. 다양한 만남과 만남을 기록한 그림
  • 양로효친(養老孝親)과 보본반시(報本反始), 기로회도·기영회도
박은순

사대부 문인의 모임 가운데 오랜 전통을 가졌을 뿐 아니라 가장 영예롭게 여겨진 모임으로는 기로회(耆老會)와 기영회(耆英會)를 들 수 있다. 기로회와 기영회는 본래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나이가 많아 은퇴한 사대부들의 모임을 의미하였고, 일종의 동갑회(同甲會) 성격을 가진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그 연원은 당나라 회창 연간(會昌年間, 841∼846)에 백거이(白居易)가 주선한 향산 구로회(香山九老會), 북송대 지화 연간(至和年間, 1054∼1055)에 두연(杜衍) 등이 조직한 오로회(五老會), 역시 북송대 원풍 연간(元豊年間, 1078∼1085)에 낙양에서 문언박(文彦博)과 사마광(司馬光) 등 13명의 노인이 모인 낙양 기영회(洛陽耆英會), 혹은 진솔회(眞率會)에서 찾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에 최당(崔讜, 1135∼1211)이 다른 퇴직한 관료 노인들과 함께 조직한 해동 기로회(海東耆老會)가 가장 오래된 기로회로 알려져 있다.174)해동기로회도(海東耆老會圖) 및 조선시대 계회도에 대하여는 안휘준, 「고려 및 조선 왕조의 문인 계회와 계회도」, 『고문화』 20, 한국 대학 박물관 협회, 1982. 6, 3∼13쪽 ; 안휘준, 「한국의 문인 계회와 계회도」, 『한국 회화의 전통』, 문예출판사, 1988, 371∼375쪽 참조. 이때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해동기로회도가 제작되었다. 이 작품에는 여러 노인이 날마다 모여 시와 술, 바둑, 거문고 등 풍류를 즐겼으며, 화공인 이전(李佺)을 시켜 자신들이 노니는 장면을 그리게 하였다는 기록이 실려 있었다. 고려 말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이 작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지금 이전이 그린 해동기로회도를 보니 야윈 얼굴, 흰 머리카락, 홀가분한 옷차림, 거문고 뜯고 바둑 두며, 시 짓고 술 마시며, 하품하고 기지개 켜며 자유롭게 쉬는 모습 등 그 묘함을 얻지 않은 곳이 없다. 표지를 보지 않고서도 누구인지를 알겠으니 이름을 영원히 전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참석한 노인들이 편안한 자세로 분방하게 즐기는 분위기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또한, 해동기로회도는 돌 위에 새겨져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오래도록 전해졌는데, 이는 이들의 모임이 단순히 사적(私的)인 풍류를 즐기기 위한 모임만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기로회도는 고려시대부터 제작되었고, 그 당시 이미 사적인 성격을 넘어서는 공공성 또는 공리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기로회의 전통은 조선시대에 관직에서 은퇴한 사대부 문인들 가운데 70세가 넘은 인사들을 중심으로 운영된 기로소(耆老所) 제도로 이어졌다.175)조선시대의 기로 정책에 대하여는 박상환, 『조선시대 기로 정책 연구』, 혜안, 2000 참조. 조선시대에는 유학 및 이를 토대로 형성된 예치주의(禮治主義)가 국가 통치의 이념적 준거로 중시되었고, 기로회를 국가적인 제도와 행사로 존속시킴으로써 예를 실천하는 모범으로 삼았던 것이다.

노인을 공경하고 부모를 섬기는 양로효친(養老孝親)은 유학을 토대로 한 제도와 관습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꾸준히 강조되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일 년에 두 번 사대부와 서인(庶人)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일, 70세가 되어 벼슬을 그만두는 관료에게 궤장을 수여하는 일(賜几杖), 사후에는 시호(諡號)를 내리는 일, 일정한 나이가 되면 노인직(壽職)을 수여하는 일 등이 규정되었다. 이후 시대에 따른 변화를 반영하며 수정되었던 조선시대의 주요 법전에는 늘 양로효친에 관한 사항이 실렸다.

