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
  • 1. 근대의 형성과 광고의 등장
  • 서재필의 광고 인식과 『독립신문』의 광고
성주현

본격적인 신문 광고는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독립신문』에서 시작되었다. 창간 당시 『독립신문』은 한글판과 영문판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를 함께 편집하여 발행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부터는 영문판과 한글판을 분리하였다. 창간 첫해의 지면 구성을 보면 1면에 광고와 논설을, 2면에 관보와 외국 통신 및 국내의 잡보(雜報)를, 3면에 광고와 잡보를, 4면에 영문을 게재하였다. 창간호는 영문과 국문이 한 신문에 붙어 있었으므로 광고도 영문과 국문이 같이 실렸다. 즉 영문 광고가 네 개, 한글 광고가 아홉 개로 모두 13개가 실렸으며, 이중 내용이 동일한 영문 광고와 한글 광고가 두 개, 유료 광고가 여섯 개였다.

『독립신문』의 창간호에 이처럼 많은 광고가 게재된 것은 앞서 발행된 신문보다는 광고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독립신문』의 발행인 서재필(徐載弼)이 미국 유학 시절 “광고의 수입이 없이는 신문이 오래가지 못 한다.”는 신문 광고의 중요성을 이미 경험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다음과 같은 영문판 사설에 잘 나타나 있다.

광고하기 원하는 분에게 지면이 부족해서 그 중요한 사항을 위해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렇게 재정을 보충하지 않고서는 신문이 오래 갈 수 없다.109) 『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자.

이러한 경영 방침에 따라 창간호 첫 기사를 광고로 시작하고 있다. 그 내용은 『독립신문』의 구독료, 구독 신청 방법, 광고하는 방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중 광고와 관련된 글로는 “신문에 낼만한 말이면 대답할 터이요 내기도 할 터이옴”이라 하여 제28호까지 거의 한 달간 연속하여 게재하고 있다.

확대보기
『독립신문』 창간호 광고
『독립신문』 창간호 광고
팝업창 닫기

창간호에는 외국의 물건을 판다는 주지 회사(Tsuji & Co.)와 가메야 회사(K. Kameya)의 영문과 한글 광고가 함께 실렸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광고이면서도 주지 회사는 “비싸지 아니할 터라”라 하였고, 가메야 회사는 “에누리 없더라”라고 하여 광고에 대한 이미지가 상반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밖에 서적 광고로 영어 월간 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와 헐버트가 세계 지리서를 한문으로 번역한 『사민필지(士民必知)』, 언더우드의 『한영 자전(韓英字典)』과 『한영 문법(韓英文法)』, 술과 담배를 판매하는 안창 회사(On Cheong·An Chang)와 두 개의 영문 광고가 실렸다. 그리고 공익성 광고로 제물포 윤선 출발표·물가·우체 시간표를 각각 게재하였다. 영문과 한글 광고가 함께 실린 것은 내국인뿐만 아니라 서양인까지 광고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동의 고살기(A. Goshalki) 상회와 안창 회사, 가메야 상회는 창간 당시부터 시작하여 오랫동안 『독립신문』에 고정 광고를 낸 광고주였다. 또한 창간호의 안창 회사는 제2호부터 영문으로 광고를 내었으며, 때로는 영문 광고가 한글 광고보다 더 많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관계로 『독립신문』에는 서양인과 일본인 광고주의 다양한 광고가 게재되었다.

『한성주보』에 광고를 실었던 세창 양행은 『독립신문』뿐만 아니라 그 후에 창간되는 여러 민간 신문에도 광고를 실었고,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 광고주가 되었다. 1897년 1월 5일자 『독립신문』에 금계랍(金鷄蠟)의 첫 광고를 한 세창 양행은 1897년 2월 18일자 『독립신문』에 게재한 스마트라산 석유 광고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그림을 사용하였고, 3월 13일자에는 태극기를 도안한 광고를 실었다. 이후 제중원(濟衆院)도 태극 문양을 활용한 일러스트레이션 광고를 실었는데, 미국에서 수입한 학질약 금계랍과 회충산에 태극기를 그려 넣었다. 세창 양행의 금계랍 광고에는 장수의 상징인 학과 거북의 도안을 사용하였다. 금계랍은 아편과 함께 가정상비약이기도 하였다. 금계랍은 여름이면 거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연례행사처럼 한두 번 앓던 학질(瘧疾, 말라리아)에 아주 잘 듣는 약으로 키니네라고도 하였다. 학질에 걸리면 낮에 졸기 때문에 ‘도둑놈 병’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가정이 금계랍을 준비해 두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똥을 약으로 쓰기도 하고, 거목에 새끼줄로 묶어 놓고 도끼로 찍는 시늉을 하는 모습을 하기도 하였다. 이 금계랍 광고는 『독립신문』에 600여 회 이상 실렸는데, 『독립신문』의 고정 광고주였던 고살기 상회 역시 금계랍을 수입하여 판매하였다.

