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5장 도시 공간과 시각 문화
  • 2. 1950년대 이후 도시와 시각 문화
  • 공공 공간과 군중
김영나

도시의 경험은 기본적으로 군중의 경험이다.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고 생활하면서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도시의 일상이다. 실제로 도시인들은 사적인 공간보다는 공공 영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개인만의 공간인 사적 영역과 대비되는 용어인 공공 영역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와 같은 물리적인 장소는 물론, 직장인이 일하는 사회적 장소, 또는 신문이나 잡지 같은 인쇄 매체의 영역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윤리가 작동하던 전통 사회에 공공 영역은 거의 남 성의 영역이었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게 분화되어 계층, 직종, 성별이 존재하는 혼성의 영역이 되었다. 이러한 공공 공간에 놓이거나 설치되는 시각 이미지는 회화나 조각처럼 미술관이나 수집가의 개인 공간에서 감상하는 미술품과는 달리 불특정 다수의 군중을 대상으로 하며, 이들의 시선을 끌어야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가장 흔히 말하는 물리적인 공공 영역이란 주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와 장소를 의미하는데, 6·25 전쟁 이후 우리나라의 물리적인 공공 영역에서 가장 눈에 띠는 시각물은 거리에 붙은 전단지나 영화 포스터, 간판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친 가난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일반인들의 중요한 오락거리는 영화 감상이었다. 영화 광고는 거리에 붙은 포스터나 극장 간판뿐 아니라 신문 광고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확대보기
영화 자유 부인 포스터
영화 자유 부인 포스터
팝업창 닫기

영화는 이미 1920년대부터 단성사(團成社), 우미관(優美館) 같은 극장을 중심으로 대중 매체로 자리 잡았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 당시 주목할 만한 영화로는 빨치산을 다룬 ‘피아골’(1955), 아시아 영화제에서 수상한 ‘시집가는 날’(1956), 정비석(鄭飛石, 1911∼1991)의 소설을 바탕으로 대학 교수 부인의 불륜을 주제로 한 ‘자유 부 인’(1956)을 들 수 있다. 특히 한형모(韓瀅模, 1917∼1999) 감독의 ‘자유 부인’은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변화 속에서 불거진 춤바람과 계 모임, 사치 풍조 등의 사회 문제를 다룬 영화로, 무려 10만 8000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자유 부인’의 포스터에는 한복을 입은 주인공 오선영의 남편이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오선영이 젊은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크게 부각시키고, “당신이 장태연 교수라면…… 어떻게 결정을 지으시겠습니까?”라는 글귀를 집어넣어 삼각관계를 상당히 긴장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정부의 검열과 통제가 심해지면서 사회 비판이나 정치성을 띤 영화는 감소하였고, 대신 유흥 업계의 여성들을 다룬 이장호(李長鎬, 1945∼ )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이나 김호선(金鎬善, 1941∼ )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 등이 인기를 누렸다.

확대보기
선거 벽보
선거 벽보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선거 벽보
선거 벽보
팝업창 닫기

이 무렵의 영화 포스터는 수평이나 수직으로 긴 형태를 선호하였는데, 아마도 전봇대를 비롯한 거리의 건물에 부착하기가 쉬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315)문혜영, 「1950∼1960년대 한국 영화 포스터 연구」, 홍익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6, 36∼37쪽. 전단지나 포스터는 사람들이 직접 붙이고 다녔고, 때로는 광고판을 몸에 매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는 표준적 형태로 바뀌게 된다.

영화 포스터 이외에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시각 매체는 정치 전단(傳單)이나 벽보(壁報), 현수막(懸垂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주 속에서 진행된 1950년대의 선거에는 이러한 선전물이 거리에 난무하였는데, 시각적인 디자인을 고려하기보다는 후보자의 사진이 절반 정도 차지하는 벽보 형태가 가장 많았다. 하지만 가장 저렴하면서도 군중의 시선을 쉽게 끌 수 있었던 벽보나 현수막은 시각 이미지를 배제한 간단한 문자 구호였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民主黨)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구호로 내세웠고, 여당인 자유당(自由黨)에서도 “갈아봐야 별수 없다”라는 구호로 반박하는 현수막을 내세워 유권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확대보기
세종로의 애국 선현 동상
세종로의 애국 선현 동상
팝업창 닫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공공 공간을 차지한 또 다른 시각 이미지로는 기념비(紀念碑)나 공공 조형물(公共造形物)을 들 수 있다. 공공 조형물이란 원래 공동체 구성원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에, 공동체 스스로 만들어 소유하는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인물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통해 그 공동체의 믿음과 열망과 가치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과거를 기억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세운 공공 조형물은 서양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국가주의(國家主義)가 득세한 19세기 유럽에서 대거 건립하였다. 이처럼 공공 기관(정부)의 주도로 건립된 조형물이나 모뉴멘트(Monument)는 자연히 도시 군중의 시선을 끌게 되었고, 그 결과 도시인들은 통일된 정체성과 가치관을 공유하게 된다.

