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3장 미술과 관객이 만나는 곳, 전시
  • 1. 근대 미술과 전시 문화의 형성
  • 서화 협회 미술 전람회, 단체전, 개인전
목수현

조선 미술 전람회보다 한 해 앞선 1921년부터 개최되기 시작한 서화 협회 미술 전람회(이하 협전(協展))는 몇 가지 점에서 조선 미술 전람회와 대비된다. 관 주도의 조선 미술 전람회와 달리 협전은 서화 협회라는 민간 미술인 단체가 개최한 전람회였다. 1918년에 안중식, 조석진, 고희동, 오세창(吳世昌, 1864∼1953), 김규진, 이도영(李道榮, 1884∼1933) 등의 미술인이 모여 결성한 서화 협회에서는 3년의 준비를 거쳐 1921년에 첫 전람회를 개최 하였다. 협전은 서화 협회의 회원이 작품을 출품하는 회원전의 형식을 띠었지만, 서화 협회가 당시 조선인 미술가를 거의 망라하고 있었던 만큼 조선인의 단합된 미술 전람회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출품 자격을 회원에 한정하지 않고, 서화에 조예가 깊은 일반인의 출품도 적극 유도하였다.149)『조선일보』 1926년 3월 8일자. 3·1 운동 이후 침체기에 있던 미술계에 협전은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기에 당시 신문에서는 “꿈속에 있던 조선 서화계의 깨우는 첫 소리”로 소개하며 전람회 광경 사진을 싣는 등 크게 보도하였다.150)일기자(一記者), 「서화 협회 전람회의 초일」, 『동아일보』 1921년 4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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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 협회 미술 전람회 광경
서화 협회 미술 전람회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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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전은 조선 미술 전람회와 달리 장르를 구분해 전시를 나누지는 않았다. 이는 서화 협회라는 단체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인 ‘서(書)’와 ‘화(畵)’ 중심의 체제를 바탕으로, 조선인 미술가는 대부분 수묵 담채화가 중심인 전통적 서화 작업을 하고 있었고 유화를 그리는 사람의 비중이 높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1921년 첫해에는 78점의 그림과 30점의 서예 가운데 유화는 나혜석, 고희동, 최우석(崔禹錫, 1899∼1964)이 모두 8점을 출품하였을 따름이었다. 협전의 출품작은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점차 유화와 수채화의 비중이 늘어났으나, 조각이나 공예 분야는 여전히 출품자가 없었다.

1936년까지 모두 15회를 개최한 협전은 주로 보성 고등 보통학교 강당이나 휘문 고등 보통학교 강당 등 학교를 빌려서 전시하였다. 전시 기간도 대개 20일 동안 지속되었던 조선 미술 전람회와 달리 초창기에는 사흘 정도, 마지막 전시였던 1936년에는 여드레 동안 열렸다. 협전은 회원전이었던 만큼 심사나 시상을 하지 않았으나 출품작의 질적 향상을 꾀하기 위해 1930년과 1931년에는 심사 및 특선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협전은 재정적인 문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참가 작가의 감소나 대작 출품이 많지 않은 등 어려움을 겪기는 하였으나, 조선 화단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조선 미술 전람회에 대응하는 민족 미술인의 잔치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는 협전을 꾸준히 보도하고 입선 작품을 게재하면서 협전을 “조선 미술의 창조를 향한 희망”으로 평가하였다.151)『조선일보』 1931년 10월 16일자. 1928년 휘문 고등 보통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협전은 본래 11월 7일부터 11월 13일까지 이레 동안을 회기로 예정하였으나 관람자들의 희망에 따라 닷새를 더 연장할 만큼 주목과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152)『조선일보』 1928년 11월 13일자. 그러나 1937년에 들어서는 서화 협회를 개인의 독단으로 운영하는 내부 문제와 끊임없이 협전 중지를 종용(慫慂)하는 조선 총독부의 압력 등을 이겨 내지 못하고 중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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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호 자화상
김관호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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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경향을 발 빠르게 수용하지 못하는 대규모 단체 전람회와 달리 개인전(個人展)과 소규모 동인전(同人展)에서 미술인들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추구해 나갈 수 있었다. 1916년 문부성 미술 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하여 이름이 난 김관호는 같은 해 12월 17일에 고향인 평양의 연무장(鍊武場) 건물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물론 일본인 미술가나 서구 미술인의 개인전은 이미 1910년 무렵부터 열렸지만, 이는 조선인이 연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1921년 나혜석도 남 편 김우영(金雨英)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와 경성일보사 강당인 내청각(來菁閣)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는 3월 18일부터 19일까지 이틀 동안 주로 풍경을 주제로 한 작품 70여 점을 선보였는데, 조선인이 경성에서 처음으로 연 개인전이었다. 나혜석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여성이어서인지 무려 5,000명의 관객이 붐비며 성황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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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개인전 광경
