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3장 광고 산업의 변천
  • 4. 광고주의 변화
  • 1960년대 광고주
이병관

1960년대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의 개발 정책에 따른 경제 발전은 광고 시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66년 약 30억 원이던 광고 시장은 1969년에 70억 원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는 광고주의 양상도 많은 변화가 나타나는데, 정부의 소비 장려 정책에 따라 식음료, 생활용품 등의 소비가 늘어났고 더불어 의약품, 제과, 화학 회사 등의 광고비도 증가하였다. 1960년대 말 매체별 업종 광고비 구성을 보면 이러한 경향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텔레비전 광고는 의약품(23.9%), 음료·기호품(15.5%), 의복·일용품(13.2%), 식품(12.2%), 화장품·치약·비누·세제(6.6%)의 순위로, 라디오 광고는 의약품(32.6%), 식품(14.7%), 의복·일용품(11.3%), 화장품·치약·비누·세제(11.1%), 음료·기호품(8.8%)의 순위로 나타났다.186) 김민환·김광수, 「한국 방송광고의 역사와 문화」, 『방송광고 연구총서』, 한국방송광고공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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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의약품 광고
1960년대 의약품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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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광고 산업을 주도한 의약품 광고가 1960년대에서도 여전히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1969년도의 10대 광고주 중 동아 제약, 한일 약품, 한독 약품, 유한 양행, 종근당, 영진 약품, 일동 제약, 한국 화이자 등 여덟 개 광고주가 모두 의약품 관련 업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 업계의 경쟁적 광고로 폐해가 생기자 자율적 규제를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 규제의 내용에는 과대광고 문제는 약공 협회의 광고 윤리 위원회에서 처리할 것과 일간지에서의 의약품 광고 제한, 경품부 판매 금지 등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결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었고 광고 경쟁은 한층 치열해져 몇몇 기업이 부도를 내거나 경영 위기를 맞게 되자 제약 업계는 1964년 1월 1일부터 4대 매체를 통한 광고 활동을 한때 중단하였으며, 1965년 보건 사회부는 의약품 과대광고에 대한 단속 기준을 마련하고 법적 규제를 가하기 시작하였다.187) 김문성, 앞의 글.

이들 제약 회사 광고 책임자들은 1963년 가칭 ‘의약품 광고주 협회’를 설립키로 하였지만 광고주 협회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매체들의 와해 공작으로 끝내 설립을 보지 못하였고, 3년 뒤인 1966년 제약 협회 내에 ‘의약품 PR 구락부’라는 광고 협의회 기구를 발족시켰다. 발기인 총회에는 37개 제약 회사 중에서 19개사가 참석하였는데, 당시 한국 광고의 중심은 제약 회사였으므로 이 19개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광고주라고 할 수 있었다.

이 PR 구락부의 업무는 주로 광고 거래에 관한 것, 즉 신문 광고 단가의 조정에 있었다. 신문 광고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의약품의 광고 단가는 이 PR 구락부의 조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 1971년 2월 19일에 열린 제4회 정기 총회 안건 중에 사업 계획으로 제시된 것을 보면 광고주 협회 창립, ABC 협회 추진, 실무자의 질 향상책, 광고에 대한 주무 당국과의 협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8년과 1970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PR 구락부 회원사가 주동이 되어 신문·잡지 구독 실태 조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PR 구락부는 제약 광고의 비중 감소, 단가 인상을 둘러싼 신문 매체와의 대립 등을 이유로 1977년 2월에 대한 약품 공업 협회의 홍보 섭외 분과 위원회로 그 기능이 이관되었다.188) 신인섭·서범석,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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