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5장 도시 공간과 시각 문화
  • 1. 근대로의 이행
  • 근대 건축과 도시
김영나

19세기 후반 산업 혁명(産業革命)과 더불어 물질문명과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면서 서구 열강은 새로운 자원과 시장을 찾아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지로 제국주의적 확장을 시도하였다. 이제까지 동아시아의 질서와 문화 속에 평화롭게 살고 있던 조선도 급격히 달라진 국제 정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1860년대부터는 조선의 문호 개방을 호시탐탐(虎視眈眈) 노리던 서구 열강과의 충돌이 일어났다. 1866년(고종 3)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평양 군민이 불태워 버린 사건, 같은 해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丙寅洋擾), 1871년(고종 8) 미국 군함이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辛未洋擾) 등이 이러한 사건들이었다. 이를 모두 물리친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은 서양은 야만이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면서 쇄국 정책(鎖國政策)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일가가 권력을 잡으면서 조선 왕조의 대외 정책은 개방으로 선회하였고, 근대화는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저항과 갈등을 빚었지만 1876년(고종 13)에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 그리고 1882년(고종 19)에 미국과 체결한 조미 수호 통상 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등을 시작으로 조선은 개항하였고 세계적인 대세에 합류하게 되었다. 고종은 일본에 수신사(修信使), 청나라에 영선사(領選使),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여 근대적 과학 기술과 지식을 습 득하려고 하였다. 토지 제도, 신분 제도 등의 개혁을 비롯하여 많은 사회적·정치적 변혁을 통해 봉건시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그 영향은 의식주의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났다. 크고 작은 변화 가운데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도시 경관의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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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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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현 성당 부근 전경
종현 성당 부근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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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漢城, 일제 강점기의 경성(京城), 현재의 서울)에서는 도로의 변을 넓히고 상점들을 재정비하였으며, 파고다 공원(현재의 탑골 공원) 같은 도시의 근대적 휴식 공간이 들어섰고, 1899년(고종 26)에는 전차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근대 도시 경관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서양 건축의 등장이었다. 서양 건축의 도입과 함께 집을 짓는 재료나 구조는 물론 집에 대한 개념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882년(고종 19) 한성에 서양인들의 거주가 허용되자 영사관(領事館)이나 외국인 거류지에 서양풍(西洋風) 건축이 속속 들어섰다. 신고전주의 양식인 러시아 공사관(1895), 5층탑과 경사진 지붕이 특징적인 프랑스 공사관(1897), 영국 19세기의 조지아풍(Georgia風)인 영국 영사관(1892) 등은 모두 자기 나라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서 지은 건물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던 서양식 건축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898년에 세운 종현 성당(鐘峴聖堂, 현재 명동 성당)으로 당시 한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이 성당은 프랑스의 코스트 신부(Eugene Jean Georges Coste, 1842∼1896)가 설계하였는데, 뾰족한 아치(pointed arch), 교차 궁륭(交叉穹窿, cross vault), 클레레스토리 윈도우(clerestory window) 등 고딕 성당의 외형을 본받고는 있으나 다양한 크기의 벽돌을 사용한 고딕의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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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석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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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에 세운 또 다른 서양풍 건물로는 1896년(건양 1)부터 정궁(正宮)으로 쓰던 경운궁(慶運宮)이 있다. 경운궁의 이름은 1907년(융희 1) 고종의 궁호(宮號)가 덕수(德壽)로 정해지자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덕수궁 안에서 가장 돋보이는 석조전(石造殿)은 1900년(광무 4)에 착공하여 1910년(융희 3) 준공한 건물로 이오니아 주식(Ionia柱式)을 사용한 고전주의 양식이지만, 박공(欂栱)에는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오얏꽃(李花) 패턴을 조각하고 발코니를 곁들인 일종의 절충 양식이었다. 영국인 하딩(G.R.Harding)이 설계한 이 건물은 1층에는 시중들의 거실, 2층에는 접견실과 홀, 3층에는 황제와 황후의 침실이 들어섰다. 이미 1890년대부터 서양식 대례복(大禮服)을 입고 관 리의 공식 복장도 서양식으로 바꾸게 한 고종과 왕실은 과감하게 서양 문화를 앞장서 수용하였다. 고종은 덕수궁에 석조전을 세우기 전에 기둥과 내부는 벽돌로, 외부는 목조와 구리로 만든 정관헌(靜觀軒)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지었고, 이곳에서 프랑스·영국·중국·일본 등에서 수입한 가구, 식기(食器), 화병(畵甁) 등을 사용하고,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한일 병합(韓日倂合) 이후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昌德宮)에도 인정전(仁政殿)은 서양식 커튼을 꾸민 실내로 바꾸었으며, 1917년 화재 이후 새로 지은 희정당(熙政堂)에는 근대적 난방 시설을 설치하고 탁자와 의자를 실내에 놓아 점차 입식 생활(立式生活)로 변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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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 내부
