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3장 만남과 유람
  • 1. 다양한 만남과 만남을 기록한 그림
  • 가족, 이웃, 향촌과의 만남, 양로연도·회갑연도·연지회도
박은순

이제까지 정리한 계회들이 사대부들 사이에 이루어진 만남이라고 한다면 사대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대상과 동기를 가진 만남도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부모를 공양하려는 효심에서 유래된 양로연(養老宴), 경수연(慶壽宴), 회혼례(回婚禮)이며, 동기간의 우애를 과시하는 연지회(連枝會) 등 가족의 번성과 화합을 축원하기 위한 모임도 있었다. 조선시대 내내 양로연은 국가적인 행사로 중시되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 국대전』 가례(嘉禮) 부분에 명기된 이후 국가에서는 매년 가을 사대부와 서인(庶人)에게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서울과 지방을 불문하고 8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작위(爵位), 수직(壽職)을 하사하거나 음식을 하사하였다. 이러한 제도와 습속을 배경으로 치러진 민간의 행사 가운데 가장 영예롭고, 길이 회자된 행사가 경수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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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일당구경첩』 부분
『애일당구경첩』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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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로의 이념을 사회적으로 실천하고, 동시에 자신의 부모를 공양하기 위한 행사를 그림으로 기록한 이른 예로는 이현보(李賢輔, 1467∼1555)와 관련된 두 점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이현보는 중앙 관료로서의 출세를 마다하고 노쇠한 부모를 공양하고자 지방 수령으로 나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이현보의 행보는 특히 사림파 문인들이 성리학적 이상을 사회 현실에 실질적으로 접목하고자 하였던 실천의 앞선 행태를 대표하여, 그의 낙향과 지방관 봉직은 문인 사회에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그는 향촌에 거주하면서 향촌의 질서를 회복하고 성리학의 이상을 향촌 사회에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향약(鄕約)을 장려하고, 양로연을 열면서 다양한 향촌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부모 공양을 위하여 안동 부사를 역임하던 시절인 1519년(중종 14) 이현보는 관아에서 80세가 넘은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는데, 양친 부모가 가까운 예안현에 살고 있었으므로 모셔 와서 함께 참석하게 하였다. 잔치가 끝난 후 이현보는 양로효친(養老孝親)을 실천한 의미 깊은 행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39명의 사대부들에게 잔치를 축하하는 시문을 받았다. 1554년(명종 9)에는 화가를 동원하여 양로연 및 여러 주요한 행사와 관련된 그림을 그리고, 이와 관련된 시문을 모아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상하권을 꾸몄다.

이 시화첩에는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丙戌重陽日 汾川獻宴圖)도 실려 있다. 이현보는 60세가 되던 해인 병술년(1526, 중종 21)에 부모님을 뵙기 위해 휴가를 내어 고향에 내려왔고, 당시 경상도 관찰사인 김희수는 이현보의 효성에 감복하여 수연(壽宴)을 열어 주었다. 시냇가에 펼쳐진 차일 아래에는 많은 노인이 상을 받고 앉아서 여러 악공과 기녀가 동원된 향연을 즐기고 있다. 이때의 양로연은 향촌 사회에 속한 노인들의 연회로 신분의 고하를 떠나 오직 나이에 의하여 참석자를 결정하고 사족과 서민이 고루 참여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사회 질서를 형성하고자 한 모임이었다. 이 작품은 성리학적 이상을 향촌 사회에 접목하고자 하였던 사대부의 의식과 실천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의미가 깊다.205)이현보와 사림파적인 예술관 및 실천에 대하여는 박은순, 「농암 이현보의 영정과 「영정개모시일기(影幀改模時日記)」」, 『미술 사학 연구』 242·243, 한국 미술사 학회, 2004, 225∼25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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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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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일당구경첩』 상하권에는 이현보의 생애를 대표하는 주요한 사건과 이를 기록한 그림, 그리고 그려진 사건에 대한 여러 문사의 축하 시문이 실 려 있다. 그가 추진한 양로연과 주문 제작한 양로연도, 『애일당구경첩』은 유학자로서, 지방관으로서, 자식으로서 양로효친의 이념을 실천하고, 이를 선양하기 위하여 남긴 기념비적 행적이며 작품인 것이다.

