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3장 미술과 관객이 만나는 곳, 전시
  • 1. 근대 미술과 전시 문화의 형성
  • 휘호회에서 전시회로, 1910∼1920년대 초 미술 전시의 시작
목수현

박물관에 진열된 고분 출토 유물이나 불교 유물에 견주어 서화는 이미 전통 사회에서도 감상 대상이었다. 그러나 주로 사적인 영역에서만 이루어지던 서화의 감상은 근대 사회에서 점차 공적인 영역으로 나오게 된다. 그 과도기적인 모습은 화가가 특정 기간 동안 공공장소를 비롯한 일정한 자리에서 시간을 정해 작품을 곧장 제작해 보여 주는 모임인 휘호회(揮毫會)이다. 전통 사회에서 문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즐기던 시회(詩會)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는 사적인 모임이었다면 근대기의 휘호회는 대중 매체에 보도됨으로 해서 공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휘호회는 화가가 궁궐에 나아가 그림을 그려 보이는 어전(御前) 휘호회에서부터 개인이 자기 집에 유명 서화가와 문인(文人), 문객(門客)을 초청해 그림과 글씨를 그리게 하는 모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루어졌다.140)『황성신문』 1908년 7월 22일자. 이러한 휘호회는 즉석에서 먹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쓸 수 있는 동아시아 미술 전통에 기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 초기에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개방된 것은 아니었으나 1910년대를 거쳐 일간 신문에 보도되고 일반인들의 참여도 허용되면서 대중적인 성격을 띠어 갔으며, 1930년대까지 전람회와는 또 다른 전시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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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 협회 휘호회 기사
서화 협회 휘호회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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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즉석에서 작품 제작을 시연(試演)하는 휘호회와 달리 완성된 그림을 전시하는 전람회도 1910년대부터 점차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1913년에 결성한 서화 미술회(書畵美術會)에서는 회원과 초대인의 작품 90여 점과 생도(生徒)의 작품 20여 점으로 남산 국취루(掬翠樓)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주로 개인이 주최하던 휘호회와 달리 서화 미술회나 윤영기 서화회(尹永基書畵會) 등에서 마련한 전람회는 미술가 단체가 주체로 개최하였으며, 작품을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 내는 방식보다는 완성품을 전시하는 방식을 주로 채택하였다. 여기에 즉석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휘호회가 결합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관객을 이끌려는 이벤트적인 성격이 짙었다. 전시 장소는 개인의 주택보다는 국취루, 명월관(明月館) 등의 요릿집과 그보다 좀 더 공적 장소인 교육 구락부(敎育俱樂部) 등의 공공 기관, 학교 등으로 일반인의 관람이 가능한 곳이어서 전람회의 공적인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전시 기간도 하루가 아니라 적어도 사흘이나 닷새 정도의 일정 기 간을 두고 전시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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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당 사진관과 고금 서화관
천연당 사진관과 고금 서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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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작품을 일정 공간에서 상설로 전시하며 판매도 겸하는 형태의 서화관(書畵館)도 1900년대부터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한양에는 대안동에 김유탁(金有鐸)이 열었던 수암 서화관(守巖書畵館), 동현(銅峴)에 최영호(崔永鎬)·조석진(趙錫晉) 등이 열었던 한성 서화관(漢城書畵館), 석정동에 김규진(金圭鎭)이 열었던 고금 서화관(古今書畵館) 등이 있었고, 황해도 해주에도 한창 서화관(韓昌書畵館)이 있었다. 이들 서화관은 현대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판매도 겸한다는 점에서 화랑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었는데, 전통 사회에서 종이류를 파는 상점인 지전(紙廛)에서 여러 가지 그림을 판매하던 기능이 서화 판매 중심으로 전문화하여 변모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해강(海崗) 김규진이 천연당 사진관(天然堂寫眞館)과 나란히 열었던 고금 서화관은 조선시대 대가의 작품과 해강 자신을 포함하여 당대 작가의 신작(新作)을 진열한 일종의 화랑이었다. 이 고금 서화관을 중심으로 1915년에 연 서화 연구회(書畵硏究會)는 공공 미술 교육 기관이 없던 당시에 서화를 교육시키던 기관이었다.141)박종기, 「해강 김규진과 천연당 사진관」, 『천연당 사진관 개관 100주년 기념』 전시 도록, 한미 사진 미술관, 2007, 23쪽. 따라서 김규진의 고금 서화관은 교육 기관과 화랑이 연계된 새로운 형태의 전시장이었다.

당대 미술품을 일정한 장소에 일정 기간 전시하는 전람회가 가장 본격적으로 열린 것은 1915년에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 물산 공진회에서였다. 조선 물산 공진회의 미술 전시는 고미술품과 유물을 새로 지은 서양식 건물에 전시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서양화, 동양화, 조각 등의 장르를 구분한 당대의 미술품을 경복궁의 전각인 경성전·연생전·응지당(膺祉堂) 등 참고 미술관에 전시하였 다. 이때 출품된 신작 미술품은 총 151점으로, 동양화 98점, 서양화 36점, 조각 17점이었으며, 일본인 86명과 조선인 57명이 참가하였다. 당시 조선 화단을 대표하던 안중식(安中植, 1861∼1919)·조석진(1853∼1920)·김응원(金應元, 1855∼1921)·김규진(1868∼1933) 등도 대거 참여하였으며, 일본에 유학하고 온 고희동(高羲東, 1886∼1965)·김관호(金觀鎬, 1890∼1959) 등도 출품하였다.142)『施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報告書』 第2卷, 朝鮮總督府, 1915, 555∼5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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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물산 공진회에 전시된 서양화
조선 물산 공진회에 전시된 서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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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만 명이 다녀간 조선 물산 공진회에서 열린 미술품 전시는 미술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 대중이 ‘전시’라는 방식을 통해 미술품을 대거 접하는 경험을 안겨 준 것이었다. 또한 조선 물산 공진회는 관(官)이 주최하여 널리 미술품을 모집한 다음 폐회 직전에 입상작(入賞作)을 뽑아 시상을 하는 등 공모전(公募展) 형식을 선보였다. 조선 물산 공진회에 전시된 미술품 가운데 역사 유물이나 고미술품이 조선 총독부 박물관의 소장품이 된 반면, 참고 미술관에 전시된 신작 미술품은 매매되거나 작가가 다시 찾아갔다. 유물과 신작 미술품의 유통은 이미 이때부터 이처럼 구분되어 있었다. 이러한 공모전 방식은 1922년에 개설된 조선 미술 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로 이어지는 신작 미술품 전시 방식의 전신(前身)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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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물산 공진회장을 메운 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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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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