인정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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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1910년경까지 우리나라의 서양식 건물들은 주로 외국인들이 지었지만 이후부터는 일반 건축에서도 서양식 외형에 벽돌과 유리를 사용하게 되는 등 재료와 구조적인 측면에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전문가적인 차원에서 구조적 변화를 적용시키기 시작한 사람들은 1916년에 조선 총독부가 세운 관립(官立) 경성 공업 전문학교(京城工業專門 學校)에서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배출한 약 60여 명의 조선인 건축가로, 이들이 우리나라의 근대 건축가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구조 및 조형적 지식을 갖추고 설계도를 가지고 작업하던 근대적 건축가들은 이제 손의 감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일하던 전통적인 목수(木手)의 영역을 점차 대신하게 된다. 관공서는 주로 서양 건축을 배운 일본인 건축가들이 지었고, 조선인 건축가들은 주로 개인의 주택이나 상업적 건물의 설계를 맡았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1910년 이후부터 조선 총독부의 주관하에 서구적 양식으로 지은 관공서나 주요 공공 기관의 건물이 도심 중앙에 들어서면서 식민 지배 국가가 식민지에서 보여 주고자 한 지배 개념과 정치성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일본은 남대문로를 중심으로 돌과 벽돌을 재료로 한 장중한 관공서 건물을 세워 제국을 상징하는 물리적 도시 공간을 만들고 통제하고자 했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 지은 경성부청(京城府廳, 현재 신세계 백화점 자리)을 비롯하여 경성 재판소, 조선은행, 식산은행, 경성 우체국, 동양 척식 주식회사 같은 공공건물(公共建物)은 대부분 서구 열강이 아시아 식민지에 많이 지었던 공공건물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 준다. 이들 건물은 대개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중심에 돔이나 탑 같은 형태를 사용함으로써 시선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바로크(Baroque) 건축에 가까웠다. 거대한 크기와 높이를 가진 이런 건축물은 아직도 거의 전통 한옥(韓屋)이 대부분이던 민간 주거 지역과 대조를 이룸으로써 근대적일뿐 아니라 권위적인 분위기를 통해 공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지은 공공건물 중 이러한 일본의 문화적 제국주의를 가장 시각적이면서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건축이 1926년에 완공된 조선 총독부 건물이다. 일본은 한일 병합 직후에 조선 왕조의 심장부였던 경복궁 자리에 총독부 청사를 건립할 계획을 세워 1912년에 토목국을 신설하고, 당시 동경에 거주하던 독일계 건축가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 1872∼1914)에게 설계를 맡겼다.286)게오르그 데 라란데는 독일의 베르린 공과 대학 건축과 출신으로 1903년에서 독일의 식민지였던 칭타오(靑島)에서 일본으로 갔다. 그는 1912년에 조선 총독부의 외국인 촉탁 기사로 임명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조선 총독부 청사 이외에도 독일 영사관, 조선 호텔 등을 지었다. 하지만 데 라란데는 설계도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1914년에 사망하였으며, 이후 조선 총독부 건축은 대만 총독부 설계자였던 노무라(野村一郞)와 조선 총독부 건축 기사 구니에다(國枝博), 경성 공업 전문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인 박길룡(朴吉龍, 1898∼1943) 등이 참여하여 1926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일본은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하여 경복궁의 전각 19채, 대문과 중문 22개, 당(堂) 45개 등을 해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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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전경
조선 총독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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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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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조선 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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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건물은 4층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지름 14m 높이 8.17m인 돔을 중앙에 얹은 위압적인 건축물로, 유럽에서는 흔히 바로크시대의 궁전 건축에서 많이 사용한 양식과 유사하다. 1912년에 영국이 지은 인도 총독부(현재 대통령 궁)와 비교되기도 하는 이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로 골조(骨組)를 세운 후 외부에 12㎝ 정도의 화강석을 붙이고 내부는 대리석으로 마감한, 당시로서는 최고급 재료를 사용한 건축이었다.