경수연은 양로효친 및 영친부모(榮親父母)라는 유학적 이념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가적으로 권장된 행사로, 사대부의 집에서 부모의 장수를 축하하기 위하여 베풀었다. 나라 안에 특별히 장수한 노인이 있으면 왕이 하사품을 내려 장수를 축하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경수연은 한 집안의 경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지역적·가족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행사이며, 이를 기념하고 오래 전수하는 자료로 삼기 위하여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 경수연도이다. 경수연도는 대부분 잔치를 주관한 사대부 집안이 주체가 되어 화공을 불러 제작하였으며, 한번 제작된 그림은 대대손손 집안의 가보로 전수되었다. 이러한 그림은 사대부 집안의 영예로운 역사와 전통을 증명하는 시각적 기록물로 인식되었기에 소중하게 보관되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원본이 훼손되었을 경우에는 모사를 통하여 다시 제작되는 관습이 형성되었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는 1605년(선조 38) 4월에 거행된 경수연을 다섯 장면에 나누어 그린 것이다. 제목을 기록한 제자(題字), 연회의 장면을 담은 그림, 경수연의 절차를 기록한 절목, 주요 참석자인 대부인과 차부인의 좌차, 행사를 진행한 계원 및 입시 자제(入侍子弟), 집사(執事) 자제의 좌목, 행사에 관련된 기록인 예조의 계사(啓辭),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서문, 1655년(효종 6) 이모본 제작 시에 지은 허목(許穆, 1595∼1682)의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조는 1603년(선조 36) 1월 이거(李遽, 1532∼1608)의 모친인 채씨가 만 100세가 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고기와 쌀을 하사하고, 이거를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하여 모친을 기쁘게 하였다. 또한, 이거의 부친인 이세순(李世純)을 이조 참판으로 추증(追贈)하여 채 부인이 정부인(貞夫人)이 되게 하였다. 같은 해 9월 이거는 형조 참판이 되었는 데, 이때 모친을 위하여 여러 공경과 관리를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으며, 잔치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축하하였다. 이 행사를 보고 사람들은 “어머니가 아들을 귀하게 하였고 아들은 어머니를 귀하게 하였다(母以子貴 子以母貴).”고 칭송하였다 한다. 또한, 채 부인이 102세가 되는 1605년(선조 38) 4월 70세 이상의 노모를 모시고 있는 13명의 관료들이 계를 결성하였는데, 이를 알게 된 선조가 한양 삼청동의 공해에서 경수연을 열도록 하였다. 선조는 잔치에 소용된 물자와 비용을 돕도록 명을 내렸고, 현재 전해지는 경수연도는 바로 이때의 행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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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조제재경수연도의 다섯 번째 장면
선묘조제재경수연도의 다섯 번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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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수록된 잔치는 모두 다섯 장면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장면은 경수연이 열린 청사(廳舍) 건물의 바깥쪽 정경이고, 두 번째 장면은 음식을 준비하는 조찬소(造饌所)이며, 세 번째 장면은 품계에 따라 앉아 있는 여러 계원이 음주가무를 즐기면서 계회를 하는 모습이다. 네 번째 장면은 잔치를 추진한 여러 자제가 모여 노부인들에게 술을 올리는 모습이고, 다섯 번째 장면은 경수연의 주인공인 노모들의 연회를 그렸다. 이 작품은 1605년 제작된 원본이 임진왜란으로 산실되자 1655년(효종 6)경에 선조의 행적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다시 제작한 작품으로 『의령남씨가전화첩(宜寧南氏家傳畵帖)』 중에 실려 있다.

집안의 화목과 유풍을 기념하고, 이를 길이 전하기 위해 치러진 각종 잔치와 이를 기록한 그림은 사회적·공리적 가치를 내면화하면서 가정과 가족, 친족의 의미와 역할을 규정하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시대 동안 회갑잔치, 칠순잔치, 연지회, 경수연, 회혼례 등 각종 집안 모임을 기록한 그림들이 꾸준히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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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지록도
심산지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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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환갑 또는 칠순까지 생존한 부모의 장수를 기념하는 생일잔치를 들 수 있다. 이때에는 자손과 친척, 지인과 이웃 등 많은 사람을 초빙하여 집안과 이웃, 향촌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가 치러졌다.

선비 화가로 유명한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장인 이형징(李衡徵)의 회갑잔치는 이형징이 거주하던 인천에서 열렸다. 그때까지 생존한 형제자매들과 자손, 친구, 이웃 등이 모두 모인 이 잔치는 이형징과 그의 형제자매들을 중심으로 한 잔치여서 연지회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 경상도에 살던 동생 이형상(李衡祥)은 참석하지 못하였고, 이형징은 이를 매우 애석해 하였다. 이 자리에는 윤두서도 참석하였고, 장인의 회갑을 축하하는 시문과 함께 장수를 축원하는 화제인 수성도(壽星圖)를 그려 바쳤다고 한다.

