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3장 만남과 유람
  • 1. 다양한 만남과 만남을 기록한 그림
  • 친목과 결속의 기록, 관료 계회도
박은순

조선 전반기까지 사대부 문인들의 모임은 일반적으로 계회라고 통칭되었다. 계회의 유형은 정기적인 경우, 임의적 수시 모임의 경우, 일회적인 경우 등 다양하지만, 한 사람이 여러 모임에 속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사대부에게 계회란 평생 동안 지속된 삶의 한 가지 방식으로 유지되었다.187)조선시대 문인 계회와 계회도에 대한 연구로는 안휘준, 앞의 글 ; 윤진영, 앞의 글 참조. 조선 초부터 소속 관청이나 관직과 관련이 있는 요계(僚契), 즉 관료 계회가 자주 결성되었다. 이 관료 계회는 다시 모임의 성격과 계기, 참석자의 신분에 따라 동관(同官) 계회, 동경(同庚) 계회, 동방(同榜) 계회, 동향(同鄕) 계회, 도감(都監) 계회 등으로 구분되었다.188)조선 초기 관료들의 계회 및 계회도에 대한 연구로는 안휘준, 「16세기 중엽 계회도를 통해 본 조선 왕조 시대 회화 양식의 변천」, 『미술 자료』 18, 국립 중앙 박물관, 1975, 36∼42쪽 ; 박은순, 「16세기 독서당계회도 연구-풍수적 실경산수화에 대하여-」, 『미술 사학 연구』 212, 한국 미술사 학회, 1996.12, 45∼76쪽 ; 「조선 초기 한성의 회화-신도형승(新都形勝)·승평풍류(昇平風流)」, 『강좌 미술사』 19, 한국 미술사 연구소, 2002.12 ; 윤진영, 앞의 책 참조. 계의 연원에 대한 기록은 조익(趙翼), 『포저집(浦渚集)』 권26, 「기묘갑계록서(己卯甲契錄序)」 참조.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수계(蘭亭修契)는 재액을 쫓는 발계이고, 서로 맺는 계의 요건을 갖추지 않았는데, 계는 서로 맺는 조건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관료 계회의 성격을 난정수계와 구분하여 새롭게 규정하였다. 다양한 계회의 동기와 기능은 역시 다층적이었으며, 때로는 친목과 유흥 같은 좀 더 순수한 풍류적인 기능을, 때로는 기강과 결속 같은 좀 더 공리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동관 계회는 같은 관아에 봉직하는 동안 수시로 모이거나 관리가 교체되는 특정한 계기에 이루어졌다. 나이가 같은 이들의 모임인 동경 계회와 같은 시기에 과거에 급제한 동료들의 모임인 동방 계회는 정기적이건 비정기적이건 간에 일생 동안 지속되는 경향이 있었다. 도감 계회는 도감이 국가적인 일을 치르기 위하여 설치된 임시 관아인 만큼 일이 끝난 뒤 한 차례 모인 뒤 해체되었다. 이처럼 사대부들은 다양한 동기와 명분을 가진 모임에 소속되어 공적인 또는 사적인 친목과 결속을 이어 갔다.