경성은 이제 도심에 널찍하고 곧게 뻗은 대로를 가진 도시로 변화하고 있었다. 원래 경성은 동서를 축으로 하는 도시였지만, 1926년에 현재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있던 경성부 청사가 현재의 서울 시청 자리로 옮겨지면서 총독부-경성부 청사-조선은행, 또는 종로-황금정(黃金町, 현재 을지로)-본정(本町, 현재 충무로)의 남북을 연결하는 축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경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인 남촌(南村)과 그 북쪽인 종로를 중심으로 조선인들이 거주하던 북촌(北村)의 이원적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즉 남산에서부터 남대문, 충무로, 명동, 퇴계로, 필동을 중심으로 하는 남촌에 사는 사람은 거의 90%가 일본인이었고, 종로를 중심으로 하는 북촌은 조선인 주거 지역이었으며, 서구인들은 주로 정동(貞洞)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287)손정목, 『일제 강점기 도시화 과정 연구』, 일지사, 1996, 369∼373쪽. 가장 번화한 거리는 상가가 즐비했던 본정, 명치정(明治町, 현재 명동)에서부터 조선은행(현재 한국은행), 미쓰코시 백화점(현재 신세계 백화점), 경성부 청사(현재 시청)와 철도 호텔(현재 조선 호텔)까지 이어지는 지역이었다. 이 남대문로 일대는 일본인이 가진 권력, 자본, 문화의 중심이었고, 1920년대에 들어서면 네온사인 등이 밝혀지면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던 곳이었다. 한편 북촌에는 민족 자본으로 세운 화신 백화점, YMCA, 그리고 집회를 많이 하던 파고다 공원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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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경성 전경
1920년대 경성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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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에 조선 회사령(朝鮮會社令)이 폐지되어 회사 설립이 자유로워지자 일본 자본이 속속 들어왔다. 이들이 지으려던 건물은 권위적인 공공건물과 달리 기능을 고려해야 하는 백화점, 극장, 사무실 같은 상업 건물이거나 개인 주택이었다. 이런 건물의 건축을 주로 일본인이나 조선인 민간 건축 사무소가 맡았는데, 이렇게 되면서 1910년대에는 불과 3개소에 그쳤던 설계 사무소가 1930년대에는 24개소로 증가하였다. 민간이나 개인이 소 유주인 이들 건물에서는 일본을 통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나 부르노 타우트(Bruno Taut, 1880∼1938) 등의 영향을 받은 서구적 모더니즘 건축 양식이 조금씩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대부분 벽돌을 사용한 이전 건물과 달리 철근 콘크리트를 쓰면서 무거운 벽체가 많이 사라지고, 커다란 창을 내거나 타일을 사용하였고, 넓고 개방된 내부 공간을 두었다는 점이다. 1934년에 옥전 건축 사무소에서 지은 단성사(團成社) 건물이나 1935년에 건축한 경성 전화국(京城電話局)은 이러한 모더니즘 건축 양식의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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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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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지역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일반 주택이나 상점도 양식(洋式)을 절충한 유리창이나 기와, 발코니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에 쓴 ‘서울 잡감’이라는 글을 보면, “얼른 눈에 뜨인 것은 전에 없던 자동차집이 많아지고 전에 보기 흉하던 간판이 없어지고 약간 미술적 간판이 걸리고 벽돌집 소위 현대식 양옥이 전보다 많아진 것이요, 그 다음에는 전에는 막 타고 내리던 전차에 반드시 뒤로 타고 앞으로 내리는 법이 생기고 돈 받고 땡땡 치는 법이 없어지고 표를 주고 또 바꿔 타는 표를 주는 것이 새로운 것이다. 