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3장 미술과 관객이 만나는 곳, 전시
  • 1. 근대 미술과 전시 문화의 형성
  • 박람회를 통해 ‘전시’된 사물을 만나다
목수현

조선시대까지 미술품의 감상은 공공 전시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미술품 감상은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나, 감상 방식은 왕실이나 귀족 등 소수 감식안을 지닌 사람들의 것이었다. 조선시 대에 선비들이 서화를 감상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김홍도(金弘道, 1745∼19세기 초)의 ‘그림 감상’이나 시회(詩會)를 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유숙(劉淑, 1827∼1873)의 ‘수계도권(修禊圖卷)’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서화 감상은 문인 취미(文人趣味)를 지닌 이들이나 서화를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주변 지인(知人)들의 몫이었다.130)조선 후기 서화 감상의 유행에 관해서는 강명관, 「조선 후기 경화 세족(京華世族)과 고동 서화(古董書畵) 취미」, 『조선시대 문학 예술의 생성 공간』, 소명 출판, 1999, 277∼316쪽 및 홍선표, 「고미술 취미의 탄생」,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두산 동아, 2007, 317∼35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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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의 수계도권 부분
유숙의 수계도권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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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전시 문화가 조선에 전파된 것은 국외의 행사를 통해서였다. 개항과 더불어 여러 나라와 수교 관계를 맺은 조선은, 각 국가들의 이미지 선전장(宣傳場)인 만국 박람회(萬國博覽會)를 통해 전시 문화를 접하였다. 조선은 미국에서 1893년에 열린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 출품함으로써 국가 이미지를 외국에 알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1900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로 이어졌으며, 여기에서 조선은 세계와 만나면서 동시에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는 계기를 맞기도 하였다.131)시카고 만국 박람회 참가에 관해서는 김영나, 「서양과의 첫 만남」, 『한국 근대 미술과 시각 문화』, 조형 교육, 2002, 13∼56쪽 참조. 파리 만국 박람회 참가에 관해서는 이구열, 「1900년 파리 만박의 한국관」, 『근대 한국 미술사의 연구』, 미진사, 1992 및 이구열, 「파리 박람회의 한국관」, 『서울의 추억』, 고려 대학교 박물관, 2006 참조. 박람회는 주로 19세기에 서구 국가들을 중심으로 성행한 것으로, 산업의 발달 및 제국주의의 확산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근대화된 산업 물품을 일정한 장소에 대규모로 모아 진열하고 관람하는 박람회는 단순히 산업 진흥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국가가 제각기 자국(自國)의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을 과시하는 장 이기도 하였으며, 관람객은 세계 각국의 문화를 관람할 수 있는 시각적인 경험의 장소였다.132)박람회는 재화를 모아 전시하는 행사를 통칭하는 것으로 대개 국제적인 규모의 것이었다. 만국 박람회는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이른바 수정궁 박람회를 시작으로 1867년 파리, 1876년 빈 등 서구 유럽에서 다투어 개최되었다. 미국에서는 1893년 시카고에서 열렸으며, 이러한 박람회 열풍은 1940년대까지 근 100년 동안 풍미하면서 근대 사회를 재구성해 나가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만국 박람회의 개최와 의미에 관해서는 요시미 순야(吉見俊哉), 『박람회, 근대의 시선』, 논형, 2004 및 Robert W. Rydell, World of Fairs, Chicago University Press, 19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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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만국 박람회 한국관
파리 만국 박람회 한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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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진회장경복궁지도(共進會場景福宮之圖)
공진회장경복궁지도(共進會場景福宮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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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시카고와 파리의 만국 박람회에 참가한 것은 조선을 외부에 알리는 기회였지만 이는 조선 외부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없었다. 서구와 일본을 통해 전시 문화를 접한 조선이 직접 국내에서 전시를 처음 연 것은 1907년(융희 1)의 경성 박람회(京城博覽會)부터이나 이는 남대문 근처에 상품을 진열한 것으로 규모가 그리 큰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본격적으로 관람을 경험한 것은 1915년의 시정 5년 기념 조선 물산 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 이하 조선 물산 공진회)이다. 일제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병합한 지 5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려는 명목으로 조선 총독부에서 개최한 이 박람회는 식민 시정(植民施政)을 통해 조선이 어떻게 ‘근대화’되었는가를 시각적으로 펼쳐 보이려는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띠고 있었다.133)일본은 1876년 유시마(湯島)에서 열린 박람회 이래 국내는 물론 서구의 박람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일본의 박람회에 관해서는 요시미 순야, 앞의 책, 참조. 이러한 박람회의 성격으로 열렸으나 지방에서 열린 것에는 ‘공진회’라는 명칭이 붙었다. 당시에 일본은 조선을 한 지방으로 치부하였기 때문에 ‘물산 공진회’라는 명칭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복궁(景福宮) 일대에서 개최된 이 박람회는 조선 안에서 뿐 아니라 일본, 대만의 관객까지 모두 116만 명이 다녀감으로써 100만 명 이상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장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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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박물관
조선 총독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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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박물관 로비
조선 총독부 박물관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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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를 시각적으로 펼쳐 놓고 한 자리에서 보는 경험은 새로운 것이었다. 또한 조선 물산 공진회에서는 ‘미술관’ 건물을 신축하거나 전통 목조 건축인 전각(殿閣)을 개조하여 미술품을 전시하여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이 함께 미술품을 감상하는 기회를 처음으로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문화 패턴을 보여 주었다. 이는 최초의 대규모 미술품 전시이자 불상, 서화(書畵) 등을 ‘미술’이라는 서구의 개념으로 재편하여 제시하는 첫 번째 장이었다. 그뿐 아니라 미술의 장르인 동양화, 서양화, 조각 등의 개념이 공적으로 제시되었다.134)‘동양화’라는 용어는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 잘 쓰지 않았으나 조선의 전통적인 그림을 ‘조선’이라는 국적을 사용하지 않고 범주화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용어였다. 조선 물산 공진회는 ‘동양화’라는 용어가 공식화된 자리이기도 하였다. 경복궁의 사정전(思政殿)에는 서양화가, 그 부속 건물인 연생전(延生殿)에는 조각이, 경성전(慶成殿)에는 동양화가 전시되었다. 한편 사정전의 동쪽, 동궁(東宮) 일곽을 허물고 지은 서구식 콘크리트 2층 건물에 청동기와 철기, 통일신라시대 불상,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 회화 등을 전시하였다. 조선 물산 공진회의 여러 전시관 건물 중 다른 전시관은 공진회를 마치면 해체하는 임시 건물이었지만, 이 건물은 유일하게 영구적으로 쓸 수 있도록 신축한 것이었다. 이 건물은 조선 물산 공진회 기간 동안에는 ‘미술관’으로 불렀지만, 끝난 뒤인 1915년 12월에 조선 총독부 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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