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1장 미술의 탄생
  • 2. 근대적 미술 개념의 형성
  • 근대적 미술 교육과 미술 단체의 성립
윤세진

박람회, 박물관, 전람회가 근대적 미술 인식을 가능케 한 가시적 장치였다면, 이를 내면화한 또 다른 장치는 교육 제도였다. 물론 근대 초기에는 교육의 기회가 소수에게만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육이 미술을 대중적으로 인식시키는 데 결정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미술 교육을 통해 근대 미술이 제도화·규율화되는 측면, 그리고 전통과 단절된 새로운 시각 방식이 출현하는 지점을 고찰해 볼 수 있다.

근대적 미술 교육이 시작된 것은 근대적 교육령(敎育令)이 공포된 1895년(고종 32)이다. 물론 이전에도 직업적인 화원들 사이에서 계승되던 교육 방식이 있었지만, 주로 가계(家系)나 사승(師承) 관계를 통해 개별적으로 전수되거나, 도화서(圖畵署)의 생도(生徒)로서 일정한 훈련 과정을 거치는 식이었다. 미술은 모든 이들이 함양해야 할 보편적 소양이 아니라 국지적(局地的)이고 특수한 기예였던 것이다. 하지만 보통 교육의 도입과 함께 미술은 일반인의 교양 과목이 되었고, 교육 내용도 표준화되었다.

보통 교육령이 반포된 후 1900년대에 지식인들이 주창한 교육론은 ‘지·덕·체(智德體)’라는 세 범주 체계로 구성되었고, 미술에 속하는 ‘도화(圖畵)’와 ‘수공(手工)’ 과목은 이 중에서 ‘지’의 범주에 속해 있었다. 미술, 음악 등의 예술 과목을 정서와 감각의 함양 차원에서 가르치는 현재와 비교해 볼 때, 미술이 ‘지’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 가 자못 크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지식 담론을 관통한 키워드는 ‘실용주의’였다.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은 “생존 경쟁(生存競爭)에 적응할 성질을 구비”하도록 하는 것이었고,24)박성흠, 「보통 교육은 국민의 요무」, 『서우』 9, 서우학회, 1907, 5∼6쪽. 미술 역시 이런 교육 목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때문에 미술은 우선적으로 ‘지’, 즉 새로운 앎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도화는 물체를 정확히 식별함에 필요하고, 특히 미술 기예 공업 발전상에 결(缺)치 못할 것이라. 연즉(然則) 도화가 교육상에 미적 요소를 양성함에 중요한 것은 많은 말이 불필요할 것이어니와 사회 도덕상 경제상에 큰 가치가 있을 것 또한 명료하도다.”25)장응진, 「교수(敎授)와 교과(敎科)에 대하야」, 『태극학보(太極學報)』 15, 태극 학회, 1907, 15쪽.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미술 교육의 핵심 교과인 도화 과목은 ‘천기(賤技)’나 ‘말예(末藝)’라는 부정적 가치 대신 사회, 도덕,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신지식(新知識)의 하나로 강조되었다. 도화 과목의 목적은 “안(眼)과 수(手)를 연습하여 통상의 형체를 간취하고 정(正)하게 화(畵)하는 능(能)을 양(養)하고 겸하여 의장을 연(練)하고 형체의 미(美)를 변지(辨知)케 함”이었다. 말하자면, 사물을 정확히 묘사하는 손 기술의 훈련을 강조하는 실용 교육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또 1906년에 공포된 보통 교육령에서는 ‘수공’ 과목이 새로 생겼는데, “간이(簡易)한 물품을 제작하는 능력을 득(得)케 하여 사량(思量)을 정확히 하고 근로를 호(好)하는 습관을 양(養)함으로 요지를 함이라.”라는 교수 요지로 보아26)박휘락, 『한국 미술 교육사』, 예경, 1998, 28쪽. 이 역시 현재의 미술 교육보다는 기술 교육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제2차 조선 교육령기인 1920년대에 들어서면 ‘심미의 감정을 길러 준다’는 기능이 강조되면서 기술 교육에서 탈피하여 본격적인 미술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미술 교육에 교과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07년(융희 1)부터이다. 『도화임본(圖畵臨本)』은 1921년에 『보통학교 도화첩(普通學校圖畵帖)』이 발행되기 전까지 사용한 근대 최초의 미술 교과서이다. 내용과 구성은 1904년에 발행된 일본의 국정 교과서 『심상 소학 모필화 수본(尋常小學毛筆畵手 本)』과 거의 유사하다. 전체 4권으로 구성된 『도화임본』은 모필선으로 기물(器物), 화조(花鳥), 과일, 동물 등 사물의 형태를 간략하게 그려 놓아 학생들이 모사(模寫)할 수 있게끔 하였다. 『도화임본』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15년에 발행된 『연필화임본(鉛筆畵臨本)』의 저자가 이도영(李道榮, 1884∼1933)이라는 점, 이도영이 『대한민보(大韓民報)』에 모필로 삽화를 그렸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도화임본』을 편찬한 것도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27)이구열, 『근대 한국 미술의 전개』, 열화당, 1979, 70∼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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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임본』의 교본 그림
『도화임본』의 교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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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임본』의 교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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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임본』은 모필을 사용하였다는 점, 그리고 임본(臨本)이라는 점에서 화보(畵譜)를 모사하던 전통 서화가들의 교육 방식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바가 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서화가들은 『점석재총화(點石齋叢畵)』,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의 전통 화보를 회화 교재로 널리 사용하였다. 하지만 근대 교육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명인(名人)들의 화법 습득을 목표로 삼던 전통적인 화보 임모(臨摸)와 달리 정확하고 표준적인 사물의 모사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물론 사물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묘사는 어느 시대나 화가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능력이었다. 때문에 전통 회화는 비사 실적이고 근대 회화는 사실적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전통과 근대를 구분하는 것은 오류이다. 다만, 그 ‘사실성’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사실성’의 훈련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단일한 매체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규범화된 시각을 교육한다는 점에서 근대 교육은 이전과 질적으로 차원이 달랐다. 그 단적인 예가 인체의 각 부위에 대한 묘사 훈련이다. 『도화임본』에 실린 얼굴 묘사법은 인체의 해부학적 비례를 강조하는 서양의 드로잉(drawing) 교육을 모필에 맞게 단순화한 것으로, 이는 대상에 대한 표준적이고 척도화(尺度化)된 묘사 방식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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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임본』의 인물 묘사
『도화임본』의 인물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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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자원화보』의 인물 묘사
『개자원화보』의 인물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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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 묘사에 대한 강조는 사생(寫生) 교육에서 좀 더 두드러진다. 제1차 조선 교육령이 시행되는 동안에는 사생 교육이라 할지라도 임화식의 사생화에 가까웠다.28)사생화 교육에 대해서는 박휘락, 앞의 책, 2부 2장 ‘사생활 교육의 변천 과정’을 참조. 말하자면 먼저 임본을 충분히 훈련한 뒤에 실물을 사생하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생화 교육은 실제 사물에 대한 정확한 재현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시각 방식을 내면화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사생화의 교순(敎順)은 임화와 약동(略同)하고 단 임화와 부동(不同)한 것은 체적(體積)이 있는 것을 평면상에 표현하려는 것인 고로 임화에 비하여 심히 곤란하니라. …… 동일한 물체라도 그 위치를 인하여 각종 형상으로 변하는 것이니 극히 흡호(恰好)히 보는 위치를 정하고 일차 정한 이상은 학도의 시점을 변치 아니하도록 주의할지니라.29)학부 편찬(學部編纂), 『보통 교육학(普通敎育學)』, 한국 정부 인쇄국(韓國政府印刷局), 1910, 120∼121쪽(박휘락, 앞의 책, 105쪽 재인용).