이것이 변한 것이라면 변한 것이요 진보한 것이라면 진보한 것이라고 할까. 물론 내 눈에 띠는 것 외부에 나타난 것 말이다. 그러나 굉장한 미술적 간판 밑에는 원시적 초가막아리가 그냥 있고 현대식 양식집에는 상투 짓고 망건 쓰고 긴 수염 늘이고 긴 담뱃대 가로문 양반들이 팔짱을 찌르고 서 있는 것은 많이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어 신구 (新舊)가 뒤섞인 시가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288)추호(秋湖), 「서울 잡감」, 『서울』 1920년 4월호 : 김진송,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현실 문화 연구, 1999, 52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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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동 주거지
돈암동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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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부터는 문화 주택(文化住宅)이 등장한다. 문화인이 거주한다는 의미의 이 주택은 대체로 페인트를 칠한 판자벽과 색이 있는 기와집에 유리창을 사용하고 테라스를 갖추었으며, 내부에는 의자 생활을 하는 거실과 부엌이 있고, 레이스가 달린 커튼이나 등나무 가구를 들여놓는 등 서양식 주거 생활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거나 절충한 형태였다. 일본에서 시작된 이 문화 주택은 당시 잡지에도 많이 소개되고 토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289)주로 상류층이 소유하던 문화 주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은 부에 대한 소외감을 느끼게 한다. “빨간 벽돌집, 파란 시멘트 집, 노란 석회집-가지각색의 이층 양관이 하늘에나 떠올릴 듯이 버려 있다. 그리고 한 옆으로는 네 귀를 잠자리 날개같이 반짝 치켜 올리고 ‘바니스’ 기름을 반들반들 먹인 호화의 조선 와가(瓦家)가 줄을 지어 버려 있다. 지상 낙원-소위 현대 문화를 향락할 수 있다는 이상의 주택들이다.” 「양춘명암 이중주-문화 주택촌」, 『조광(朝光)』, 1937년 4월호 : 김진송, 앞의 책, 263쪽 재인용.

그 밖에 또 다른 주택 형식으로는 민간 주택업자들이 지은 ㄷ 자 또는 ㅁ 자 형태로 된 15평 정도의 개량 한옥(改良韓屋)으로, 여기에는 주로 중류 계층이 살았다. 특히 1934년 ‘조선 시가지 계획령(朝鮮新市街地計劃令)’이 제정되어 경성의 기존 행정 구역에다 영등포, 돈암동 등의 새로운 행정 구역을 포함시켜 면적이 세 배나 확장되면서 집장사들이 이곳에 온돌방과 다다미방을 병합한 형태의 개량 한옥을 대거 축조하였다. 안암정(安岩町)에 사는 팔보(八甫)라는 필자는 『조광(朝光)』에 자신이 사는 곳이 “모조리 집장사들이 새 재목을 드려다 우직끈 뚝딱 지어 논 것으로 이르고 본다면 그야말로 전통이 없는 개척촌과 같이만 보일 수밖에 없다. …… 여기서 사는 사람도 대개는 식구도 단출한 단가살이, 아들로 치면 둘째 셋째의 살림난 지차치들…… 놀라운 것은 청사진 두서너 장의 설계로 지은 집단 주택이 한 번지 안에 육십 호 가까이나 된다. …… 사방에서 몰려와서 일제히 너는 사십 호, 나는 이십 호로 아파트 방 차지하듯 일제히 이사 온 집…… 교원, 회사원, 음악가, 화가, 각기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젊은 아이 아버지들은 혹 전차 안에서라도 만나면 정다웁게 인사를 하면서……”라는 글을 실었다.290)팔보(八甫), 「서울 잡기장」, 『조광』, 1943년 1월호, 130∼131쪽 : 염복규, 「식민지 근대의 공간 형성」, 『거울과 미로』, 동국 대학교 국문학 연구소, 2006, 253쪽 재인용.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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