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4장 소비 대중 문화의 형성과 광고
  • 1. 근대 소비 문화의 형성 배경
  • 백화점의 탄생과 성장
조성운

일본이 대중 소비 사회로 진입한 시기는 대략 1904년 러일 전쟁 직후부터 1940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백화점의 판매 방식에 변화가 일어났다. 즉 기존의 앉아 파는 방식에서 쇼윈도와 휴게실을 갖춘 진열 판매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대략 1910년대 초반이면 마무리되었다. 여기에 백화점 내에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식당, 옥상 정원 등이 설치되면서 백화점은 ‘공중(公衆)의 쉼터’로 변모하였다. 이제 백화점은 소수의 상류층만을 대상으로 하던 판매 전략을 폐기하고 그 대상을 중산층 이상으로 설정하였다. 이는 소수의 상류층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 매출 신장이 어렵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소비층을 창출해야 한다는 전망에 근거하였으며,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이를 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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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코시 백화점
미쓰코시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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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코시 백화점이 이렇게 변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백화점에서 상품을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새로운 중산층이 창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미쓰코시 백화점은 도쿄(東京)의 변두리인 야마노테(山の手)에 거주하는 새로운 중산층을 창출해야 할 고객으로 설정하였다. 야마노테는 에도(江戶)시대에는 무사 계급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래 무사 계급이 쇠퇴하면서 많이 생긴 빈집들을 대개 지방에서 성장하여 도쿄로 상경한 관리·군인·학자·은행원·회사원 등 경제적으로 안정된 봉급생활자들이 채우면서 붙은 이름이다. 이들은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 사회의 중·상층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전통시대와는 다른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즉 거주지와 직장이 같은 곳에 있던 전통시대와는 달리 거주지에서는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전차를 타고 도심에 있는 직장으로 출퇴근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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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야 백화점
조지야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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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새로운 소비층이 형성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 교통수단의 발달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보편화된 터미널을 낀 백화점이나 쇼핑몰은 일본에서 기원하였다. 즉 1929년 4월 15일에 오사카(大阪)의 우메다역(梅田驛)에서 개업한 한큐(阪急) 백화점이 그 시초인 것이다. 한큐 백화점은 포목이나 고급품은 취급하지 않고 일반 잡화, 식료품, 가구, 작은 세간 도구 등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일용품을 중심으로 상품을 구성하였다. 이는 전철을 이용하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새로운 소비자로 창출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큐 백화점의 개업은 중상층보다 생활수준이 조금 못한 사람들까지 백화점의 새로운 소비층으로 확대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19세기에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소비층의 변화와 확대 현상이 20세기 초반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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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야 백화점의 광고지
조지야 백화점의 광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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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일본에서 발달한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상점의 탄생은 곧 조선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조선에 대한 일본인과 일본 백화점의 진출로 나타났다. 한말에 이르러 경제 진출의 주도권을 잡았던 미쯔이 재벌(三井財閥)은 그 직영 백화점인 미쓰코시의 지점을 1906년 서울(현재 충무로 1가 사보이 호텔 건너편)에 설립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는 현재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현대식 건물을 착공하여 1934년 10월에 이전함으로써 미쓰코시 백화점은 현대식 대형 백화점으로 발전하여 조선에 진출한 일본 백화점의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일본인 상가인 충무로에서 고바야시 양복점(小林洋服店)을 경영하여 오던 고바야시 문중(門中)은 1921년 4월에 현대식 백화점인 조지야 백화점(丁子屋百貨店)을 설립하였는데, 이 백화점은 1937년에 100만 원이던 자본금이 2년 만인 1939년 250만 원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1939년 9월에는 현재의 남대문로 2가에 현대식 대형 점포를 신축하였는데, 그 위치가 바로 현재 명동 롯데 영플라자 자리이다.

1922년에는 오복점(吳服店)을 경영하여 오던 나카에 가츠지로(中江勝治 郞)가 현재의 충무로 1가에 미나카이 백화점(三中井百貨店)을 설립하여 1932년에는 현대식 대형 점포를 신축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미나카이 백화점의 자본금은 300만 원으로 조지야 백화점보다 경영 규모가 컸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미나카이 백화점은 연쇄점의 운영 방식을 백화점의 경영에 도입하여 부산·대구·평양·원산·목포·함흥·군산·대전·진주·흥남·광주·청진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 지점을 설립하여 백화점의 전국화를 이끌었다.

