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3장 광고 산업의 변천
  • 4. 광고주의 변화
  • 의약품 광고주, 동수관
이병관

개화기인 한말의 광고는 대부분 외국 기업이 광고주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개항과 함께 밀려들어온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등 열강이 벌이는 시장 쟁탈전의 대상이었다. 당시 조선에 수입된 제품의 85.1%가 주로 직물, 피복, 염료 등 의류품이었다. 수입품 가운데 신문에 가장 많은 광고를 실은 것은 표백제, 염색약, 담배였다.166) 신인섭·서범석,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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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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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약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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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외국 상인 중 대표적인 회사로는 앞서 살펴본 독일 무역 상사인 세창 양행(Edward Meyer & Co.)을 비롯하여 조선산 미곡의 수출상인 러시아계 함릉가 양행(Homely Ringer & Co.), 선박·화약의 수입 판매상인 미국계 사운선 양행(Townsend & Co.), 영국계 무역업체인 이화 양행(Sardine Matheson) 등이 있었다. 또한 이 시기 주요 광고주였던 일본 상인들은 주로 서양 면직물 판매, 전당포, 잡화점, 약재상, 무역상 등이었으며, 『한성주보』에 염색약 제조법에 관한 광고, 양목(洋木)·양사(洋紗)·양단 등의 옷감과 쌀·조 등의 곡물을 판매하는 상점 광고 등을 실었다. 이에 비해 국내의 광고는 상품보다는 사소한 분실·구인·감사·부고·의견 등의 광고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886년 7월 5일자 『한성주보』 제23호와 8월 16일자 제24호에는 동수관(同壽館)이라는 약국의 광고가 실렸다. 동수관의 ‘고백’이라는 광고의 광고주는 단지 북해산인(北海散人)으로만 되어 있어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만일 북해산인이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면 동수관 광고는 우리 광고주가 낸 첫 광고라고 할 수 있다.167) 정진석, 『한국광고 100년』, 광고정보센터(www.adic.co.kr). 한문으로 된 이 광고는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처방을 공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신문을 펴보면 지면의 대부분을 의약품 광고가 도배하다시피 할 정도여서 의약품 광고는 한말 최대의 광고주였다. 이러한 의약품 업종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전파 광고가 발달한 1970년대까지 이어지는 가장 큰 광고주였다. 1900년대에 들어서 우리나라 광고주가 게재하는 제약 광고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는데, 제약 광고가 활발해진 것은 1897년 평양에 동화 약방(同和藥房)을 설립한 민병호(閔竝浩)의 활명수(活命水)를 시작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국내 최초의 등록 상품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바 있는 부채표 활명수는 가장 오래된 브랜드이자 소화제의 대명사로 불리는 제품이다.168) 조상형, 「아무리 젊어지고 달라져도 “활명수는 부채표”」, 『광고정보』 305, 한국방송광고공사, 2006, pp.44∼47.

‘목숨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의 활명수는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한 1897년에 지금 상호(동화 약품)의 전신인 동화 약방에서 나왔다. 활명수는 당시 궁중에서만 복용하고 있던 생약의 비방을 일반 국민에게까지 널리 보급하고자 궁중 비방에 서양 의약의 장점을 살려 개발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약이자 신약이라 할 수 있다. 위장병이 많았던 당시 달여 먹는 한약밖에 몰랐던 사람들에게 소화 불량, 과식, 식체 등에 신통한 효력을 보이고 복용도 간편한 활명수는 큰 인기를 모았다. 1910년 『대한민보(大韓民報)』에 게재한 근하신년 광고를 시작으로 7년 후인 1917년에 활명수, 익장환, 백응고 광고를 게재하였다. 1936년 8월 9일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孫基禎)이 우승하고 남승룡(南昇龍)이 3위에 입상하자 ‘반도 남아의 의기충천 손기정 남승룡 양 선수 우승 축하’라는 제목의 광고를 게재하여 쾌거를 축하하였다. ‘건강한 위장으로 건강한 조선을 건설하자’고 촉구하는 다소 거창한 카피를 통해 활명수가 당시에 이러한 공익적인 메시지를 광고에 담을 만큼 대중적인 브랜드였음을 엿볼 수 있다.169) 조상형, 위의 글, pp.44∼47.

동화 약방 활명수의 큰 성공에 힘입어 1910년대부터 한방에 의한 제조 매약업(賣藥業)이 성업하기 시작하였다. 매약이란 서양 의약과 한방을 혼합한 제약품(製藥品)을 말하는데, 일본 등지에서 각종 서양 의약품이 수입되고 매약의 판매가 활발해지면서 매약 광고의 양은 점차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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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생당 대약방 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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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심보명단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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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내 최대의 의약품 광고주는 이경봉(李庚鳳)의 남대문 제생당 약방(濟生堂藥房)과 이응선(李應善)의 종로 화평당 대약방 본포(和平堂大藥房本鋪)였다. 의약품 판매에서 광고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던 이들은 회사에 광고를 담당하는 전문 광고인을 두기도 하였다. 1899년 인천에서 제생당 약방을 창업한 이경봉은 1907년 서울 남대문으로 본사를 옮긴 후 1909년에 약방 영업부에 광고부를 두고, 광고부 주임을 임명하였다. 1904년 화평당을 설립한 이응선은 영업비의 태반을 광고비로 활용하였으며, 『추월색(秋月色)』을 쓴 신소설 작가인 최찬식(崔瓚植)을 중역 선전 부장에 임명하여 광고 도안을 맡기기도 하였다.170) 김문성, 『한국광고 100년』, 광고정보센터(www.ad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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