나혜석 개인전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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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우 자화상
이종우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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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는 조선 미술 전람회나 협전을 통해 이름을 얻거나 유학에서 돌아온 화가의 개인전이 적지 않게 열렸다. 1928년 파리에서 귀국한 이종우(李鍾禹, 1899∼1981)는 동아일보사 3층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세계적 조선 화가’로 보도하면서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졌다.153)『동아일보』 1928년 11월 2일자. 이는 해외로 유학한 화가는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한 데 비하여 이종우는 파리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서구에 대한 관심과 동경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였다.154)최열, 『한국 근대 미술의 역사』, 열화당, 1996, 231쪽. 전시한 작품은 모두 29점으로 인물상이 18점, 풍경이 7점, 정물이 4점이었는데, 파리의 살롱(Le Salon)전에 출진(出陳)하였던 ‘모부인 초상’ 등 서구적인 용모의 그림이 관심을 끌었다. 그 러나 이러한 전시와 그림에 대해 화가이자 미술 비평가인 김종태(金鍾泰, 1906∼1935)는 작품은 우수하다고 하면서도 “조선인 작가로서는 조선인 고유색(固有色)을 가져야 할 것”을 요청해 외국풍을 지향(志向)하는 세태에 일침을 가하기도 하였다.155)김종태, 「이종우 군의 개인전을 보고」, 『동아일보』 1928년 1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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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미전
동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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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출신 지역이나 학교가 같은 화가들, 또는 뜻을 같이하는 화가들의 단체전(團體展)도 열리기 시작하였다. 1929년에 김주경(金周經, 1902∼1981)을 중심으로 한 녹향회(綠鄕會), 1930년에 김용준·길진섭(吉鎭燮, 1907∼?)·구본웅(具本雄, 1906∼1953) 등이 중추를 이룬 백만양화회(百萬洋畵會) 등의 단체가 결성되어 전시회를 열었다. 그뿐 아니라 1930년에 주로 동경 미술 학교 졸업생들이 모여 동미전(東美展)을 개최하였다. 이 같은 움직임은 지역 화단에도 영향을 미쳤다. 평양에서는 김윤보(金允輔), 김관호, 김찬영(金瓚永, 1893∼1960) 등이 주축을 이룬 평양 삭성회(朔星會) 전람회가 1926년 7월 23일부터 7월 27일까지 천도교 평양 종리원(天道敎平壤宗理院) 안에 있는 평양 삭성회 회화 연구소에서 개최된 이후 매년 열렸 다. 50여 점의 출품작을 관람하려는 관객이 매일 1,000여 명씩 몰려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래 풍류의 고장으로 이름을 떨친 평양의 문화적 수요를 짐작할 수 있다. 화가들의 모임이 활발하였던 또 다른 지역인 대구에서는 이인성, 박명조(朴命祚, 1906∼1969), 서동진(徐東陳, 1900∼1970) 등이 결성한 향토회(鄕土會)가 개최하는 향토회전이 1930년 이래 계속 열렸다. 이 같은 단체전이나 개인전이 대개 유화를 그리는 화가들을 주축으로 진행된 반면, 수묵 채색화가들의 개인전이 상대적으로 드물었던 것은 당시 전시 문화가 서구적인 시스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전시 가운데 1925년에 결성된 프로 미술 동맹이 주축을 이룬 프로 미전이 1930년 수원 화성 학원 강당에서 열렸다. 조선 미술 전람회나 협전 같은 공모전과 달리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내세운 이 전시는 미술 장르보다는 ‘좌익적 서화, 만화, 사진 포스터, 조각’ 등을 제출하도록 요청하였으며, 작품도 미술적 가치보다는 프롤레타리아의 ‘아지프로(agitation propaganda, 선동을 목적으로 한 선전)’만 되는 것이면 환영한다는 전시 요강을 발표하기도 하였다.156)『조선일보』 1930년 3월 23일자. 최열, 앞의 책, 263쪽 재인용.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던 경찰이 작품 70여 점을 압수해 가고 준비 위원을 연행해 가는 사건을 겪으면서도 작품을 전시하여 이틀 동안 수천 명의 관객이 줄을 서서 관람하는 성황을 이루었다는 보도로 보아, 당시 사회주의 운동이 미술과 대중을 연결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기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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