고려시대의 기로회에는 문관과 무관이 모두 참여하였지만 조선시대의 기사(耆社) 혹은 기로소에는 음관(蔭官)이나 무관은 참가 자격이 없었다. 그만큼 자격 조건이 까다로워졌고 기로소의 입사는 사대부로서 최고의 영광으로 여겨졌다. 국가적인 관아로서 기로소라는 명칭은 1428년(세종 10)에서야 정착되었고, 그 이전까지 기로의 모임은 친목을 위한 사적인 모임으로 존속되었다.176)조선시대 기로소에 대하여는 박상환, 「조선시대 기로소 연구」, 『변태섭 박사 화갑 기념 사학 논총』, 변태섭 박사 화갑 기념 사학 논총 간행 위원회, 1985, 242∼251쪽. 기로소 제도는 중종대(1507∼1544)를 거치면서 활성화되었고, 국왕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숙종, 영조, 고종 등 장수한 세 명의 왕만이 들어갔다. 기로소는 17세기 이후 숙종(1675∼1720)과 영조(1725∼1776) 때 가장 활발히 활동하였다.

확대보기
『십로계축』
『십로계축』
팝업창 닫기

기로소는 예조에 소속된 관아로 한양 중부의 징청방, 즉 경복궁 앞에 있던 육조의 아래쪽(현재 광화문 사거리 교보 빌딩 근처)에 위치하였고, 기로신(耆老臣)들이 만나고 모이는 관아였기에 직관(職官)은 만들지 않았다. 소속된 기로신들은 모두 기로 당상(耆老堂上)이라고 불렀으며, 공적인 기로연(耆老宴)은 기로소에서 주관하며 매년 3월과 9월에 시행하였다. 기로소에 입사하는 것은 사대부 문인들의 가장 큰 영예가 되었고, 국왕은 기로연이 열리면 술과 음식, 악공(樂工)과 기생, 시녀 및 시동을 보내어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이를 오랫동안 기념하고 알리기 위한 기념물로 도화서 소속의 궁중 화가, 즉 화원(畵員)을 동원하여 참석자나 행사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뒤, 참석한 인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이후 기로소의 운영과 기로회의 추진, 이를 담은 기념화로서의 기로회도(耆老會圖)는 사대부의 문화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습속의 하나로 지속되었다.

조선 초 기로회와 기로회도의 구체적인 양상은 『십로계축(十老契軸)』을 통하여 확인된다.177)십로도상첩의 제작 경위에 대하여는 신경준(申景濬), 「십로도계축서(十老圖契軸序)」, 『여암유고(旅菴遺稿)』 한국 문집 총간(韓國文集叢刊) 231, 민족문화추진회, 1999 ; 변영섭(邊英燮), 『표암 강세황 연구(豹菴姜世晃硏究)』, 일지사, 1988, 125∼126쪽. 이 작품은 1499년(연산군 5) 신말주(申末舟, 1429∼1499 이후)가 발의하여 향산 구로회와 낙양 기영회를 본떠 모인 70세가 넘은 열 명의 시골 노인들이 즐겁게 노닌 뒤 제작하였다.178)이 작품의 본래 명칭은 ‘십로계축(十老契軸)’이었다. 이 작품에는 당시의 모임과 계회도의 제작 경위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이 작품과 18세기에 제작된 이모본(移模本)의 도판과 작품에 실린 글은 『삼성 미술관 리움 소장 고서화 제발 해설집』, 삼성 미술관 리움, 2006, 8∼29쪽 참조. 참석자 전원이 한 작품씩 나누어 가지고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한 기념물로 간직하였다. 이 작품에는 열 명의 노인들이 편안하고 자유로운 자세로 음주, 가무, 시서화를 즐기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인물을 중심으로 그리고 배경은 생략하였으며, 각 인물 옆에 이름과 인물에 관련된 사실을 적었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 기로회와 기로회도의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십로계축』의 구성과 표현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존재해 온 한중(韓中) 인물화의 오랜 관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고대에 인물화가 정립된 때부터 배경을 생략하는 방식을 선호하였고, 이후 인물화의 주된 표현으로 정착되었다. 후대의 공신도(功臣圖)와 인물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 당나라 태종 때 제작된 십팔학사도(十八學士圖)도 각각의 인물을 배경 없이 독립시켜 표현하였는데, 앞의 두 가지 요소가 『십로계축』의 구성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 이후 제작된 조선시대의 기로회도는 대부분 이와 다른 구성으로 변화되었다. 따라서 『십로계축』은 고려시대에 정립되어 조선 초까지 이어진 기로도, 또는 문인 계회(契會)의 한 가지 전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확대보기
『십로도상첩』 부분
『십로도상첩』 부분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십로도상첩』 부분
『십로도상첩』 부분
팝업창 닫기

