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3장 만남과 유람
  • 3.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
  • 진경산수화에 담긴 조선 후기 문인 문화
박은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18세기 이후 제작된, 조선에 실재하는 경치를 그린 그림이다. 앞서 정리하였듯이 조선의 경치를 재현한 실경산수화는 성리학과 풍수 사상 등 자연 친화적인 사상과 철학, 이를 토대로 형성된 미학을 배경으로 조선 초부터 꾸준히 제작되었다. 18세기가 되면서 사대부 문인들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명승과 의미 깊은 명소를 찾아다니는 산수 유람의 풍조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명분과 이념을 중시하였던 이전의 사대부들과 달리 18세기의 선비들은 현실과 물리(物理)를 중시하고, 이를 표상하는 상징적인 대상인 산수 자연을 직접 답사, 체험하고 표현하는 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진경산수화는 바로 18세기의 새로운 시대 정신과 정치 사회적인 변화, 이를 토대로 형성된 선비 문화를 배경으로 탄생되었다.

18세기 초엽 조선 사회는 나라 안팎으로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였다.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은 큰 전쟁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이 가운데 17세기 중엽 조선을 뒤 흔든 병자호란은 중국의 새로운 패자로 대두한 만주족과의 전쟁이다. 만주족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조선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차츰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새로운 세계 질서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조선 조정은 춘추대의론(春秋大義論)을 토대로 존명배청(尊明排淸) 사상을 내세웠고, 북벌론(北伐論)과 의리론(義理論)을 국시로 삼으면서 청나라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18세기가 되자 청나라는 더욱 번성하였고, 국내적으로는 산업적·사회적·경제적 번영으로 인하여 전통적인 제도와 규범, 가치관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욕구와 변화가 나타났다. 청나라의 번영을 직·간접적으로 목도한 사대부들은 변화된 세계와 현실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절실하게 모색하였다.

18세기 이후 서서히 권력을 장악한 노론 세력은 이념과 명분을 고수한 보수적인 당파이지만, 새로이 대두된 사회 문제와 변화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였다. 말폐(末弊)를 드러내면서 시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성리학을 재구성하여 현실적인 과제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노론의 보수파인 호론(湖論)과 진보파인 낙론(洛論) 간에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논쟁이 진행되었다.247)이 논쟁의 쟁점은 모두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인물성동부동(人物性同不同)은 그 가운데 한 가지 쟁점이다. 호락(湖洛) 논쟁에 대하여는 류인희, 「한국 성리학과 호락 논쟁」, 한국사상사학회 편, 『한국 사상사 입문』, 서문 문화사, 2006, 235∼265쪽 ; 지두환, 「성리학의 이념 구현과 예학」, 같은 책, 270∼272쪽 참조. 한양 지역에 세거하던 낙론계 인사들은 인물성동론을 내세우며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별성을 부정하였다. 인물성동론은 궁극적으로는 청나라의 등장과 번영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기한 것이며, 객관적·상대적 가치관의 도래를 보여 준다. 진취적·현실적 인식을 토대로 형성된 인물성동론은 18세기 후반 북학파(北學派)에 의하여 오랑캐나 중화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관점을 주장하는 북학론이 제기되는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18세기의 새로운 현실주의는 관념론과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던 보수적인 사대부들에게 현실과 물질, 객관성과 상대성, 구체성과 개인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였다.

진경산수화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현실 지향적인 사대부 계 층의 인식이 회화 분야에 적용된 것이다. 이제 그림에서 다루는 대상은 더 이상 이념이나 명분, 또는 이상을 담아내기 위한 관념적인 주제나 경관이 아니었다. 산수화의 제재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물이 되었다. 산수란 곧 물성(物性)을 대표하는 대상이요, 물상은 물리(物理)의 현현(顯現)이며, 사물의 형상과 내재하는 이치는 동일하다. 따라서 물상에 나타난 물리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만사(萬事)에 대한 만리(萬理)를 얻고 나아가 천지만물(天地萬物)에 일관하는 이(理)를 깨닫는 것은 조선시대 문인들이 산수 자연을 관찰하고 표현한 중요한 이유였다.248)김은미, 『조선 초기 누정 문학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참조. 많은 물상 가운데서도 우주적인 이를 표상한다고 여겼던 산수는 보수적인 사대부층의 이상과 관념에 대한 애착을 무리 없이 대변할 수 있는 대상이었기에 산수 경물에 대한 관심과 답사는 곧 현실에의 개입이 되었고, 이를 표현함으로써 현실에 동참하는 대리 충족의 실천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 회화의 주요한 경향으로 부상하였다.249)진경산수화에 대하여 여러 학자가 다양한 연구와 해석을 진행하였다. 그간의 연구에 대하여는 유준영, 「겸재 정선 금강전도 고찰」, 『고문화』 18, 한국 박물관 협회, 1980, 13∼24쪽 ; 유준영, 「작가로 본 겸재 정선」, 『겸재 정선』 한국의 미 1, 중앙일보사, 1984, 190∼194쪽 ; 이동주, 「겸재 일파의 진경산수」, 『월간 아세아』, 월간 아세아사, 1969.4, 160∼186쪽 ; 이태호, 「겸재 정선의 가계와 생애」, 『이화사학연구』 13·14, 이화사학연구소, 1983.6, 83∼93쪽 ; 「조선 후기 문인 화가들의 진경산수화」, 안휘준 편저, 『회화』 Ⅱ 국보 20, 예경문화사, 1986, 223∼230쪽 ; 최완수, 「겸재 진경산수화고」, 『간송 문화』 21, 한국 민족 미술 연구소, 1981, 39∼60쪽 및 『간송 문화』 29, 한국 민족 미술 연구소, 1985, 35∼60쪽, 『간송 문화』 35, 간송 미술관, 1988, 37∼63쪽 및 『간송 문화』 45, 한국 민족 미술 연구소, 1993, 43∼88쪽 ; 최완수,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 참조.