또한 1926년에는 자본금이 20만 원에 불과한 히로다 백화점(平田百貨店)이 충무로 1가에 설립되었다. 이로써 충무로 1가를 중심으로 미쓰코시 백화점, 조지야 백화점, 미나카이 백화점, 히로다 백화점 등이 들어서 이 지역은 백화점 거리로 변신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조선인의 백화점 경영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일본 자본의 침투에 대한 조선 자본의 대응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자본금이 10만 원에 불과하였고 도자기와 철물 종류를 취급하던 잡화점의 수준이었지만 1916년 종로 상인 김윤배(金潤培)가 종로 2가에 김윤 백화점(金潤百貨店)을 설립하였다. 또한 1918년 유재선(劉在善)이 종로 2가에 설립한 계림 상회(鷄林商會), 1920년 이돈의(李敦儀)가 종로 2가에 설립한 고려 양행(高麗洋行) 등은 김윤 백화점과 함께 조선인이 백화점의 경영 방식을 모방하고 지향하였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사례이다.

그런데 김윤 백화점은 이름만 백화점이었지 규모나 경영 방식에서 근대적 의미의 백화점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1916년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백화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인이 근대적 상점의 필요성에 공감하였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계림 상회는 자본금은 5만 원에 지나지 않았지만 혼구품 관복(婚具品官服)·원삼(圓衫)·주단(綢緞)·포목(布木)·금은 세공(金銀細工)·양산(洋傘)·교자(轎子)·문장(蚊帳)·모물(毛物)·축음기(蓄音器) 등 취급하는 품목만 놓고 볼 때 백화점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이처럼 종로 2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비록 영세한 규모라 하더라도 백화점 거리로 변모해 간 사실은 기존에 포목류(布木類)만 취급하던 종로 상인이 경영 방식을 점차 근대화해 가는 현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특히 최남(崔楠)은 덕원 상점(德原商店)을 운영하면서 종로 2가에 양품 잡화·금은 세공품·시계·안경·부인 수예품 등을 취급하는 동아 부인 상회(東亞婦人商會)라는 여성 전용 백화점을 1919년에 설립하였다. 이렇게 여성 전용 백화점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이 소비 주체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는 측면에서 우리나라 상업사상 특기할 사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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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부인 상회 사장
동아 부인 상회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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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백화점은 오늘날의 바겐세일과 경품 행사 등을 통해 소비를 촉진시키는 영업 방식을 도입하여 백화점의 문턱을 낮추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바겐세일과 경품 행사는 이처럼 규모가 큰 백화점에서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에는 지방 중소 도시의 상점이나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공생 조합(共生組合)에서도 염매(廉賣)라는 이름으로 바겐세일과 경품 행사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바겐세일과 경품 행사는 조선 상인의 자금 압박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막강한 자금력을 자랑하던 천도교의 공생 조합에도 파산하는 조합이 생겨났다.

한편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백화점은 종로 3가에까지 진출하였다. 1937년 11월에는 한상억(韓相億)이 종로 3가에 자본금 5만 원의 동양 백화 주식회사(東洋百貨株式會社)를 설립하였다. 동양 백화점은 만주 무역·중소 업자 금융·도서 출판 등 다양한 영업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와 같이 백화점이 진고개(충무로)를 중심으로 발달하자 진고개는 서울의 명물 거리로 자리 잡았다. 하여 시골 사람이 서울에 가게 되면 백화점 구경하기는 빼놓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것은 당시 백화점이 조선 사회에서는 구경하기 힘들 정도의 별천지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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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코시 백화점 매장
미쓰코시 백화점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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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층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삼중정(三中井)의 대상점, 조선 사람의 손님을 끌어들이기로는 제일인 대백화점인 평전(平田) 상점, 대자본을 가지고 조선 전도 상계를 풍비하려는 삼월 왕국(三越王國)의 작은 집인 삼월 오복점을 비롯하여 좌우로 총총히 들어선 일본인의 상점, 들어서 보면 휘황찬란하고 으리으리하며 풍성풍성한 품이 실로 조선 사람들이 몇 백 년을 두고 만들어 놓았다는 북촌 일대에 비하여 얼마나 장한지 견주어 말할 바가 못 된다. …… 아! 이 무서운 진고개의 유혹!! 조선의 살림은 이 진고개 유혹의 희생(犧牲)이 되고야 말 것인가?220) 정수일, 「진고개」, 『별건곤』 23, 1929년 9월, pp.46∼47.