『십로계축』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1790년(정조 14)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신말주의 후손인 신상렴(申尙濂)이 이모본(移模本)의 제작을 추진한 것이다. 신상렴은 오랫동안 가전되던 『십로계축』이 매우 낡은 것을 안타까워하여 강세황(姜世晃, 1713∼1791)에게 이모본의 제작을 의뢰하였다. 강세황은 이모본인 『십로도상첩(十老圖像帖)』을 제작하면서 그림의 앞쪽에 그 경위를 담은 서문을 쓰고, 송정한담도(松亭閑談圖)를 그렸으며, 당시 찰방(察訪)으로 있던 김홍도(金弘道, 1745∼1816 이후)에게 원본 그림을 모사하도록 하였다. 김홍도가 그린 『십로도상첩』은 원본의 내용과 구성을 존중하되, 채색을 사용하지 않고 수묵의 백묘화법(白描畵法)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여 18세기 당시의 문인 취향과 화풍을 반영하였다.

『십로도상첩』은 조선시대에 수없이 제작된 이모본의 귀중한 사례로서도 주목된다. 먼저, 이 작품은 이모본이 제작되는 이유와 동기를 알려 준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즉, 낡고 손상된 원본을 복구하여 집안의 유서 깊은 역사와 가풍을 온전하게 보전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계술지사(繼述志事)를 보여 준다. 두 번째로는, 이모할 경우 보통 원래의 작품을 충실히 모사하는 것을 중시하는 전통과는 달리 때로 이모본이 제작된 시기의 미감과 화풍이 반영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선조들이 참여하여 제작된 계회도는 이를 소장한 후손들에 의하여 이모본으로 제작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모는 조상들이 남긴 행적을 이어가려는 효심과 가문의 명예 및 위세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사족(士族)들의 심상(心想)을 배경으로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모본은 때로 원본보다 예술성이 떨어지거나 변형된 모습인 경우도 있지만, 그 예술적인 가치만을 따질 것이 아니라 역사적·문화적 의미가 있는 사료로서 중시되어야 한다. 이모할 때의 원칙은 대부분 원본을 충실하게 복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르면 원본과 이모본의 구분이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여 작품의 제작자 및 제작 시기를 판정할 때 신중한 판단이 요구된다.

기로회가 예조 안에 소속된 기로소가 주관하고 전직의 당상관들이 참여한 연회라면, 기영회는 정2품 이상으로 70세 이상인 자나 의정(議政)을 지낸 자를 대상으로 운영하던 제도이다. 조선 초의 기영회는 1404년(태종 4)에 이거이(李居易)가 건의하여 해동 기로회의 취지를 이어 가려는 의도를 가지고 조직되었으나, 공식적인 연회는 1475년(성종 6)부터 시행되었다. 기로회나 기영회는 국왕이 후원하는 공적인 행사인 만큼 악공과 무녀, 기생이 동원된 융성한 연회였고, 장수한 사대부 관료들을 음주가무로 접대하였다. 이 모임에서 자리를 정하는 순서는 공적인 경우에는 관직의 고하에 따랐으 나 사적인 경우에는 나이순으로 정하기도 하였다. 기로소에서는 기로회와 기영회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양로연도 주관하였는데, 연중 봄과 가을 기영회가 있을 때 베풀면서 백성들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현존하는 기로회도나 기영회도는 대부분 16세기 이후의 작품들이지만, 기록을 통하여 그 이전에도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종(1506∼1544)은 감계화(鑑戒畵)를 제작하는 데 관심이 많았는데,179)박은순, 「명분인가 실제인가-조선 초기 궁중 회화의 양상과 기능(1)-」,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항산 안휘준 교수 정년 기념 논총, 사회 평론사, 2006, 132∼159쪽 참조. 재위 기간 중에 기영회도, 향산구로회도, 낙양기영회도, 오로회도 등을 궁중 화원들에게 제작하게 하고 문신 관료들에게 그림에 관한 화제(畵題)를 짓게 하였다. 국왕이 그림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비판하는 관료들에게 중종은 양로를 권면(勸勉)하려고 이러한 그림들을 제작한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확대보기
선묘조기영회도 부분
선묘조기영회도 부분
팝업창 닫기