확대보기
태극기 활용 광고
태극기 활용 광고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금계랍 광고
금계랍 광고
팝업창 닫기

『독립신문』의 광고주 가운데 고정 광고주로는 한글과 한문 성경을 보급하던 ‘영국 만국 성 경 회사’, 프랑스에서 수입한 향수를 판매하는 진고개의 일본인 ‘구마모토 회사(熊本會社)’, 미국 목사 원두우(元杜尤, Horace Grant Underwood)가 창간한 『그리스도 신문』, 김종한(金宗漢) 등 경상(京商) 및 관료층이 설립한 근대적 민간 은행인 ‘조선은행(朝鮮銀行)’, 닭 기르는 방법을 국한문으로 번역한 서적 『양계법 촬요(養鷄法撮要)』를 보급하던 훈동 ‘이문사(以文社)’, 평양 석탄과 일본 석탄을 파는 ‘산일 상회(山一商會)’ 등이 있었다.

확대보기
자전거 광고
자전거 광고
팝업창 닫기

『독립신문』에는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당시 광고와 다른, 새로운 광고가 적지 않았다. 1897년 6월 17일자에는 신문에 끼워 넣는 전단 광고로 칼리츠키 회사(F. Kalitzky & Co.)가 수입한 러시아산 식료품(훈제 연어, 소시지 등)과 잡화를 소개하는 영문 광고, 전체 광고면의 3분의 2를 차지한 담배 히어로(Hero) 광고가 실렸다. 이 히어로 담배 광고는 기존 광고와 달리 실물 모양을 그대로 도안한 광고로서 제품에 대한 신뢰성을 좀 더 높여 주었다. 이처럼 실물을 보여 주는 광고로는 개리 양행(開利洋行)의 자전거 광고도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 수입한 자전거와 축음기(유성기) 등을 판매한다는 광고가 실렸는데, 자전거와 축음기는 오늘날의 자가용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부(富)와 신분(身分)의 상징이었다. 유성기 광고는 다음과 같다.

남서 광통교 남변천 첫 골목 첫 집에서 유성기(留聲機) 처소를 새로 설시(設施)하였는데 각색 유명한 노래 곡조와 피리와 저 소리가 구비하니 첨군자(僉君子)는 그곳으로 래임하오셔 구경하기를 바라나이다.110) 『독립신문』 1899년 4월 29일자.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까지 3년 8개월 동안 발행되었는데, 한글판은 폐간 때까지 모두 4,693개의 광고가 실려 호당 평균 7.2개꼴이 게재되었다. 이 가운데 한글 광고는 3,817개였고 영문 광고가 876개였다. 또한 영문판에는 모두 4,832개의 광고가 실려 호당 평균 11개였다. 이는 『독립신문』이 광고 매체로서도 충분히 기능하였음을 보여 준다. 한글판 『독립신문』에서 광고를 많이 한 업종은 세창 양행이나 가메야 회사처럼 외국에서 수입한 상품을 판매하는 잡화상이고, 그 다음으로 『사민필지』 등의 서적 광고, 『그리스도 신문』을 비롯한 민간 신문 광고 순이었다. 그 밖에 향항상해영국은행(香港上海英國銀行) 및 노한은행(露韓銀行) 광고와 조선은행의 창업 광고 같은 은행 관련 광고, 외국인을 위한 임대 주택 광고, 외국의 옷감과 양복 등의 수입 의류 광고, 학생을 모집하는 배재 학당(培材學堂) 광고 등도 게재되었다.

확대보기
축음기
축음기
팝업창 닫기

『독립신문』은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발행하는 신문이었기 때문에 영문 광고와 한글 광고가 같이 실린 1896년의 경우 한글 광고는 보통 영문 광고를 해석한 것이 많았다. 외국 잡화상의 광고는 거의 한글과 영문의 두 가지로 게재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