이처럼 백화점은 조선 사람들에게는 ‘휘황찬란하고 으리으리하며 풍성풍성’한 곳이었다. 또한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백화점 내에 진열된 상품은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과학적’이고 ‘근대적’인 물건이었다.

정자옥(丁子屋)에 들어가 봅시다.

양복 사 입게?

양복 사 입는 사람 구경 좀 하게.

생전 처음 이렇게 굉장한 인물들만 출입하는 집에 들어와 놓아서 어릿어릿 하니까…… 화장품 어여쁜 병을 집어 들고 ‘이게 머리에 바르는 약인가 얼굴에 바르는 것인가’ 모양만 양복을 하였지 영자(英字)를 모르니 볼 수는 없고 일본말이 서투르니 물어보기도 힘들고 공연히 코 밑에 가져다 향내만 맡느라고 쫑긋쫑긋하는 것도 훌륭한 광무곡이다.221) 双S生, 「대경성 광무곡(大京城狂舞曲)」, 『별건곤』 18, 1929년 1월, pp.82∼83.

이처럼 1934년 미쓰코시 백화점이 혼마치에 자리 잡은 뒤로 미나카이 백화점, 히로다 백화점이 들어섰고 이웃한 남대문로에는 조지야 백화점이 설립되어 혼마치 일대는 일본계 백화점을 중심으로 상권이 이루어졌다. 이들 백화점은 당시 서울의 최대 번화가인 혼마치를 중심으로 상점가 전반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그 배경에는 물론 1926년 경성부 청사의 이전과 1930년대 ‘조선 공업화 정책’ 실시에 따른 산업 구조의 변화와 도시 중산층의 성장이 있었다. 이리하여 서울의 상권은 종로를 중심으로 한 구래(舊來)의 조선인 상권과 혼마치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상권으로 나뉘었다.

이처럼 1920년대 후반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다섯 개의 백화점이 경쟁하였다. 그리고 이들 백화점은 점차 영업망을 지방으로 확대하였다. 미나카이 백화점은 대구(1905), 진주(1906), 서울(1911), 원산(1914), 부산(1917), 평양(1919), 목포(1924), 흥남(1928), 함흥(1928), 군산(1929), 광주(1932), 대전(1932) 등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영업망의 확충은 필연적으로 고객층의 확대도 수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목표 고객층을 중산 계급 이상의 고객에서 중산 계급 일반의 고객으로 변경하였으며, 상품 구성도 고급품, 선가품(選價品)에서 대중용의 필수품, 일용품으로까지 확장하였다. 특히 식료품을 판매하는 마켓을 설치하여 일반인 의 큰 호응을 받았다. 그 결과 백화점의 총매출액은 1935년 1,200여만 원, 1937년 1,470여만 원, 1938년 1,590여만 원, 1939년 1,900여만 원으로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처럼 백화점의 매출이 신장한 이면에는 다음의 글에서 보이듯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중소 상인의 눈물이 있었다.

한 장소에서 소요의 여러 가지 물건을 살 수 있는 것, 상품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 종일을 두고 보고만 나와도 꾸지람하는 이가 없는 것, 휴게, 음식, 용변 그 밖에 조금의 불편도 없을 만한 설비 등등에 있어서 중소 상업은 도저히 백화점의 적이 못 되는 데다가 백화점은 대자본 경영인 까닭에 대량 매입과 박리다매가 가능하다. 고로 백화점의 진출과 그 수의 증가는 중소 상인에게는 치명타가 되는 것이다.222) 「피폐한 중소 상공 원인과 그 대책」, 『신동아』 1932년 10월.

한편 미나카이 백화점이 전국 각지에 지점을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은 대공황 이후 금본위 정책의 포기와 확대 재정 정책을 기조로 한 이른바 ‘다카하시(高橋) 재정’ 정책에 기인한바 크다고 할 수 있다.223) 위의 글. 이는 곧 백화점의 대중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백화점이 대중화함에 따라 소매점은 점차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인 주요 상공업자로 조직된 경성 상공 협회(京城商工協會)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인 중소 상인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한편, 자구책을 강구하는 등 반백화점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총독부는 1933년 1월 ‘조선 상품권 취체령’과 ‘동 시행 규칙’을 제정하여 백화점이 3만 원권 미만의 상품권을 발행하지 못하도록 하고 총발행액도 제한하였다. 이는 당시 한창 발흥하던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과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 등 항일 운동에 조선인 노동자와 농민층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는 상황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할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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