공적인 기로회와 기영회를 그린 작품들 가운데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1584년(선조 17)의 기영회도와 1585년(선조 19)의 선묘조기영회도(宣廟朝耆英會圖)가 이른 예이다.180)기로회와 기영회에 대하여는 안휘준, 앞의 글 ; 박정혜, 『조선시대 궁중 기록화 연구』, 일지사, 2004 ; 서인화·윤진영, 『조선시대 연회도』 한국 음악학 자료 총서 36, 민속원, 2001 ; 윤진영, 『조선시대 계회도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3 참조. 이 작품들은 표제(標題)·그림·좌목(座目)·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묘조기영회도의 상단에는 표제와 그림이 있고, 하단 에는 좌목, 즉 기영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과 유명 인사의 제시(題詩)가 기록되었다. 하단에 적힌 다음과 같은 제시를 통하여 이 모임의 성격과 정황을 알 수 있다.

시대가 평온하니 사건 하나 없어 노래와 춤으로 흥겹구나

표주박에 술 떠 기쁨 나누며 신선과 짝하리

한꺼번에 피리 잘라 천년 동안 감상하리라

술잔을 주고받는 즐거운 곳

서로 간의 정이 도타운 사람 머무네

지금 다시 보니 신선 음악 곳곳이 퍼지누나

성대한 일 예전에 없었으니

잔을 기울이며 근심하지 말게나.181)『조선시대 풍속화』, 국립 중앙 박물관, 2002, 290쪽 도판 46의 제시 참조.

이 시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음주가무로 즐긴 연회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에는 기로소로 보이는 전각 안에서 연회가 진행되는 장면이 재현되었다. 건물 안에는 여러 기로신이 각 상을 받은 채 앉아 있고, 중앙에서 두 기녀(妓女)가 춤을 추고 있으며, 건물 밖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과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전각을 배경으로 음주가무가 곁들인 연회 장면을 재현하는 방식은 산수 또는 건물 중심의 계회도나 인물 중심의 기로회도와는 다른 새로운 표현이다. 이로써 조선 초부터 관료들의 모임을 기록한 그림들이 주제에 따라 일정하게 정형화된 표현 형식을 유지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로회나 기영회는 장수한 노인 관료들에게 양로의 상징성을 표상(表象)하면서 베푼 공식적인 연회였으므로 음주가무의 흥겨운 장면이 강조되었고, 잘 훈련된 화원이 화려한 채색과 정교한 묘사로 연회의 모습과 흥취를 실감나게 전달하였다.