‘체적이 있는 것을 평면상에 표현’한다는 구절이나 ‘일정한 시점’을 강조하는 데서 서양적 투시도법(透視圖法)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교수법을 통해 재현 방식이 표준화·규범화되었으며, 미술은 세계를 시각적으로 절단하는 새로운 재현의 기술로 인식될 수 있었다. 또한 이런 사생 교육의 일환으로 학교마다 사생 대회(寫生大會)가 열렸으며, 여기서 입상한 학생들의 작품이 신문 지상에 실리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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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실물 사생화
학생의 실물 사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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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실물 사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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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탄생한 미술 개념이 한편으로는 가시성의 장치를 통해, 또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교육 장치를 통해 새로운 기반을 형성해 감에 따라 미술가의 위상도 새롭게 전환되었다. ‘화공(畵工)’, ‘도공(陶工)’ 등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에서 손 기술은 지적 행위와 무관한 천기(賤技)로 폄하되었다. 하지만 미술 개념이 문명이나 새로운 지식과 접속하면서 자리를 잡아 감에 따라 미술가들도 스스로의 활동을 사회적 차원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미술가의 자의식은 전통적인 작업 방식을 고수하던 서화가(書畵家) 집단을 중심으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 생겨난 단체가 1911년에 창립된 경성 서화 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과 이를 계승하여 1912년에 창립된 서화 미술원, 1915년에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창립한 서화 연구원(書畵硏究院), 1918년에 창립된 서화 협회(書畵協會) 등이다. 친일 귀족들의 후원하에 설립된 경성 서화 미술원은 의식적인 미술가 그룹이라기보다는 동호회적 성격이 강했던 데 비해, 서화 미술회, 서화 연구원, 서화 협회는 공히 근대적인 전통 회화 교육 단체로서 기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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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
김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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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는 문명을 대표하는 것이요, 문명은 국가의 진보(珍寶)이다. 그러므로 서화의 진보가 곧 국가의 진보이다. 이것은 일개인(一個人)의 미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요, 또한 세계가 모두 지보(至寶)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말로써는 다 나타낼 수 없는 것은 글씨로 이를 나타내며, 글씨로써 다 나타낼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글씨는 물체를 묘사하는 용한 기술이며, 그림이란 정신을 전달하는 살아 있는 방법이다. …… 본 연구회의 설치는 실로 사자(士子)의 급무이며 문명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30)김규진(金圭鎭), 「서화 연구회 취지서(書畵硏究會趣旨書)」 : 이구열, 「서화 미술회」, 『한국 근대 미술 산고』, 을유 문화사, 1972, 59∼60쪽의 번역문 재인용.

