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
  • 3. 생활 속의 화조와 사군자
  • 도자의 문양
  • 의복의 문양
백인산

의복은 일상생활의 필수 요소이면서 인간의 개성과 미적 지향이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예술의 한 분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통 시대에는 사회적인 신분이나 직분에 따라 복식의 종류와 형식, 색조, 문양 등이 제한되어 개인의 특성과 미감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복은 용도와 취상에 따라 형식, 색조, 문양 등이 부단하게 변화해 왔다. 그중에서도 의복의 문양은 형식이나 색조와는 달리 특정한 의미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단순한 장식이나 미적 향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어느 시대의 특정 계층에서 유행한 문양은 의복을 착용하는 주체의 미의식을 보여 줌과 동시에 현실적·관념적 지향을 가늠하게 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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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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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대부의 의복은,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고려에 비해서도 훨씬 단순하고 검박하다. 외형적인 호사나 사치를 지극히 경계했던 유교적 관념의 발로이다. 조선 후기 영조 연간에 문단(紋緞), 즉 무늬가 들어 있는 비단을 금하는 윤음(綸音)을 수차례에 걸쳐 내린 기록은 무늬가 들어간 의복을 불필요한 사치로 보는 지배층의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296)『영조실록』 권57, 영조 19년 4월 정유. 그러나 이 사실은 역으로 당시 조정에서 직접 나서서 제재해야 할 정도로 많은 사대부들이 무늬가 들어간 의복을 선호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청빈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관념적 당위와는 별개로 탐미나 기복 같은 본능적이고 현실적인 욕구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런 점에서 조선 사대부들의 복식 문양에 화조 와 사군자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현상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사대부들의 의복을 위시한 조선 복식의 문양에 화조나 사군자가 선호된 근본적인 원인 역시 소재의 다양한 상징성 때문이었다. 특히, 장수, 다자, 부귀의 상징으로 상용되던 복숭아, 포도, 석류, 연꽃, 모란 문양 등이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에 비해 사군자는 단독으로 쓰인 경우가 매우 드물었고, 길상적 소재와 함께 어울려 쓰인 경우가 많았다. 몸에 착용하는 의복은 아니지만 가마 덮개, 벽걸이, 방석으로 두루 쓰였던 깔개(毯)의 문양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 형태로 펼쳐진 다섯 그루의 매화가 주 문양이며, 매화 사이에 학, 까치, 대나무, 복숭아, 보배 무늬 등을 보조 문양으로 넣었다. 여기서 매화는 군자나 지사 같은 전통적인 상징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여타 길상 문양과 더불어 장식적인 효과를 높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사대부의 복식에서 현실적 복락을 바라는 길상적 소재들이 크게 선호되었고, 도덕적 규범의 성격이 강한 사군자가 상대적으로 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복식 문양에 담아내고자 했던 그들의 이상과 소망을 가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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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령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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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령포의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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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인조 연간에 판관을 지낸 이응해(李應獬, 1547∼1627)의 묘에서 출토된 방령포(方領袍)의 모란문과, 숙종 연간의 무신이었던 홍우협(洪禹協, 1635∼1691)의 묘에서 출토된 비단 조각의 포도와 다람쥐 문양은 부귀와 공명, 다자와 자손의 번창을 바라는 사대부의 염원을 담고 있으며, 전 체적인 미감도 매우 화려하여 연미(姸美)하다. 수차례의 전쟁과 내란을 겪은 장수들이 즐겨 입던 의복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격변기를 살아갔던 이들의 의복에 이처럼 현세 기복적인 성격이 강한 문양들이 시문된 사실은 사대부들이 지닌 현실적 소망의 성격과 정도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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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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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대부 의복은 대체로 무늬가 없는 단색조의 직물로 제작되었다. 소박하고 정갈한 기품을 중시하였던 그들의 미적 지향이 복식에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식적인 문양이 시문된 의복도 있었는데, 이 경우 ‘꾸밈’이라는 본래 목적에 걸맞게 길상이나 벽사의 의미를 지닌 소재에 현실적 염원을 담아내곤 하였다. 사대부들 역시 학습된 규범적 지향과 함께 본능적인 미적 향유와 과시욕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과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응해의 묘에서 나온 시복(時服)과 병마절도사를 지낸 김여온(金汝溫, 1596∼1656)의 묘에서 출토된 시복의 옷감 구성은 매우 흥미롭다. 전자는 겉단령은 정갈하게 초로, 받침옷인 직령에는 화조 문양이 들어간 비단으로 만들었고, 후자는 겉감은 무늬가 없는 비단으로, 안감은 화려하고 정교한 구름무늬의 비단을 썼기 때문이다.297)조효숙, 「우리나라 직물 무늬의 상징과 아름다움」, 『우리나라의 전통 무늬』 1 직물, 국립 문화재 연구소 편, 눌와, 2006. 여기서 주목할 점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보다 안에 감추어진 부분이 오히려 화려하고 장식적이라는 사실이다. 의복의 이채로운 구성은 표리가 부동한 사대부들의 위선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 규범과 본능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양자를 충족시키며 조화를 꾀하려 한 그들의 고충과 노력을 읽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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