기로회도, 기영회도, 양로연도 같은 그림은 줄곧 음주가무를 즐기는 연 회로 표현되었다. 이는 엄격한 법도를 강조한 유학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의 문인 문화를 고려할 때 다소 의외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같은 연회(宴會)와 연향(宴饗)의 모습에는 또 다른 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유학적인 예치의 이념에서 연회와 연향은 가례(嘉禮)와 관련된 행사이다. 만민(萬民)이 친목하고 화합하기 위한 의례인 가례는 만민이 언급되기 때문에 왕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상하가 함께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오례(五禮)와 구별되었다. 이에 따라 가례의 수행에는 늘 많은 연향이 수반되었다. 가례에서 연향이 유난히 강조되는 것은 음식을 나누는 자리를 통하여 만민화친(萬民和親)이라는 가례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182)장기근, 「예의 정신과 활용」, 『중국학보』 10, 한국 중국학회, 1969. 이러한 배경에서 기로회, 기영회, 양로연의 그림에서는 왕도 정치(王道政治)가 이루어진 시절 만민화친의 실현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장면인 연회와 연향이 반복적으로 묘사되었다. 성대한 연회와 연향을 그림으로 그려 길이 기념하고 전하는 관례는 궁중 연향을 그린 조선 말의 진연도(進宴圖)와 진찬도(進饌圖)까지 이어지면서 궁중 회화의 중요한 전통으로 지속되었다.

확대보기
통명전진찬도(通明殿進饌圖)
통명전진찬도(通明殿進饌圖)
팝업창 닫기

현존하는 기로회도 가운데서 1719년(숙종 45)에서 1720년 사이에 제작된 『기사계첩(耆社契帖)』과 1744년(영조 20)에서 1745년 사이에 제작된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이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손꼽힌다.183)이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고찰은 박정혜, 앞의 책, 168∼249쪽 참조. 『기사계첩』은 숙종이 59세 되던 해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베푼 여러 연향과 행사를 기록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시 대표적인 화원인 김진녀, 장태흥, 박동보, 장득만, 허숙이 그렸으며, 어첩봉안도(御帖奉安圖), 숭정전진하도(崇政殿進賀圖), 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 봉배귀사도(奉盃歸社圖), 기사사연도(耆社賜宴圖) 등 행사가 치러진 순서에 따라 다섯 장면으로 나누어 담았다. 태조 이후 기로소에 입사한 임금이 없었던 왕실로서 임금의 기로소 입사는 국가적으로 기념할 만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행사가 치러진 건물을 크게 부각시키고, 그 안에 참석한 주요한 인사들과 행사의 진행을 도운 신하들, 주요한 기물과 의장, 시동, 악공, 기녀, 무용수가 고루 등장하는 이 작품들은 국왕의 장수와 경로의 예를 실현한 것을 찬양하는 기념물로 제작되었다. 그림은 당시에 참석한 기로신들의 숫자만큼 제작되어 참여한 기로신들에게 하사하였다.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삼성 미술관 리움, 연세대학교 박물관, 개인 소장 두 건 등 모두 여섯 건이 이때 제작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확대보기
경현당석연도
경현당석연도
팝업창 닫기

이 작품들은 조선시대 회화의 사회적 기능과 회화적 표현의 특징을 대변하고 있다. 조선시대 동안 유학의 영향으로 사회적 효용성을 가진 회화 들이 많이 제작되었으며, 국가적인 관아인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화원들은 공적 행사를 기록하여 태평성대의 영화로움을 후대에 길이 전하였다. 시각적인 기록물이 가지는 효과는 문자로 된 기록이나 문학 작품으로 대체할 수 없는 뛰어난 전달력을 가지고 있기에 중요한 궁중 행사나 공적 행사는 늘 그림으로 제작되었던 것이다.

주요한 행사를 그림으로 기록할 경우에는 대부분 단순하면서도 웅장한 구성, 짙은 채색, 정교한 묘사를 중시하였다. 그림의 구성과 표현, 재료에 나타난 이러한 특징은 모두 공적인 차원, 즉 권위와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채택된 표현 방식이었으며, 조선시대 궁중 회화의 일관된 특징으로 조선 말까지 유지되었다. 궁중 그림에는 화가의 이름을 대부분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동안 화가의 사회적 위치가 낮았던 때문이다. 즉, 국왕 또는 지체 높은 사대부 관료를 위한 그림이기 때문에 신분이 낮은 화가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관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확대보기
본소사연도
본소사연도
팝업창 닫기

