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2. 그림 속의 화조와 사군자
  • 조선시대 화조화의 특징과 의미
  • 사생과 사의를 넘나들며 고유 미감을 발현하다
백인산

조선 후기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풍미하였던 시기답게 화조화에서도 사의성 못지않게 사생성을 강조하고 실존적인 생동감이 중시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 화조화풍의 변화는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과 같은 진보적인 사대부 화가들에 의해 선도되었다. 이들은 조선 중기 수묵 중심의 사의적인 화조화풍과는 달리 선묘(線描)를 위주로 시각적 사실성과 내면의 생동감을 동시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 화조화의 변화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 바로 정선의 화조화들이다.

정선은 주지하듯이 진경산수화의 대성자로 알려져 있지만, 화조화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성취를 이루어 내었다. 간송 미술관 소장의 8폭 화조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각종 화초와 곤충은 물론이거니와 고양이, 쥐, 개구리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들을 작품의 주제와 걸맞 게 적절히 배합하여 화폭에 옮겨 내었다. 소재만 놓고 보면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화조화들과 유사하지만, 표현 방식이나 작가의 의경과 취상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서과투서(西瓜偸鼠)가 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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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서과투서
정선의 서과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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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쥐 한 쌍이 큼지막한 청수박을 훔쳐 먹는 장면을 포착하였는데, 내용상으로는 신사임당의 그림으로 전하는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8폭 화조화중 수박을 갉아먹는 쥐와 흡사하다. 그러나 도식적이며 평면성이 강한 신사임당의 그림과는 달리, 치밀한 구도와 원숙한 필치, 진채(眞彩)와 담채(淡彩)를 혼용한 정교한 설채(設彩)를 통해 현장감과 사생감을 한껏 살려 내고 있다. 한 귀퉁이가 파여 나간 수박의 형상이며, 수박 속에 들어가 먹고 있는 쥐와 밖에서 머리를 쳐들고 망을 보는 쥐의 묘사도 눈동자와 자세를 통해서 심리 상태까지 읽어 낼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하다. 대상을 직접 보고 사생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표현들이다. 현실과 자기 주변에 대한 애정과 자긍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화조화에서 이루어 낸 또 다른 ‘진경(眞景)’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적 화풍으로 치달아 가던 조선 후기 화조화풍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고도로 이념화된 남종(南宗) 문인화를 추종했던 만큼 대상의 사실성보다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출하는 주관적인 사의성을 중시하였다. 물론 그의 사의성은 일정 수준의 형상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조선 중기의 화조화풍과는 구분되지만, 정선이나 조영석에 의해 개진되고 남리(南里) 김두량(金斗樑, 1696∼1763)이나 화재(和齋) 변상벽(卞相璧)과 같은 화원 화가에 의해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여 간 사생적인 화조화풍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 준다.