윤두서의 심산지록도(深山芝鹿圖)는 깊은 산속에서 보신하는 사슴과 장수와 기복을 상징하는 영지 및 대나무 등을 그려 상서로움을 기원하고 있다. 수성도는 아니지만 윤두서의 작품 중 드문 대작이고 정성을 다하여 그렸다는 점에서 누군가를 위하여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1788년(정조 12) 이덕무(李德懋, 1741∼1812)는 부친인 이성호(李聖浩, 1718∼?)의 일흔한 살 생일잔치 때 손님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친척과 오랜 벗들은 행사를 축하하는 작품을 남겼다. 음주가무와 시서화로 즐긴 풍류 넘치는 잔치였던 것이다.206)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71 부록 하, 「선고적성현감부군년보 하(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이름 높은 화가인 김홍도도 참석하여 파초와 국화, 매화와 대나무, 수성노인(壽星老人) 등을 그려 잔치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김홍도의 남극노인도(南極老人圖)는 1788년에 제작된 작품은 아니지만 수성(壽星)을 의인화하여 그린 화제로 참고가 된다.207)조선시대의 사적인 문인 모임에 대하여는 송희경, 앞의 글, 부록 166∼21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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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노인도
남극노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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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와수석시회도
이안와수석시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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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정조 13) 2월 남백종(南伯宗, 1729∼?)의 회갑을 맞아 열린 잔치의 장면이 이안와수석시회도(易安窩壽席詩會圖)에 담겨 있다. 정선의 손자인 정황(鄭榥)이 그리고 유한준(兪漢雋)이 서문을 쓴 이 작품은 사가(私家)의 정원에서 마을의 여러 노인이 모여 장수를 축하하는 모습을 그렸다. 장수를 축하하는 모임이지만 18세기 이후 시회가 유행하였던 까닭에 전통적으로 표현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시회를 하고 있는 듯이 재현하였다. 사대부 문인들의 다양한 만남은 조선시대 동안 삶의 주요한 방식으로 존재하였으며, 시대적·사회적·문화적 변화에 따라 모임의 방식도, 이를 재현하는 방식도 변화하면서 조선시대 문화의 한 단면을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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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혼례도 부분
회혼례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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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혼례도(回婚禮圖)는 결혼 60주년을 맞은 노부부가 모두 생존하고, 자손들이 번창함을 기념하여 열린 잔치를 기록한 그림이다. 회혼례 잔치를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수록하면서 행사의 장면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하 여 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하였다. 두 늙은 부부와 여러 후손들은 한자리에 모여 성장(盛裝)을 한 채 풍요로운 음식과 음악, 무용을 즐기는 잔치를 치르고 있다. 특별한 복락을 누린 선조들을 기념하고 후대에도 그러한 기쁨이 영속되기를 그림을 통하여 기원한 것이다. 회혼례도는 18세기 이후 자주 제작된, 관료의 이상적인 평생을 기록한 평생도(平生圖) 중의 한 장면에도 포함되어 사대부의 다복한 삶을 표상하는 소재로 정착되었다.

연지회도(連枝會圖)는 여러 형제가 높은 관직에 올라 성공하고, 또한 오래도록 장수하여 우애를 나누고 사는 것을 기념하는 잔치를 열고, 그 장면을 그림과 시문으로 기록한 작품이다.208)조구명(趙龜命), 『동계집(東谿集)』 권6, 「이군미기언가장연지회도발병진(李君美箕言家藏連枝會圖跋丙辰)」. 관료로서의 사회적 성공과 가정적인 다복함, 장수기복(長壽祈福)에 대한 염원 등 조선시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긴 여러 가치를 복합적으로 표상한 기록물로서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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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도
연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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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회도는 아니지만 연꽃을 주제로 한 그림은 형제간의 우애와 장수기복, 관료로서의 성공 등 조선시대 사람들이 중시한 가치를 담은 상징물로 꾸준히 애호되었다. 연꽃 그림은 보통 연못 가운데 여러 포기가 어울려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한자로 연지(蓮池)는 곧 연지(連枝)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서 곧 형제간의 우애와 번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은유적인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연꽃 그림(蓮花圖)은 궁중 장식화로부터 이름 모를 민간 화공의 소박한 그림까지 수없이 그려졌고, 상서로운 상징성을 가진 민간의 장식화로 조선 말까지 꾸준히 유행되었다.

이제까지 살펴본 여러 만남과 풍류, 잔치, 이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물로서의 회화 작품은 조선시대 회화가 당시 사람들의 독특한 가치와 소망, 이를 담아내는 문화적 방식으로서 중요한 의미와 기능을 지녔음을 보여 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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