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3장 광고 산업의 변천
  • 4. 광고주의 변화
  • 미군정과 1950년대 광고주
이병관

광복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6·25 전쟁은 남한에서 광고 산업의 발전을 크게 저애하였다. 전국적인 경제적 불황으로 언론사의 광고 수입은 최악의 수준이었다. 기업에서는 판매할 상품이 없었고, 광고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도 매우 낮았다. 하지만 1950년대부터 기업 광고가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53년에는 대한 모방, 한국 모방, 동양 정밀, 대한 제분, 동산 유지, 1955년에는 한국 타이어, 태창 방직, 한국 유리, 시발 자동차가 주요 광고주로 등장하였다. 1950년대 이후는 침체기였던 제약 광고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896년에 최초의 의약품 광고가 시작되었지만 근대적 의미의 광고는 1953년 6·25 전쟁이 끝난 후 수입 의약품의 판매 광고를 시작으로 점차 국산 의약품 광고로 전환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59년 4월 15일 민간 상업 방송인 부산 문화 방송국이 개국하면서부터 제약 업계는 신문뿐만 아니라 라디오에도 대거 광고를 실시하여 의약품 광고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였고, 본격적으로 의약품 광고 전성시대가 열렸다. 국내 제약 산업의 발달과 전파 매체의 등장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한 의약품 광고는 196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전체 광고비의 70%를 상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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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약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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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5월 12일 우리나라의 첫 텔레비전 민간 상업 방송인 HLKG-TV 방송국이 개국하면서 텔레비전 광고가 처음 등장하였다. 국내 최초의 텔레비전 광고는 영창 산업의 ‘깨지지 않는 유니버설 레코드’ 광고였다. 당시 텔레비전 광고의 광고주로는 천도 제약, 오레올 시계, 수도 피아노, 제일 모직, 동양 전화사, 기쁜 소리사, 하이파이사, 정금사, 미전사, 삼일 금방, 유니버설 레코드, 금성 카라멜, 유한 산업, 제일 생명 등의 광고주와 OB 맥주, 경전(현재의 한국 전력), 크라운 맥주, 내무부 등의 프로그램 광고주가 있었다. 그 밖에도 한국의 국제 항공 노선을 독점하고 있던 노스웨스트도 광고를 하였는데, 광고 소재는 미국에서 제작한 슬라이드와 광고 선전용 노래 (CM song)였다. 이 광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제작 텔레비전 광고물이자 시엠송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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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치약 광고
1960년대 치약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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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에는 락희 화학 공업사(樂喜化學工業社, 현재 LG 화학)가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치약 브랜드인 럭키 치약을 광고하기 시작하였다. 럭키 치약의 광고는 ‘미제와 꼭 같은(미국 원료와 처방으로 제조된)’이라는 헤드라인을 쓰고 있는데, 그 당시 ‘미제와 같은’이라는 표현은 곧 고급품이라는 의미로 심심찮게 사용되었다.182) 마정미, 『광고로 읽는 한국사회문화사』, 개마고원, 2004. 1956년 개국한 HLKZ-TV 전파를 타고 방송된 럭키 치약 광고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시초로 기록된다.

재미있는 것은 럭키 치약의 광고가 당시 우리나라 사람의 구강(口腔) 건강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는 점이다. 1960년 10월 13일에 개제된 ‘오랜 역사 새로운 품질’이란 제목의 광고와 1961년 7월 9일 ‘흰 이빨은?’이라는 제목의 광고, 그리고 1967년 1월 1일 ‘상쾌한 아침의 3분간, 즐거운 저녁의 3분간……’이라는 내용을 담은 광고에서 볼 수 있듯이 럭키 치약의 광고는 양치질하는 방법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등 캠페인성 광고였다. 1954년 출시된 튜브형 럭키 치약은 출시 3년 만에 외제품인 콜게이트 치약을 물리쳤고, 럭키 치약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손가락에 소금을 묻혀 이를 닦던 우리나라의 양치 문화를 바꾸어 놓았다.183) 마정미, 앞의 책.

이후 락희 화학은 우리나라에서 소비재를 생산하는 대표적 회사로 비누, 샴푸, 세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는데, 1966년에는 합성 세제인 하이타이를 개발하였다. 락희 화학 공업사는 1974년 설립 30주년을 맞이해 기업 브랜드를 주식회사 럭키로 변경하고 심벌마크도 새로 제정하여 발표하였다.

당시 불모지대나 다름없었던 국내 가전 산업은 1958년 LG 전자의 전신인 금성사(金星社)의 창업으로 시작되었다. 그 무렵은 6·25 전쟁 당시 미군 이 가져온 제니스 라디오나 배편으로 몰래 들여온 일제 산요 라디오를 일부 부유층의 안방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물건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금성은 1959년 6월 우리나라 최초로 국산 라디오를 생산하고 1959년 8월에 시제품을 완성한 다음 1959년 11월 15일 처음으로 출시하였다. 직사각형 상자에 굵은 글씨로 주파수 번호가 새겨져 있는 이 제품은 100V 전압을 기준으로 만들었으나 당시 국내의 전기 사정에 좋지 않았기 때문에 50V 전압으로도 들을 수 있게 설계되었다. 첫 출시품인 ‘A-501’의 당시 광고에는 ‘축(祝) 출현(出現) 금성 라듸오’, ‘세계의 수준을 달리는 한국의 기술’이라는 카피와 함께 제품에 손을 얹고 있는 여성의 일러스트를 담았다.184) 마정미,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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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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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의 철수에 따라 한때 퇴보하였던 화장품 산업은 광복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미군정의 화장품 산업 자유화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 수많은 화장품 제조업체가 생겼는데,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무려 99개 업소로 폭증하였다. 이렇게 많은 화장품 제조업체의 난립에도 불구하고 화장품 업계는 물건이 없어 못 팔 만큼 호황을 누렸다.

광복 후 1946년 3월에 동보 화장품의 신문 광고를 시작으로 화장품 광고가 등장한다. 주로 바니싱 크림, 콜드크림, 포마드, 백분, 치약 따위의 광고였다. 1950년에는 태양 리화학 공업소의 피카몬드 향수의 광고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화장품 업계의 호황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는 화장품 광고 가 그리 많지 않았다. 1958∼1959년의 화장품 광고는 전체 신문 광고 중 0.8∼1.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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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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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태평양 화장품 회사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1948년에 서성환이 서울 회현동의 작은 집에 포마드를 포함한 화장품 공장을 세웠고 상호는 1930년대부터 써온 태평양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ABC라는 이름의 포마드는 공전의 히트를 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부산으로 옮긴 후에도 ABC 포마드의 인기는 계속되었고, 종전 후 서울로 다시 돌아온 태평양 화학 공업사는 1954년 ABC 포마드는 물론 크림, 바니싱 크림, 물분, 머릿기름 등 다양한 화장품을 생산하였다. 1955년 9월에 태평양은 첫 신문 광고를 하였고, 광고 제품은 새로 개발한 ‘ABC 비듬약’이었다. 1956년에는 화장품 업계 최초로 모델의 실제 사진을 게재한 광고를 선보였는데, 주인공은 당시 인기 배우였던 김보애였다.185) 신인섭,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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