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2. 그림 속의 화조와 사군자
  • 조선시대 화조화의 특징과 의미
  • 법고(法古)와 창신(創新)의 갈림길
백인산

조선의 고유색을 한껏 고양시켜 가던 조선 후기 화조화풍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김정희와 그의 문도들에 의해 문예 사조가 일변하였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글씨나 그림 모두에서 문자향, 서권기로 표현되는 높은 정신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서화불분론(書畵不分論)에 입각하여 회화적 조형성을 함축한 글씨와 서법을 따르는 그림을 요구하였다. 사대부는 물론 중인(中人) 출신의 여기 화가와 직업적인 화원에 이르기까지 문예에 관심과 재능이 있는 많은 이들이 김정희의 서화관(書畵觀)에 공감하고 추종하였다. 당대의 예원(藝苑)은 김정희의 훈도(訓導) 아래 고답적(高踏的)인 문인화풍으로 급격하게 경도되어 갔고, 조선의 고유색을 한껏 현양하였던 조선 후기의 서화 전통은 일시에 퇴조하였다. 그 결과 사군자화가 화단의 주류로 부상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회화성과 장식성이 강한 화조화는 조락(凋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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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우의 호접
남계우의 호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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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우의 호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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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정희의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는 서예 적인 필치로 지고한 이념미를 추구하던 문인화풍에 변화의 조짐이 비치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의 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사생 화풍이나 서정적 감흥과 낭만적 정취를 중시하는 화조화풍이 다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남계우(南啓宇, 1811∼1888)의 화조화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남나비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나비 그림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인물이다.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호접도(蝴蝶圖)는 뭇꽃이 만개한 화단을 찾은 각종 나비를 그렸는데, 조선 제일 나비 그림의 명가라는 예칭(譽稱)에 부끄럽지 않은 정밀한 사생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나비와 꽃들의 양태는 마치 도안(圖案)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생기가 결여되어 있어 무미건조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따라서 정치한 사생에도 불구하고 생동감과 현장감이 결여되어 있다. 화려한 진채에서 비롯된 장식성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사생적 화조화풍이 절정을 지나 양식화된 화풍으로 이해된다.

그 반면에 홍세섭(洪世燮, 1832∼1884)과 김수철(金秀哲)의 화조화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참신하고 개성 있는 화풍을 보여 주고 있다. 홍세섭의 유압도(游鴨圖)는 대담한 화면 구성과 단순화된 배경 묘사에서 조선 중기 화조화풍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오리의 유영으로 인해 파문진 수면을 부감법으로 포착하여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 독특한 구도나 발묵(潑墨)과 파묵(破墨)을 번갈아 쓰며 미묘한 농담의 대조와 조화를 이끌어 낸 변화무쌍한 묘사는 현대 수채화풍을 연상시킬 만큼 감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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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섭의 유압도(游鴨圖)
홍세섭의 유압도(游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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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의 화조화 역시 이에 못지않게 독특하고 개성적이다. 붉은 홍련(紅蓮)을 그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하화(荷花)는 김수철 화조화의 특성들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경쾌하고 속도감 있는 필치로 간략하게 윤곽을 잡은 후, 그 위에 습윤한 담채를 올려 담백하고 상큼한 느낌을 잘 살려 내었다. 묵희적인 간일한 필치와 청담하고 추솔(麤率)한 설채에서 김정희가 추구하였던 문인화풍의 일기(逸氣)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감각적이어서 일종의 탐미적 취상이 묻어나기도 한다. 이런 탐미적 취상도 김정희 서화의 일면임에는 틀림없으나, 이를 철저히 내면화시킨 김정희와는 달리 김수철은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오히려 자신의 특장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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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 하화(荷花)
김수철 하화(荷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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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조선 말기 화조화풍은 전통 화풍이 양식화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양식적인 근원을 규명하기 어려울 만큼 이색적인 화풍이 공존하고 있다. 이는 조선 말기 문예의 종장이라 할 수 있는 김정희에 의해 전통 화풍이 단절된 후, 작가 개인의 경험과 취상이 다채롭게 분출되었기 때문이다. 확고한 이념적 토대의 부재가 근본적인 원인이겠으나, 오히려 이 점이 작가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효과를 낳기도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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