진경산수화의 핵심은 진(眞)의 추구에 있다. 진이라는 용어는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애용되면서 대단히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애호된 진은 무엇보다도 현실을 중시하는 경향을 대변하는 개념이며 이상으로 인식되었다.250)진과 진경의 뜻과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박은순, 앞의 책, 79∼102쪽 참조. 그 이전까지 중시된 관념과 규범의 중시를 비판하며 제기된 진은, 곧 구체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객관적인 세계로 개입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 조선이 대면하게 된 국제적·정치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담아내며 형성된 진의 추구는 회화 분야에서는 진경산수화의 대두로 귀결되었다.

한편, 진경산수화를 거론하면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실경산수화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진경산수화는 실경산수화처럼 조선에 실재하는 경물을 그린 그림이다. 실경이라고 하지 않고 구태여 진경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용어에 조선 후기의 특별한 경향과 사조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251)진경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박은순, 앞의 책, 79∼101쪽 ; 박은순, 「조선 후기 서양 투시도법의 수용과 진경산수화풍의 변화」, 『미술 사학』 11, 한국 미술사 교육 학회, 1999 ; 박은순, 「천기론적 진경에서 사실적 진경으로 : 진경산수화의 현실성과 사실성」, 『한국 미술의 사실성』, 눈빛출판사, 2000 ; 박은순, 「조선 후기 사의적 진경산수화」, 『미술사 연구』, 미술사 연구회, 2002 ; 박은순,「진경산수화의 관점과 제재」, 『우리 땅 우리의 진경』, 국립 춘천 박물관, 2002 ; 박은순, 「진경산수화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사상사학』 28, 한국사상사학회, 2007 참조.

조선 후기에는 본래 경치 경(景) 자를 쓴 진경(眞景)과 경계 경(境) 자를 쓴 진경(眞境)이란 용어가 통용되었다. 그 가운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진경(眞景)은 18세기 초 진경산수화가 나타난 즈음에는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았고, 그 대신 진경(眞境)이 선호되었다. 진경(眞境) 또는 진경(眞景)이란 용어에는 현실 또는 경물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사상적 인식과 이를 반영한 문예관이 담겨 있다. 회화에 있어서 경물을 직면하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의 주관적인 체험이란 의미를 함축한 진경(眞境)이란 용어는 18세기 전반 낙론계 인사들이 애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진경(眞境)에 대한 추구는 이를 체험하기 위하여 산수 경관을 직접 답사하고 경험하는 것을 중시한 방법론인 산수유(山水遊)와 연결되어 실천되었다.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진경(眞境) 이외에 사물 또 경물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과 표현을 강조하는 진경(眞景)이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이후 근대적인 미술사가 형성된 20세기 초에는 전통 회화와 관련된 미술사 서술에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용어가 자주 인용되면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다시 한 번 정의하자면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실재하는 경치를 재현한 작품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그런 점에서 실경산수화와 구분하여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진경산수화가 중요한 것은 18세기에 일어난 현실에 대한 자각과 관심이 이전까지 주류를 차지하였던 관념적·명분론적 사고를 대치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며, 예술이라는 점이다. 선비들은 오랜 권위와 이념, 전통으로 작용하였던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변화된 현실을 수용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모색의 결과와 성취를 예술 분야에까지 적용하여 실천하였다. 조선 후기의 그림에서는 관념적·이념적 주제인 관념 산수화와 고사 인물화(故事人物畵), 사군자화(四君子畵) 대신에 실경을 그리는 진경산수화,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는 풍속화(風俗畵), 실제 사물을 관찰하여 그리는 사생화(寫生畵) 등이 등장하였다.252)조선 후기 회화의 새로운 경향에 대하여는 안휘준, 『한국 회화사』, 일지사, 1980 참조. 진경산수화는 그림 가운데 가장 권 위적이고 보수적인 산수화 분야에서 새로운 기치를 내세운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상상의 풍경을 주로 그렸던 이전의 관념 산수화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대상을 그려야 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제기하였을 뿐 아니라 그 방법론으로 반드시 대상을 만나기 위한 현장 기행, 즉 산수유를 강조하였다. 산수유는 직접적인 견문과 경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다. 진경산수화를 그린 화가들은 현장을 답사하고, 현장에서 스케치하였다. 이러한 모든 변화의 시초는 노론계 인사들, 그 가운데서도 한양에 세거하던 낙론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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