『기사경회첩』은 1744년(영조 20) 9월 영조가 51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행사의 순서에 따라 영수각 친림도(靈壽閣親臨圖), 숭정전진하도, 경현당선온도(景賢堂宣醞圖), 사락선귀사도(賜樂膳歸社圖), 본소사연도(本所賜宴圖) 다섯 장면으로 구성되었는데, 숙종대의 『기사계첩』과 유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184)이 작품의 도판은 박정혜, 앞의 책, 도 43-1에서 도 43-5 참조. 이때에는 특히 10월 7일 숭정전에서 70세 이상의 관원이 모두 참여한 진연이 있었고, 이 진연을 기록한 『영조갑자진연도계병(英祖甲子進宴圖契屛)』이 제작되었다. 이로부터 20년 뒤에는 영조의 70세 생신을 기념하는 잔치와 기로소 연회가 열렸다. 이때 제작된 『영조을유기로연도계병(英祖乙酉耆老宴圖契屛)』은 행사를 진행하는 데 참여한 관원들이 발의하여 제작한 것으로, 궁중의 중요한 행사를 대형 병풍으로 기록하는 관습을 대변하고 있다. 이 병풍의 첫 번째 폭에는 행사의 내력과 병풍 제작의 동기가 기록되었고, 2폭에서 7폭까지는 행사 장면을, 8폭에는 참석자들의 명단이 수록되었다.

확대보기
『영조을유기로연도계병』
『영조을유기로연도계병』
팝업창 닫기

국가적인 행사로 치러진 기로회 이외에 기로소에 소속된 원로들이나 민간의 장수한 노인들이 친목을 위해 사적으로 이룬 기로회도도 제작되었다. 사적인 만남을 기록한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 이원기로회도(梨園耆老會圖),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契圖) 등을 통하여 기로회의 구성원들이 사저(私邸)에서 또는 사적으로 만나 계회를 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풍습은 차차 민간으로 저변화되어 다양한 노인들의 모임을 낳았고, 이를 그림으로 기록하는 풍습으로 정착되었다.

확대보기
남지기로회도 부분
남지기로회도 부분
팝업창 닫기

남지기로회도는 1629년(인조 7) 숭례문(崇禮門) 밖 남지(南池)에 인접해 있던 홍사효(洪思斅, 1555∼?)의 집에서 이루어진 기로회를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17세기 이후 국가나 관아에서 공적으로 주최하는 노인회의 모임이 민간으로 저변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그림은 기로사의 구성원들이 친분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저에서 가진 모임을 재현하였다. 이 모임에 실제로 참석한 사람은 11명이었는데, 그림에는 참석하지 않고 좌목에 이름이 실린 이까지 포함하여 모두 12명을 그렸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화원인 이기룡(李起龍, 1600∼?)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의 구성과 형식도 선묘조기영회도와 유사하여 궁중 그림이 민간의 회화에 영향을 준 것을 증명한 다. 사적인 모임이었던 만큼 그림의 제작 비용은 기로의 자손들이 부담하였고, 기로회가 있은 지 24일 만에 12본이 완성되어 참석자들이 나누어 가졌다.185)이러한 일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조유수(趙裕壽), 「후기영회시서(後耆英會詩序)」, 『후계집(後溪集)』 권8, 서(序), 48쪽.

17세기 이후 공적인 기로회와 기영회뿐 아니라 민간에서 이루어지는 사적인 노인회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유행은 단순히 노인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17세기 이후 사대부 문인들이 사적인 모임을 자주 가지면서 문인들의 아집(雅集), 시회(詩會), 계회(契會), 시사(詩社)가 유행한 것과 관련이 있다.186)조선 후기 문인 계층의 모임과 이를 그린 그림에 대하여는 송희경, 『조선 후기 아회도(雅會圖)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참조.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 이유로 사대부 문인들은 수많은 만남을 가졌다. 문인들의 모임은 음주가무와 시서화가 넘나드는 풍류의 장이 되었고, 이를 기록하고자 하는 의도로 제작된 수많은 회화 자료의 산실이 되었다. 기록적인 성격을 가진 회화들은 유학적인 사상과 문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예술로서, 최근에 이 분야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가 크게 진척되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와 예술로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