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1장 한국 언론의 역사와 광고
  • 7. 1980년대의 언론과 광고
  • 언론 통제 수단으로서의 광고
이용성

전두환 신군부는 선거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무시한 채, 1979년 12·12 사태로 군부 내 헤게모니를 획득한 다음 1980년 5·17 비상 계엄령을 계기로 군사 쿠데타를 도발하여 국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전두환 신군부는 법적 정통성이 결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5·18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부담감으로 국민적 저항을 두려워하고 있었다.70) 김민환, 앞의 책, p.605. 그들은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비판적 여론의 형성을 차단하고 국민 여론을 우호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언론 장악을 통한 여론 조작과 선전을 도모하였다.

전두환 신군부는 언론계 내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대단히 폭력적인 인적 청산 방식인 언론인 강제 해직을 강행하였다. 동시에 언론사 통폐합이라는 일제 강점기 파시즘 언론 정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폭거를 단행하였다. 무려 800명에 이르는 언론인을 강제 해직하고 신문사, 방송사, 통신사 등 언론사를 통폐합한 폭거는 법적·정치적 정통성을 결여한 신군부에게 위협적이던 언론 민주화의 가능성 혹은 민주적 여론 형성의 흐름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언론계 정화’나 ‘언론인의 자 질 향상’을 위하여 실시하였다는 언론인 강제 해직의 실체는 전두환 정권의 언론계 장악 의도와 사내(社內)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저항 기질의 언론인을 제거하려는 신문사 경영진의 의지가 야합한 결과물이었다.71) 1988년 개최된 언론청문회에서는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에 전두환 신군부가 요구한 비판적인 언론인뿐만 아니라 각 사의 언론사 사주와 중간 간부가 해직 대상자를 해직 명단에 추가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강대인 외, 앞의 책, pp.180∼181). 언론사 통폐합은 전두환 정권이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통제 가능한 미디어를 선별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동종 미디어 시장 내의 경쟁자 수를 줄여서 미디어 산업의 독과점적 구조를 굳혀 미디어 기업에게 좀 더 안정적으로 이윤을 획득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72) 신군부의 신문시장과 방송시장 개편은 미디어시장 진입 장벽 강화와 함께 소수의 신문사와 방송사의 독과점 구조를 고착시켰다. 이는 각 언론사의 광고 수주력을 확대시켜 경쟁력을 크게 높여 주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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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통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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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폭력적인 언론인 강제 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을 통하여 언론 구조를 개편한 전두환 정권은 더 나아가 언론을 정부의 일개 기구처럼 만들어 ‘제도 언론’으로 전락시키기 위해서 ‘언론 기본법’을 1980년 12월 16일 제정하였다. 언론 기본법에 따라 문화 공보부 장관이 정기 간행물 등의 등록 취소와 발행 정지 등을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언론 기본법 제14조는 언론 기업에 외국 자금의 인입을 제한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 방송의 재정에 타격을 입혔고 더욱이 상업 광고 방송도 금지시켜 기독교 방송은 재정적으로 독립성을 상실하게 되었다.73) 결국 방송광고공사의 공익자금을 지원받게 되었다(김해식, 앞의 글, p.162). 언론 기본법은 전두환 정권이 언론 통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법적 장치로 ‘언론 악법’이라 불려도 지나치지 않았다.74) 문공부 장관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등록 취소와 발행 정지가 가능하다는 비판을 반영하여 1985년에는 의견 진술 기회를 제공하는 청문 절차를 마련한다(김민환, 앞의 책, p.608).

전두환 정권은 상시적으로 언론의 취재 보도 내용에 직접 개입하기 위해 유신 체제와 마찬가지로 공안 기관원을 언론사에 상주시켰다. 언론 통제 기구를 일원화하고 공식화하기 위해 문화 공보부 내에 홍보 조정실을 만들어 이른바 ‘보도 지침’을 각 언론사에 내려 보냈다. 보도 지침은 신문사와 방송사 등 모든 언론사에 하달되었고, 이 과정에는 국가 안전 기획부가 개입하였다고 한다. 보도 지침은 기사의 크기와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통제를 통해 보도 내용과 형식을 규제하였고, 당시 중앙 일간지가 보도 지침을 실제로 이행하는 비율은 평균 77.8%에 이르렀다고 한다.75) 김해식, 앞의 글, pp.157∼159.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로 전두환 정권은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폭력적 통제와 법적 통제라는 채찍을 넘어서 언론과 언론인에게 당근을 제공하기 위한 경제적 통제(특혜)를 더욱 강화하였다. 경제적 통제에는 각 언론 산업의 독과점 구조나 구독료와 지면 카르텔 묵인, 경영 다각화 지원처럼 언론 기업을 지원하는 방식과 각종 명목의 자금으로 언론인을 지원하는 방식 두 가지가 있었다.76) 김해식, 위의 글, p.171.

먼저, 신문 협회는 1981년에 신문 윤전기 도입에 필요한 관세 특혜를 정부에 요청하였고 정부는 연말에 관세법의 부칙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20%였던 관세를 1982년 한 해만 4%로 대폭 감면해 주었다. 이 기간 동안 전국 12개 신문사가 30여 대의 윤전기를 도입하였다. 개별 언론사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도 이루어졌다. 연합 통신에게는 방송 광고 공사가 조성한 공익 자금에서 부지 매입 자금을 무이자로 대출해 주고 토지 양도 차익에 대한 세금 면제 혜택을 베풀었고, 『서울신문』에게는 시내버스 광고 사업 대행권을 주기도 하였다.77) 정연우, 「1980년대 언론의 사회적 성격」, 김왕석·임동욱 편, 앞의 책, pp.248∼249.

또한 정부 기관 및 지방 자치 단체의 관보, 공보, 반상회보, 사보 등 연간 600억 원 정도의 인쇄물을 신문 기업이 수주하였고, 현재도 남아 있는 계도지(啓導紙)가 내무부 예산으로 집행되었다. 인쇄업은 중소기업 고유 업종으로 지정되어 있어 대기업화되어 가던 신문 기업이 참여할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 기관과 지방 자치 단체에서 발주하는 인쇄물을 수주하는 특혜를 누렸다.78) 정연우, 위의 글, p.249. 당시 정부는 최대의 단일 광고주로 1985년 이후 연간 100억 이상의 광고비를 지출하였다. 따라서 정부 광고를 매개로 한 언론 통제의 영향력은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당시 광고비가 신문에 집중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문 언론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언론인 회유를 위한 다양한 경제적 지원으로는 임금과 후생 복지 등의 근로 조건 향상 유도, 방송 광고 공사의 공익 자금을 활용한 해외 연수와 여행 지원, 언론인 금고의 주택 자금 및 생활 안정 자금 저리 융자, 자녀 학자금 지원 등이 있었다. 심지어 언론사 기자의 급여 중 20%를 비과세 대상으로 하고 기자 아파트의 건립을 지원하기도 하였다.79) 주동황 외, 앞의 책, pp.188∼189.

전두환 정권의 언론사나 언론인 지원은 방송 광고 대행 수수료를 거두어 방송 광고 공사가 조성한 공익 자금을 이용하여 이루어졌다. 국민의 자산인 주파수 사용료와 준조세의 성격을 띠고 있는 광고 대행 수수료로 조성한 공익 자금은 당연히 공익적 사업에 투자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론사와 언론인을 경제적으로 통제하고 회유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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