심사정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사생이 그림의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또한, 명대 문인화풍을 추종하였기 때문에, 그 유취(遺臭)가 배어 있는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이나 『십죽재화보(十竹齋畵譜)』와 같은 명청대 화보에 전재된 화조화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화보를 단순히 모방하고 번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변형시키고 재해석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경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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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정의 수금문향
심사정의 수금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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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미술관 소장의 수금문향(水禽聞香)은 현재 화조화풍의 전형적인 양태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비취색 물총새 한 마리가 연꽃 대를 타고 앉은 장면을 그렸는데, 화면의 구성이나 물총새의 양태에서 화보의 느낌이 짙게 묻어난다. 그러나 담백하고 경쾌한 필치로 묘사된 물총새와 거친 필묵으로 대담하게 쓸어 낸 늙은 연잎의 양태에서 문사적인 묵희의 묘리가 살아 숨쉬고 있다. 이렇듯 심사정의 화조화는 대상의 묘사보다, 그를 통해 자신의 심회를 표출하는 주관적 정취를 강조하고, 운필 행위와 필묵 자체의 느낌을 중시하는 묵희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심사정의 화조화는 남종 문인화풍과 맥이 닿아 있으며, 사생보다는 사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짙을 수밖에 없었다. 심사정의 화조화풍은 동시대의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1760), 표암(豹菴) 강세 황(姜世晃, 1712∼1791) 등 문인 화가들의 공명을 얻어 조선 후기 화조화풍의 한 양식으로 자리 잡아, 사생 위주의 조선 후기 화조화의 외연을 넓히고 예술적으로 한층 고양시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정선의 사생 화풍과 심사정, 강세황 등의 사의 화풍을 거쳐 오면서 한층 풍부하고 다양해진 조선 후기 화조화풍은 김홍도(金弘道)에 이르러 심미적·기법적 완결을 이룩하였다. 김홍도는 화원 화가였지만, 여느 시인보다도 풍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고, 여느 문인에게도 뒤지지 않는 교양과 풍모를 갖추고 있던 인물이었다. 또한, 평생토록 문인의 의식을 품고 문인의 삶을 지향하며 살아갔다. 더구나 당대에 명망 있는 문사들이 앞을 다투어 김홍도의 그림을 상찬하고 소장하기를 원하였으니, 그의 그림에는 여느 문인들의 그림에 못지않게 당시 사대부들의 지향과 심미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 문화 절정기를 구가한 세대답게 기존의 사생 화풍과 사의 화풍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개성 있는 화조화풍을 창안하였다. 그의 절친한 동료였던 고송유수관(古松流水館)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이 소나무를 그리고, 그 아래 당당한 자태의 조선 호랑이를 그려낸 송하맹호(松下猛虎)는 정교하고 치밀한 필치에다 서양화의 단축법(短縮法)과 명암법(明暗法)까지 적절히 구사하였다. 이런 사실적인 사생 화풍은 전대의 변상벽을 압도할 만큼 정치하지만, 김홍도 화조화의 특장과 개성은 탄탄한 사생력의 토대 위에 사의(寫意)와 시정(詩情)이 절묘하게 융회된 작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간송 미술관 소장의 군작보희(群鵲報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보름달이 뜬 한여름 버드나무 가지에 자리한 한 무리의 까치를 소재로 한 그림인데, 대경식(大景式) 구도여서 중심 소재인 까치가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작다. 김홍도가 주재(主材)인 까치의 사생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면서 이런 대경식 구도를 취한 것은 시정의 표출에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 즉, 주변의 정경과 여백을 통해 시적인 정취와 서정적인 분위기를 살려 내고자 한 것이다. 이에 까치와 버드나무 등 화면을 구성하는 경물들의 형상성은 최대한 억제하고, 달무리진 하늘과 여백을 통해 여름밤의 은은하고 고즈넉한 정취를 한껏 고양시키고 있다. 이에 덧붙여 “몇 번이나 직녀교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제사(題辭)를 적어, 그림 자체의 시정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부분에까지 시화 일치(詩畵一致)를 시도하고 있다. 조선 후기 여러 화가 중 유독 김홍도의 화조화에 제시가 빈번히 등장하고 있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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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군작보희
김홍도의 군작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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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고유의 이념으로 내면화된 성리학과 외래 문화와의 활발한 접촉과 교섭을 통해 일어난 현실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인식을 토대로 참신한 화풍들이 대거 출현하였다. 정선에 의해 제기된 사실적인 조형성과 생동감 넘치는 현장감을 중시하는 사생풍의 화조화가 조선 후기 전반부에 크게 유행하였고, 후반부에는 심사정, 강세황 등이 주도한 담박하고 문아한 남종 문인화풍의 사의 화풍이 출현하여 조선 후기 화조화풍의 일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두 가지 화풍 모두 기존의 화조화풍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조선 고유색이 한껏 발현되어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각자의 이념적 토대와 이에 따른 문예적 성향, 혹은 시대 조류에 따라 중시하는 취상과 미감에 편차를 보이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조선의 자연과 일상에 대한 자긍과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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