조선 초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계회도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동관 계회도이다. 동관 계회도는 육조, 사간원, 사헌부, 승정원, 의금부, 한성부의 계회도와 서반(西班)으로는 도총부(都摠府), 선전관청(宣傳官廳)의 계회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189)윤진영, 앞의 글, 86쪽. 관료 사회에서 동관끼리 공유하는 동류 의식은 형제간의 의리(義理)로 맺어진 것이라는 전래의 가치관이 작용하였으며, 동관은 “인정(人情) 가운데 가장 친밀하고 돈독한 것이다.”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190)박정혜, 앞의 책, 62쪽 재인용. 사대부의 사회적·공적 삶에서 일상화된 계회는 흔히 술과 시, 음악을 즐기는 연회 또는 연향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관료들의 공적 계회는 조선 초부터 성행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훈구파(勳舊派) 또는 사장파(詞章派) 관료들의 낙관적인 세계관, 왕도 정치가 이루어진 시절에 대한 자부심, 태평성대의 찬양이라는 도구적인 기능을 전제로 제도적으로 공인되고,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관료의 관습으로 정착되었다.191)박은순, 앞의 글, 2002, 주 15 참조. 음주가무와 시서화가 병행된 풍류적인 모임의 이면에는 ‘만민화친(萬民和親)’이라는 이념을 달성하려는 유학적인 예(禮) 사상이 작용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 사대부들은 시서화를 모아 삼절(三絶)을 이루는 것을 문예의 이상으로 여겼다. 조선 초 계회의 형성기에 주류를 이룬 사장파 문인들의 사상과 문예관의 작용으로 관료들의 계회는 기념할 만한 성사(盛 事)로서 칭송되었고, 문장과 서화로 기념하는 관례가 형성되었다. 모임에 참석한 문사들은 계회의 흥취를 시문으로 기록하였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멋진 글씨로 시문을 썼으며, 직업 화가를 동원하여 계회의 장면을 그림으로 재현하였다.

사대부들의 계회는 고려시대에도 이미 동관, 동갑, 동학, 동향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192)동관, 동갑, 동방, 동학, 동향에 대한 이첨(李詹, 1345∼1405)의 기록과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조직한 죽림고회(竹林高會)를 통하여 알 수 있다(윤진영, 앞의 글, 17쪽 참조). 그러나 사대부의 계회를 그림으로 기록하는 풍습은 조선 초 이후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계회를 그림으로 제작하는 이유는 이들의 성사를 기록하여 전수하고, 후일 자리를 떠나더라도 서로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193)윤근수(尹根壽), 『월정집(月汀集)』 권5, 금오계회도(金吾契會圖), 한국 문집 총간 47, 민족문화추진회, 1992, 238쪽.

조선 초 관료들의 계회는 특히 한양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관료 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현직 관료들의 계회는 대부분 한가한 시기에 야외로 나가 이루어졌다. 야외 계회는 한양에서 알려진 명승에 위치한 누정(樓亭)이나 명소를 방문하여 음주가무를 즐기면서 그곳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승경을 감상하고, 시문으로 칭송하며, 계회의 장면을 포함하여 실경을 그려 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선전관청과 사헌부 같은 특정 관아의 계회는 대개 관아의 건물 내에서 진행되었고, 관아 건물을 주변의 산수와 함께 재현하는 계회도의 표현 방식이 관례로 유지되었다. 관료들 사이에 계회 및 계회도 제작이 유행하면서 각 관료가 참여하였던 계회를 기록한 계회도들은 자손 대대로 전수되면서 선조의 행적과 명예를 실증하는 가보(家寶)로 귀중하게 여겨졌다.194)이원복·조용중, 「16세기 말(1580년대) 계회도 신례-정사신(鄭士信) 참여 봉산계회도(蓬山契會圖) 등 6폭-」, 『미술 자료』 61, 국립 중앙 박물관, 1998, 63∼85쪽.

