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2장 광고로 본 근대 풍경
  • 2. 일제 강점기 광고와 식민주의
  • 임시 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광고
성주현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창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광고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국내의 상업적 광고와는 달리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은 예외적이었다. 『독립신문』 광고의 특성은 공적 영역을 우선시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독립신문』에는 어떠한 광고가 실렸을까?

『독립신문』에 실린 첫 광고는 독립사 영업소에서 없는 신문 활자 확보에 노력하겠다는 자체 광고였다. 즉 1919년 8월 21자에 게재한 “금일(今日) 국문 활자(國文活字) 결핍(缺乏)에 대한 고통(苦痛)은 매일(每日) 외유지(外有志)의 동감(同感)하는 바라. 본사(本社)는 소유(所有)의 동모(銅模)를 감히 자사(自私)히 하지 못하고 공공(公共)에 헌(獻)하기 위하여 각호(各號) 연자(鉛字)를 실비(實費)로 제공(提供)하나이다.”라는 독립신문사 영업부의 광고이다. 이는 『독립신문』이 국외에서 발행하였던 관계로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활자를 확보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자체 광고는 사고(社告)로 대체되었다.

『독립신문』에 가장 많이 실린 광고 중의 하나는 사람을 찾는 광고이다. 상해 법계 패륵로(貝勒路) 동익리(同益里) 5호 강영한(姜泳翰)이 정세일(鄭世一) 목사를, 정상빈(鄭尙斌)이 국내 평북 용천군 내중면(內中面) 사직동(社稷洞) 김수명(金守明)을,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옥관빈(玉觀彬)이 직재 선생(直齋先生)을, 임재호(任在鎬)가 이시화(李時和)를, 손두환(孫斗煥)이 백상순(白相淳)을, 옥신도(玉新島)가 이길재(李吉載)와 명이긍(明以恆)의 아들을, 승찬규의 외손 김문세(金文世)가 전룡손(田龍孫)을, 봉천성 임강현 현립 고등학교 김일준(金一俊)이 이일견(李一堅)을, 상해 호강 대학(滬江大學) 유영국(柳榮國)이 유관해(柳觀海)와 유진구(柳震九)를, 어머니가 장춘으로 떠나 소식을 모르는 아들 우용원(禹龍原)을, 아우 이용환(李龍煥)이 형 이득환(李得煥)을, 아버지 백기준(白基俊)이 중국으로 장사를 떠나 소식이 없는 아들 백인서(白仁瑞)를, 빈광국(濱光國)이 김동원(金東元)을, 박태열(朴泰烈)이 최호(崔灝)를 찾는 등 적지 않은 광고가 게재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 운동가의 가족이었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감 내해야 하는 고단한 생활이었지만 부모, 자식, 형제 그리고 친우들이 이산하여 서로를 찾는 아픔은 지금도 가슴을 깊이 저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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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의 광고
『독립신문』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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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독립 운동가의 부고(訃告)를 알리는 광고도 적지 않았다. 양병선(楊炳先), 김용환(金用煥), 김붕준(金朋濬)의 부친, 안태국(安泰國), 충렬사 이동훈(李東勛),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목사 박승호(朴承浩), 대종교 도사교 김헌(金獻), 박정건(朴貞鍵), 김문세(金文世), 국어학자 이규영(李奎榮), 독립단 부단장 최영호(崔永浩), 임시 정부 임시 대통령 박은식(朴殷植) 등의 부고나 추모를 알리는 광고가 게재되었다. 1919년 9월 4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양병선의 부고 광고는 “양병선(楊炳先) 씨는 신병(身病)으로 불행(不幸)하와 거월(去月) 23일 상오 11시에 남경(南京)서 별세(別世)하였기에 자이고정(茲以告訂)하오니, 지구간(知舊間) 조량(照亮) 위요(爲要). 미망인(未亡人) 양절려(楊晢麗). 교민 친목 회장(僑民親睦會長) 고일청(高一淸). 지우대표(知友代表) 김홍서(金弘叙).”라는 내용이었다.

『독립신문』에는 책 광고가 여러 차례 게재되었지만 이 역시 상업적이기보다는 공적 성격이 강한 도서를 소개하였다. 일본 『대륙보(大陸報)』의 기자 출신 나다니엘 페퍼(Nathaniel Peffer)가 쓰고 김여제(金輿劑)가 번역한 『한국 독립 운동(韓國獨立運動)의 진상(眞相)』, 독립신문사 사장 겸 주필 이광수(李光洙)가 『독립신문』에 연재하였던 논설을 모은 『독립신문』 연설집』, 일재(一齋) 김병조(金秉祚)가 지은 『대한 독립 운동사략』, 국내에서 최고의 인기를 모으고 있던 월간 잡지 『개벽』, 한글학자 김두봉(金枓奉)이 지은 『더깁 조선말본』, 김병조가 저술하고 선언사(宣言社)가 발행한 『한국 독립 운 동사』(상), 박은식의 『이순신전』, 상흥업 양행(商興業洋行)에서 발행한 『상해 흥업 지남(上海興業指南)』, 길림 대종교에서 발행한 『신단민사(神檀民史)』 등의 도서와 박은식이 『독립운동지혈사』 속권을 집필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한다는 광고, 그리고 김성득(金成得)과 김태열(金泰烈)이 고인이 된 장덕진(張德辰)과 김여호(金呂浩)의 전기집을 간행하기 위한 추도문과 약력 등의 자료를 모으고자 하는 광고가 실렸다.

이 밖에 인성 학교(仁成學校) 개학식과 기부금 모집, 상해 대한 청년단(上海大韓靑年團)의 회의 개최, 신한 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간행한 잡지 『신한 청년』, 대한 적십자회 총사무소의 회원 모집 및 간호원 양성소 개학식, 미국 하와이에서 발행하는 『신한민보』와 순한글 신문 『한미보』, 중한 국민 호조사(中韓國民互助社) 총사에서 운영하는 제일 학교(第一學校)와 김규식이 교장으로 있는 남화 학원(南華學院)의 학생 모집, 상해 유일 학우 구락부(上海留日學友俱樂部), 중한 국민 호조사 제일 중학교 화어 강습(華語講習), 상해 천도교인들의 의암 손병희 수시(晬詩) 모집, 국동 조병준의 수시 모집 등을 내용으로 하는 광고, 만년필을 찾아가라는 박규명의 광고, 김철(金鐵)이 김준(金濬)으로 이름을 바꾸는 개명 광고 등이 있다.

그렇다고 상업적 성격을 가진 광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서 생산된 명태·명란·밤·해태(김)·산채 등을 취급하는 태평 양행(太平洋行), 인쇄소로서 국내 활자를 구비하고 이를 알리고자 한 삼일 인서관(三一印書館), 중국 특산 수정 안경과 시계를 비롯하여 구두 등 잡화를 판매하는 금문 양행(金文洋行), 양복·구두·시계·안경·학생 용구·일용 잡화를 취급하는 해동 공사(海東公司), 교포의 건강을 위한 세웅 의원(世雄醫院)과 보광 의원(普光醫院) 등의 광고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 광고는 상업적이라기보다는 독립 운동 자금을 마련하거나 교민의 이익을 위한 공익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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