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4장 미술과 시장
  • 2. 일제 강점기의 미술 시장
  • 고미술품 시장
  • 수장가
권행가

일제 강점기 동안 가장 대표적인 미술품 수집의 주체는 이왕가 미술관과 총독부 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222)목수현, 「일제하 이왕가 박물관(李王家博物館)의 식민지적 성격」, 『미술 사학 연구』 227, 한국 미술 사학회, 2000, 81∼104쪽 ; 박계리, 「조선 총독부 박물관 서화 컬렉션과 수집가들」, 『근대 미술 연구』, 국립 현대 미술관, 2006, 173∼194쪽. 개인 고객 중 일본인은 주로 조선에 거주하던 총독부 고관이나 관료, 군인(이토 히로부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코미야 미호마츠(小宮三保松),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하야시 곤스케(林勸助), 스에마츠 구마히코(末松熊彦) 등), 은행가나 사업가(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와다 이츠로(和田一郞) 등), 법률가, 학자나 교원(세키노 다타시(關野貞),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 등), 수집가나 골동상(아마츠 모타로(天池茂太郞), 사사키 쵸우지(佐佐木兆治), 진보 키우(神保喜三), 사사키 코키사부로(鈴木驅 三郞), 요시다 켄도우(吉田賢藏) 등)이 주요 고객층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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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갑형 동기(肩胛形銅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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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수집가로는 남선 합동 전기 회사(南鮮合同電氣會社) 사장 오쿠라 다케노스케(1886∼1964)를 들 수 있다. 그는 대구와 경성을 오가며 주로 금속류와 여타의 골동품, 서화를 수집하여 광복 후 일부는 대구에 자진 헌납하고 일부는 일본으로 반출해 갔다. 현재 도쿄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000여 점의 조선 미술품 오쿠라 컬렉션은 이 시기부터 그가 수집한 것이다.223)『오구라 컬렉션 한국 문화재 : 일본 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국립 문화재 연구소, 2005, 8∼17쪽. 그 밖에 이들과 성격이 좀 다르나 조선 민족 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을 설립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아사카와 타쿠미(淺川巧, 1891∼1931),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1884∼1964) 형제의 조선 도자기를 비롯한 민예품(民藝品) 수집도 조선 내의 백자 수집에 영향을 준 예라 할 수 있다.224)『문화적 기억 :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 일민 미술관, 2006 ; 박계리,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와 조선 민족 미술관」, 『한국 근대 미술 사학』 9, 한국 근현대 미술 사학회, 2001, 41∼68쪽.

조선인 중에는 구한말 때 귀족이나 관료 가문 출신(민규식(閔奎植), 민병석(閔丙奭), 이용문(李容汶), 장택상(張澤相), 이병직(李秉直) 등), 각 지역의 갑부나 자본가(경남 합천의 천석꾼 출신 임상종(林尙鍾), 진도 갑부이자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일제 강점기 최고의 수장가 전형필(全鎣弼), 호남의 거부 박영철(朴榮喆)·최창학(崔昌學)), 의사(함석태(咸錫泰), 박병래, 백인제(白麟濟), 박창훈(朴昌薰) 등), 학자나 문인(박종화(朴鍾和), 이태준(李泰俊), 이인영(李麟榮), 김양선(金良善) 등), 미술가(오세창, 김용진(金容鎭), 이한복(李漢福), 이여성(李如星), 도상봉(都相鳳), 김찬영(金讚泳) 등), 그 밖에 총독부 미술관에 물건을 댄 전문 수집가(박준화(朴駿和), 이성혁(李性爀), 박봉수(朴鳳秀) 등)가 있었다.225)수집가 명단은 송원(이영섭), 「내가 걸어온 고미술계 30년」, 『월간 문화재』 5권 6호, 월간 문화재사, 1975.6, 31쪽과 김상엽, 「일제강점기 고미술품 유통과 거래」, 157∼158쪽 참조. 조선 총독부 관련 컬렉터들에 대한 사항은 박계리, 앞의 글, 183∼18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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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화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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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全鎣弼, 1906∼1962)은 조선인 중 최대 수장가로 1930년대 후반 경성의 고미술품 가격을 올려놓은 장본인 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는 1930년경부터 고미술품을 수집하였는데 1937년에는 변호사이자 고려청자 수집가였던 영국인 존 게스비(Sir Jhon Gadsby)의 수집품을 일괄 구입한 것을 위시하여 일제 강점기 말에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인 수장가의 소장품을 경매를 통해 많이 인수하였다. 이렇게 모은 수집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1938년 최초의 사립 박물관 보화각(葆華閣, 현재의 간송 미술관)을 설립하였다.226)최완수, 「간송이 보화각 설립하던 이야기」, 『간송 문화』 55, 간송 미술관, 1998 ; 전형필, 「고미술품 수집 여담(餘談)」, 『신태양』, 신태양 출판사, 1959.9, 106∼109쪽. 전형필의 이러한 수집 활동은 단순히 개인적 취향을 넘어서 민족 문화재의 환수와 보존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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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화각 개관 기념사진
보화각 개관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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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기린 유개 향로(靑磁麒麟鈕蓋香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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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 유죽연로원앙문 정병(靑磁象嵌柳竹蓮蘆鴛鴦文淨甁)
청자 상감 유죽연로원앙문 정병(靑磁象嵌柳竹蓮蘆鴛鴦文淨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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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이한복, 박영철, 김용진, 박병래, 이여성, 도상봉, 손재형 등은 1930∼1940년대 초까지 장택상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던 그룹이다.227)박병래, 앞의 책, 134∼135쪽. 1910년대 1세대 서양화가인 김찬영은 귀국 후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도자기나 철사 필통 등의 골동품 수집에 심취하여 거간을 통하지 않고 직접 물건을 살 정도로 감식안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동경의 경매에 직접 내놓아 팔 정도로 적극적인 수집 활동을 하였다. 이 중 동양화가 이한복은 오세창 다음으로 인정받는 서화 감식가로도 활동하였다. 앞으로 좀 더 연구를 해야 할 부분이지만 이여성의 전통 문화에 대한 연구, 도상봉의 광복 후 도자기 그림 등은 이 시기 장택상 집에서의 수집가들의 활동과 많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들은 시장을 통해 유통되는 작품을 구매하는 과정을 통해 미술품의 경제적 가치와 투자적 가치를 분명하게 경험한 세대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고객 집단이기보다는 조선 후기의 여항 문인적 취향의 연장선상에서 작품을 수집, 완상(玩賞), 품평(品評)하는 집단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김환기, 도상봉, 김용준, 구본웅, 이여성 같은 작가들이 자신의 수집 활동을 창작에로까지 연결시켜 고미술품에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민족적 아우라(Aura)를 부여하게 되는 과정은 그들의 고미술품 수집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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