이 글은 김규진의 ‘서화 연구회 취지서’ 일부인데,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전통적인 서화를 문명 및 국가와 연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조선 미술의 침쇠(沈衰)함을 개탄하야 전 조선의 서화가를 망라하고 신구 서화의 발전과 동서 미술의 연구와 향학 후진(向學後進)의 교육, 공중의 고취아상(高趣雅想)을 증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서화 협회 역시 ‘미술가’로서의 임무를 새롭게 의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31)『서화 협회보(書畵協會報)』 제1권 제1호, 신문관(新文館), 1921, 18∼21쪽. 전통적인 서화가 근대 문명 의 산물인 미술의 일환으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단체 명칭에 여전히 ‘서화’라는 단어를 고집하고 있으며, 교수 방법 역시 화보를 모사하거나 글씨체를 임서(臨書)하는 전통적인 도제식(徒弟式) 교육 방식을 고수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서화 협회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 동경 미술 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온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그때만 해도 외국에는 이미 미술 단체나 ‘클럽’ 같은 것이 있었지만 우리나라엔 없었다. 그래서 미약하나마 미술 단체를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며 발론(發論)을 해보았으나 상응해 주는 이들이 없었다. 그러던 중 화가 조소림(趙小琳, 조석진), 안심전(安心田, 안중식) 두 선생님들과 서예가 정우향(丁又香, 정대유), 오위창(吳葦滄, 오세창) 두 선생님들의 찬성을 얻어 그 밖에 몇 분의 서예가들을 합하여 십여 인이 발기하여 처음으로 만든 ‘서화 협회’였던 것이다. 이 회를 발기하고 명칭과 규약을 제정할 때엔 중론(衆論)이 많았다. 즉 많은 사람들이 유채(油彩)는 고약한 그림이고 나체화는 그림이 아니라고 말하는 선배 어른들이 많아서 결국 이상과 같은 서화(書畵)라는 간판을 붙이게 되었는데, 나는 처음부터 미술이라는 말을 꼭 넣고 싶어서 주장도 해보았지만 어른들에게 따라갈 도리밖에 없었다.32)고희동, 「나와 서화 협회 시대」, 『신천지』 60호, 서울신문사, 1954.2, 182쪽.

고희동의 회고로 미루어 보건대, 전통적인 교육을 받은 서화가들 입장에서는 미술의 새로운 임무를 자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서양 미술에 대한 심적인 거부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서화라는 용어를 고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였다. 또 “본국에 돌아와 스케치 박스를 메고 교외에 나가면 보는 사람들이 모두가 엿장수이니 담배장수이니”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33)고희동, 「나와 서화 협회 시대」, 『신천지』 60호, 서울신문사, 1954.2, 182쪽. 미술에 대한 대중의 이해와 지식인들의 인식 사이 에는 여전히 커다란 간극(間隙)이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이 자신의 활동을 ‘여기(餘技)’나 ‘취미’가 아니라 근대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으로 자부하면서 스스로를 문명의 담지자로 인식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들 단체는 이완용(李完用), 김윤식(金允植) 등의 세력가와 명망가를 주축으로 설립된 전통 서화가들의 관변 단체(官邊團體) 성격을 띠었지만, 휘호회나 강습소 활동, 전람회 개최 같은 활동은 근대적 인식의 결과물이었고, 이들의 작품과 활동은 심심치 않게 신문 지면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조선 미술 전람회의 동양화부는 이 단체에서 배출한 화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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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고희동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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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근대 초기의 미술가 집단은 한 쪽에는 근대 문명을 대표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또 한 쪽에는 조선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짊어지고 출발하였다. 이로써 미술은 과거의 유물과 전통적인 서화를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정립되었으며, 전통 서화가들은 전람회와 교육 사업 등을 통한 사회적 활동으로 새로운 ‘미술’의 영역 속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근대’라는 새로운 시공간과 접속할 수 있었다. 1920년대에는 토월 미술 연구회(1923), 고려 미술회(1923)를 비롯한 사설 미술 교육 기관과 여러 미술 단체가 생겨났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일본과 유럽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귀국한 화가들이 다양한 그룹을 결성함에 따라 화단은 양적·질적으로 발전을 이루게 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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