이 시기에 제작된 계회도들은 표제, 그림, 좌목으로 이루어진 축(軸)의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표제에는 전서체(篆書體)로 계회의 종류를 밝혔고, 그림에는 대부분 계회가 있었던 지역의 실경을 재현하였다. 좌목에는 참석자들의 관직, 본관(本官), 성명, 자호(字號), 때로는 부친의 성명, 관직, 본관, 자호를 기록하여 관료로서의 소속감과 자부심, 집안 의식을 표출하였다. 15세기부터 집중적으로 제작된 계회도는 15세기까지는 계음도(契飮圖), 연 음도(宴飮道), 계연도(契宴圖) 등 흥취와 풍류를 드러내는 표제를 지니고 있었는데, 16세기 이후 사림파 문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한 즈음부터는 계회도라고 통칭하기 시작하였다.195)계회도 명칭의 변화에 대하여는 박은순, 앞의 글, 2002 참조. 계회도라는 명칭이 정착될 즈음부터는 계회도를 제작하는 관행이 더욱 성하여 현재까지도 계회도에 관한 기록과 유품이 많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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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입직사주도(騎省入直賜酒圖)
기성입직사주도(騎省入直賜酒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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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에 만들어진 관료 계회도는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첫 번째는 계회가 열린 지역에서 보이는 실경을 크게 부각시켜 재현하는 방식이고, 두 번째는 계회가 열린 관아 건물을 중심으로 그리는 방식이며, 세 번째는 당시에 유행한 관념적인 산수화풍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세 가지 방식은 서술한 순서대로 애호되었는데, 어느 경우든 계회에 참석한 인사들을 크게 부각시켜 표현하는 기로회도나 기영회도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관료 계회도는 독자적인 표현 방식을 가지고 동일한 형식을 유지하는, 일종의 전형화(典型化)가 진행된 것이다. 또한, 당시에 시문으로 유명한 문인에게 부탁하여 화제(畵題)를 쓰는 관행도 정립되었다. 이는 이 시기의 문인들이 시서화 삼절을 갖추는 것을 중시하였고, 그들의 계회가 문인의 풍류로 인식되었음을 말해 준다. 글을 쓴 사람은 계회에 참석한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고, 계회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선배 관료나 명사를 찾아가 글을 받았다.

조선 초기의 계회도에 일어난 전형화는 이 시대의 문학 분야에서도 일어난 현상으로,196)김성룡, 『여말선초의 문학 사상』, 한길사, 1995, 232∼260쪽. 시화 일치(詩畵一致)를 중시한 문인 전통을 배경으로 회화 분야에도 유사한 경향이 추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계회도에 쓰여진 많은 시문을 검토해 보면 서거정, 강희맹, 김안국, 이행, 심광언, 김안로 등 당대를 주름잡은 문형(文衡)이나 문사들이 주로 동원되었다. 이들 중 15세기의 서거정(徐居正, 1420∼1488)과 16세기의 이행(李荇, 1478∼1534)은 관학을 주도한 훈구파 또는 사장파 문인들로, 계회도의 화제를 가장 많이 썼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거정은 계회와 계회도에 관한 시문에서 계음도, 연음도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고, 관료들의 계회가 평화로운 시절에 동참하는 풍류, 즉 승평 풍류(升平風流)를 즐긴 것으로 해석하는 등 왕조 창업기에 기여한 훈구파 사대부의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16세기 전반 사림파가 대두하여 새로운 정치와 문화를 일구어 나가던 시기에 문형으로 활동한 이행은 계회도라는 명칭을 애용하여 유학적 이념을 정치와 사회에 실현하고자 모색하던 문인 사회의 새로운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16세기 전반 이후에는 계회 및 계회도의 제작이 더욱 활성화되었고, 제시에는 승평 풍류적인 인식도 있었지만 유학적 가치를 좀 더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등 변화가 일어났다.197)박은순, 앞의 글, 2002, 110∼111쪽.

사대부들의 계회를 기록한 계회도는 회화의 공리성을 강조하던 조선 초기 유학적 회화관을 대표하는 그림이며, 조선 초의 독특한 정치적·사회적 분위기 가운데 형성된 새로운 문화이며 현상이다. 그러한 성격과 특징은 계회도의 형식과 제재, 구성과 표현 기법에도 나타나고 있다.

