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3장 미술과 관객이 만나는 곳, 전시
  • 2. 광복 이후 현대 화단과 미술의 변화
  • 실험 미술과 설치 미술, 소통의 다양한 방법들
목수현

이처럼 다양한 미술적 경험이 관객에게 제시되었던 한편, 작가들도 전후에 접하게 된 유럽과 미국의 새로운 미술 경향의 자극에 힘입고, 화포(畵布)를 통한 2차원적 표현만으로는 산업 사회를 살아가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 이상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확대보기
한국 최초의 해프닝
한국 최초의 해프닝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한국 최초의 해프닝
한국 최초의 해프닝
팝업창 닫기

파격적인 실험 미술을 선보인 것은 1967년 명동의 중앙 공보관 화랑에서 열린 한국 청년 작가 연립전(韓國靑年作家聯立展)에서였다. 그룹 오리진(Origin)과 무(無) 동인, 신전(新展) 동인이 연합한 이 전시에는 12월 14일 오후 4시 한국 미술사상 최초의 해프닝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 시연(試演)되었다. 무 동인의 구성원인 김영자(金英子)가 의자에 앉아 비닐우산을 펴들고 다른 사람들이 각자 촛불을 들고 우산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전래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며 계속 돌다가 갑자기 촛불로 비닐을 태우거나 초를 우산에 꽂고, 마지막에는 모두 참여하여 비닐우산을 망가뜨리는 행위로 끝을 맺는 작품이었다. 평론가 오광수(吳光洙)가 각본을 쓴 이 해프닝을 비롯하여, 연통(烟筒)을 구부려 공간을 구성한 ‘색(色) 연통’ 이나 거대한 십구공탄(十九孔炭)과 팔각 성냥통, 변기를 가득 메운 고무장갑 손가락 위에 밧줄을 매단 것, 거대한 입술에 불을 들어오게 한 ‘키스 미’ 등 각종 설치물로 이루어진 이 전시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177)『주간 한국』 1967년 12월 17일자.

확대보기
작가들의 가두 행진
작가들의 가두 행진
팝업창 닫기

개막일인 12월 11일 오전에도 참가 작가들이 직접 “행동파 화가”, “추상 이후의 작품”, “생활 속의 작품”, “현대 회화는 대중과 친하다” 등의 구호를 적은 피켓을 들고 세종로 일대를 행진하며 전시를 알리는 가두 행진(街頭行進)을 벌였다. 이는 1965년에 발표한 정부의 종합 박물관 계획이나 국전 운영 등 미술의 과거성에 집착하는 문화 정책에 대한 시위이기도 하였다. 또 1950년대 후반 화단을 이끈 추상 미술이 대중과의 소통에 실패하였음을 지적하고, 당시 사회의 풍속도이기도 하였던 연탄난로와 연통 등 산업 사회를 상징하는 오브제 등을 활용하여 ‘생활하는 미술, 환경을 조성하는 미술’을 지향하고자 하였다.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의 경우는 미일 안보(美日安保), 핵우산(核雨傘) 등 미국이 추구하는 동북아시아 체제 구축이라는 구체적인 현실 상황에 대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를 부름으로써 우리나라 문화의 자립 또는 그 아이덴티티를 묻는 등 현실에 대하여 강하게 발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술사에 획기적”이라는 평론가들의 극찬과 달리 언론은 가두 행진과 해프닝을 이색 전시로서, “괴상한 미술”, “주로 20대 화가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이것도 미술이라, 보는 이에게 시각적 반응만 주면 된다.”는 식으로 호기심 차원의 보도를 하였을 따름이었다.178)오상길·김미경 엮음, 『한국 현대 미술 다시 읽기』 Ⅱ, vol. I, ICAS, 2001, 88∼89쪽.

이 같은 실험 미술과 해프닝은 빨대로 투명 풍선을 불어 짧은 반바지와 머플러만 걸친 여인의 몸에 붙인 후 터뜨리는 정강자(鄭江子)의 ‘투명 풍선과 누드’(1968), 육교 위에서 행인들에게 찢어진 콘돔을 나누어 주는 ‘콘돔과 카바마인’(1970) 등으로 이어졌는데, 그때마다 빗발치는 비난과 함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179)『한국의 행위 미술 1967∼2007』, 결, 국립 현대 미술관, 2007.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 유신 체제하에서는 저항적 비판을 담은 미술은 점차 사그라지고 미술 내적인 개념과 논리를 다루는 쪽으로 선회하고 말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