실경산수화로 표현된 조선 초의 계회도에는 이 시기 문인 문화의 독특한 성격과 자연관 및 세계관이 반영되었다. 실경 가운데서 자주 재현된 곳은 한강 변의 동호(東湖), 그 가운데 제천정(濟川亭)과 독서당(讀書堂) 주변이고, 다른 한 곳은 서호(西湖)의 잠두봉(蠶頭峰) 주변이다. 그 밖에 화양정(華陽亭)과 장어동 계곡 등 유명한 정자와 명승에서도 계회가 열렸다. 한강변에 있던 제천정과 독서당은 국가에서 경영한 공적 누정(樓亭)인 공해(公廨)였다. 제천정은 한때 한강루(漢江樓)라고 불렀던 공해로, 한양에서 남쪽으로 여행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할 한강 나루터가 있는 곳인 동시에 한양에서 도 경치가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유명한 한강루가 있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제천정이라고 이름을 바꾼 뒤 중국에서 사신이 오거나 관료들이 공식적인 계회를 가질 때 애용하였다. 제천정은 이괄(李适)의 난(1624)으로 인조가 한밤중에 강을 건너 피신할 때 정자를 태워 불을 밝힌 이후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한강가의 정자 가운데 대표적인 정자로, 가장 이름 있고 규모가 컸다. 그래서인지 실경으로 표현된 많은 계회도가 이곳을 재현하고 있다. 조선 초 이후 중국 사신들이 유명한 한강을 보고자 할 때면 이곳에서 연회를 가지고 승경을 감상하였으며, 한강의 선유(船遊)를 시작하는 기점으로 애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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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옹원계회도(司饔院契會圖)
사옹원계회도(司饔院契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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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옹원계회도(司饔院契會圖)는 16세기 중엽 이곳에서 이루어진 사옹원 관원들의 계회를 재현한 작품이다.198)이 작품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박은순, 「조선 초기 강변 계회와 실경산수화: 전형화의 한 양상」, 『미술 사학 연구』 221·222, 한국 미술사 학회, 1999, 43∼76쪽. 표제에는 사옹원계회도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에 계회 장면을 그렸으며, 하단에는 계회에 참석한 사옹원 관원들의 좌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에는 계회에 참석한 인사들이 관료임을 시사하듯이 관복을 입고 제천정 안에 앉아 상을 받고 연회를 즐기고 있으며, 정자 밖에서는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정자 아래쪽 강가에는 한강을 건너려는 행인들과 나룻배들이 보이고, 강 건너편에는 덤불처럼 보 이는 나지막한 숲 가운데 건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 건물은 관영 숙박 시설인 사평원(沙平院)을 그린 것이다.199)박은순, 「조선시대 누정 문화와 실경산수화」, 『미술 사학 연구』 250·251, 한국 미술사 학회, 2006, 159쪽. 화면 위쪽에는 커다란 산등성이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가장 크게 보이는 산은 제천정의 건너편에 솟아 있는 청계산이다. 화가는 계회 장면을 재현하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작게 그리고, 강과 산 등 경치는 크게 그렸다. 이 계회도에 재현된 아름다운 승경은 왕도 정치가 이루어진 태평성대의 표상이며, 이 작품이 조선 초 관료 계층을 선도하던 사장파 문인들의 정치관과 사상이 반영된 회화임을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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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당계회도 부분
독서당계회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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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정계회도 이외에 독서당 관원들의 모임을 재현한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도 동호계회도의 한 유형이다. 독서당은 국가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현재 옥수동 언덕에 위치한 관아였다.200)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에 관하여는 박은순, 앞의 글, 1996, 45∼76쪽 참조. 독서당의 위치는 여러 번 변하였다. 그러나 독서당계회도, 또는 동호계회도(東湖契會圖)에 표현된 건물은 옥수동에 위치한 건물이다. 그러나 독서당계 회도는 제천정계회도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독서당은 화면의 중앙에 작게 나타나고, 독서당 건물의 뒤로는 산이 솟아 있으며, 그 앞으로 커다란 강이 흐른다. 이 장면은 풍수적인 개념을 구성 원리로 삼아 그려진 것이다. 같은 동호 지역을 그렸으면서도 제천정계회도와 다른 이유는 독서당이 인재를 양성하는 서재(書齋)와도 같은 특별한 관아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집이나 관아를 세울 때에도 통상적으로 풍수 개념을 적용하였다. 이것은 좋은 땅에서 훌륭한 인재가 난다는 풍수 사상과 성리학의 자연관이 결합되어 영향을 준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관아인 독서당을 그릴 때 풍수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개념을 감안하여 독서당을 명당자리에 두고 산과 물을 배치하는 구도를 이용하여, 이곳이 특별한 길지(吉地)로 훌륭한 인재가 나는 곳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풍수적 실경산수화 혹은 풍수산수화라고 할 수 있는 실경산수화는 조선 초부터 제작되면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가치와 사상, 문화를 담아내는 예술로 정착되었다.201)풍수를 토대로 한 풍수적 실경산수화 또는 풍수 산수화에 대하여는 박은순, 앞의 글, 1996 ; 박은순, 「조선 중기 성리학과 풍수적 실경산수화-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를 중심으로-」, 『시각 문화의 전통과 해석』, 정재 김리나 교수 정년 퇴임 기념 미술사 논문집, 예경출판사, 2007, 389∼415쪽 참조. 이러한 경향은 이후 진경산수화까지 이어져 정선(鄭歚, 1676∼1759)의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 같은 작품을 낳은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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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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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강의 서호에서도 계회가 자주 이루어졌는데, 현재 양화대교 북쪽에 있는, 절두산(絶頭山)이라고 부르는 잠두봉에서 열리곤 하였다. 서호계회도라고 하는 이 계통의 계회도에는 근경 부분에 잠두봉 위에서 계회를 가지는 관료들이 나타나고, 그 앞으로 강줄기와 강줄기의 가운데 즈음 선유봉(船遊峰)이, 그리고 강 건너편으로 관악산과 그 주변의 산들이 나타난다.202)서호계회도(西湖契會圖)에 대한 논의는 윤진영, 앞의 글 참조. 기본적으로 동호의 제천정계회도와 같은 구성이지만 이곳에는 정자가 없고, 경치를 구성하는 요소가 다를 뿐이다.

이 밖에 선전관계회도(宣傳官契會圖)와 금오계회도(金吾契會圖)에서는 관아 건물을 화면의 중심에 크게 부각시키고, 주변의 경치를 재현하는 방식을 애용하였다. 관원들의 모습은 부각되지 않으며 이외의 요소들은 다른 종류의 계회도에서 성립된 예술적 관습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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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계회도
금오계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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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의 계첩으로 가장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제작된 것은 『금오계첩(金吾契帖)』이다. 금오계는 의금부(義禁府) 관원들의 계를 기록한 계회도로 관례에 따라 계회 장면은 작게 표현되고, 계회가 이루어진 의금부 관아와 주변의 경치를 크게 표현하였다. 그림 뒤에는 계회에 참석한 관원들의 좌목이 수록되는데, 대부분 새로운 관원이 교체되어 들어왔을 때 결성된 계회 를 계기로 제작되는 관행이 있었다. 정선이 의금부의 관원으로 있을 때인 1729년(영조 5)에 의금부도(義禁府圖)를 그린 적이 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정선이었지만 의금부의 관아 건물을 크게 부각시키는 오랜 관례를 따랐고, 다만 건물의 각도를 약간 조정하여 변화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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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도
의금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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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관아에서 근무한 동료는 아니지만 평생 동안 수시로 계회를 가지고 관계를 유지하는 모임으로 동경계(同庚契)가 있다. 동경 계회도는 전해지는 기록은 많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계회는 대부분 야외에서 풍류적인 모임으로 진행되었다. 표제와 그림, 좌목 등 계회도의 기본 형식을 갖추었으며, 실내의 계회를 그리면서 건축물을 위주로 표현한 작품도 전해지고 있어 관례화된 구성 방식이 형성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사대부 관료들의 계회를 담은 계회도는 16세기까지 가장 많이 제작되었고, 이때까지는 세로로 긴 축의 형식이 애호되었다. 17세기부터 관료 계회도의 제작은 이전에 비하여 다소 위축되었으며, 화면 형식도 바뀌어 축 이외에 화첩, 두루마리, 병풍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203)이러한 상황을 알려주는 기록으로는 이수광(李睟光), 『지봉유설(芝峰類說)』 권17, 고실(故實) 참조.

17세기에는 과거 급제를 기념하는 모임인 방회(榜會)가 자주 열렸고, 과거 급제 60주기를 기념하는 회방(回榜) 모임도 종종 있었다.204)사마방회도(司馬榜會圖)에 대하여는 박정혜, 「16·17세기의 사마방회도」, 『미술사 연구』 16, 미술사 연구회, 2002 참조. 같은 시기에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 즉 동년(同年)은 형제의 관계에 준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대부분 평생 동안 지속된 모임, 즉 방회로 유지되었다. 친분과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모임인 방회는 늘 정기적으로 모이는 모임은 아니었다. 그 유래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관료 사회였던 조선시대 내내 사대부들 간의 중요한 관습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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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기유사마방회도
만력기유사마방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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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기유사마방회도첩(萬曆己酉司馬榜會圖帖)』은 이조 참판 이민구(李敏求, 1589∼1670)의 집에서 열린 회방연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이 모임에는 1609년(광해군 1)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사람 중 당시까지 생존한 세 사람이 참석하였고, 연회를 축하하기 위해 다섯 사람이 손님으로 초대되었다. 그림에는 마당에 펼쳐진 차일 아래 세 사람의 회방자가 상석에 앉아 있고, 다섯 명의 손님은 아래쪽에 각기 상을 받은 채 앉아 있다. 옆에 앉은 네 명의 악공과 다섯 명의 기녀가 음악을 연주하고, 중앙에서는 두 명의 무동(舞童)이 춤을 추는 등 흥취 넘치는 연회가 묘사되었다. 이 그림에는 건축물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았고, 다만 다양한 시점에서 본 모습대로 그린 담장이 나타나며, 대문 밖 정경을 포함하고 화면의 위쪽에 나지막한 산들을 그리고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17세기에 흔히 나타나는 수법이다.

17세기에 제작된 동방 계회도의 특이한 사례로서 『송도사장원계회도(松都四壯元契會圖)』를 들 수 있다. 1612년(광해군 4) 개성부의 동료 네 명이 모두 장원 급제자였던 것을 기념하여 송도의 태평관(太平館)에서 모여 용두(龍頭), 즉 장원 급제자들의 계회를 가지고 여섯 폭의 계병(契屛)을 제작하였다. 용두회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하던 유습이며, 태평관은 본래 고려시대에 중국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이 계회도의 원작은 세월이 지나 모두 유실되었는데, 160년이 지난 1772년(영조 48) 당시 참석자 가운데 개성부 유수였던 홍이상(洪履祥)의 7세손인 홍명한(洪名漢)이 개성부 유수로 부임한 이후 두 벌의 계병을 다시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원작의 모습대로 첫 번째 폭에 사장원계의 장면을, 두 번째 폭부터 다섯 번째 폭까지는 송도 일대 명소의 사계절 장면을, 마지막 폭에는 홍명한이 1772년에 쓴 중수기(重修記)를 붙였다. 사계절 경치를 나누어 그린 새로운 유형의 계회도이지만, 제목과 건물로 표현된 계회 장면을 먼저 두고, 이어 실경산수화로 표현하며, 좌목을 기록하는 등 조선 초에 정립된 계회도의 기본 요소들을 여전히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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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사장원계회도 부분
송도사장원계회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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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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