확대보기
이승만 대통령 동상
이승만 대통령 동상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이승만 대통령 동상
이승만 대통령 동상
팝업창 닫기

우리나라에서 조형물과 기념물 건립이 붐을 이룬 것은 6·25 전쟁 직후인 1950년대와 군사 정부가 들어선 1960년대였다. 종전 이후 반공정신(反共精神)과 애국심을 강조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세운 조형물은 주로 전쟁 충혼비(忠魂碑)나 과거 위인이나 장군의 상이었다. 당시의 기념물이 대체로 상투적인 영웅 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사실이거니와 그것이 정말 도시인이 사랑하고 기억할 만한 기념물이었는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예술을 직업으로 삼아 어렵게 생활하던 당시 조각가들에게 이러한 조형물 제작은 미약하나마 경제적인 혜택을 가져다 준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316)김영나, 『20세기의 한국 미술』, 예경, 1998, 197쪽.

공공 조각은 권력의 정치성을 띤 경우가 많았다. 1956년에 자유당 정 부는 일제 강점기에 세운 남산 신궁(南山神宮)을 헐고 그 자리에 윤효중이 제작한 한복 두루마리를 입은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세웠고, 3·1 운동 당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던 탑골 공원에는 문정화(文貞化, ?∼2003)가 제작한 양복 입은 동상을 건립하였다.317)조은정, 「이승만 동상 연구」, 『한국 근대 미술 사학』 14, 한국 근대 미술 사학회, 2005, 75∼113쪽. 하지만 권위와 불멸성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통치자의 동상은 권력을 잃고 나면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자명한 이치였다. 4·19 혁명이 나고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남산의 동상은 서울시가 그리고 탑골 공원의 동상은 4·19 혁명 때 학생이 철거하였다.

확대보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건립 기공식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건립 기공식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제막식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제막식
팝업창 닫기

우리나라 공공 조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광화문 네거리에 우뚝 세운 ‘이순신 장군 동상’일 것이다. 이순신 장군상은 1966년에 애국선열 조상 건립 위원회(愛國先烈彫像建立委員會)가 구성되어 “우리 민족사상 불멸의 공적을 남긴 위인 및 열사들의 조상을 건립함으로써 그 정신을 길이 선양케 하여 민족의 귀감(龜鑑)을 삼고자” 각계각층의 의견을 들어 선정한 위인 10 명의 조각을 세우는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었다. 김세중(金世中, 1928∼1986)이 조각해 1968년에 완성한 이순신 장군상은 높이 6.4m, 기단부 높이까지 합하면 전체 18m에 달하는,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동상이었다. 경복궁을 배경으로 정부 청사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대한민국의 심장부 세종로에 이렇게 갑옷을 입은 장군상을 세운 것은 군인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는 개인적 의미를 넘어 당시 군사 정부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한때 고증의 문제와 더불어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결국 그대로 남게 된 이 동상은 위용과 자태에서 명실 공히 민족 최고의 영웅상으로 인식되고 있다.318)김영나, 「한국 조각계의 거목 김세중」, 『조각가 김세중』, 현암사, 2006, 15∼36쪽.

확대보기
여의도 광장
여의도 광장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여의도 공원
여의도 공원
팝업창 닫기

조형물을 설치하지는 않았으나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기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공간은 5·16 광장이었다. 광장이란 원래 군중이 존재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1972년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만든 5·16 광장은 군사 정권의 정치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었다. 국군의 날이면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천 명의 군인이 최신 무기를 선보이면서 화려한 퍼레이드를 벌이고 대통령 선거 때 유세가 열리면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던 여의도 광장은 거의 구소련의 붉은 광장이나 북한의 김일성 광장을 연상케 하는 규모였다.

10·26 사태 이후 전두환 대통령의 신군부 정권이 들어서자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을 신호탄으로 서울의 일상은 군부 정권에 반대하는 데 모와 시위대, 그리고 이들에게 맞서는 전경과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으로 얼룩졌다. 1980년대의 공공 미술은 이제 공공 기관보다는 정치적 미술 운동을 벌이던 운동권 미술가들에 의해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민중 미술가들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모더니즘 미술에 근거한 현대 미술이 관람자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었음을 비판하면서 삶과 현실에 좀 더 밀착한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민중이 이해할 수 있고, 현실 세계를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미술을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독창성이나 아우라(Aura)가 중요시되는 이젤 회화보다는 벽화나 걸개그림을 공동으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그린 걸개그림은 대학가나 대학로에서 열리던 정치 집회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일반인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걸개그림은 연세 대학교 집회에서 처음 사용된 ‘이한열 열사(李韓烈烈士)’의 모습으로, 친구의 팔에 안겨 쓰러진 그의 모습은 이 시대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항쟁과 희생의 의미로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정부 주도의 공공 조각 일색에서 탈피하여 민간인들이 세운 건물의 내부나 외부에까지 미술품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유럽과 미국의 예를 따라 공공 건축물에 들어가는 건축비의 1%를 조각, 회화 등의 미술품에 투자해야 한다는 ‘문화 예술 진흥법(文化藝術振興法)’이 신설된 1982년 이후부터였다. 여러 차례의 제도적 보완과 변경이 있었지만, 이 법은 신축 또는 증축하는 건축물 가운데 연면적이 1만㎡ 이상인 공공건물에 건축 비용의 1%에 해당되는 미술 작품을 설치하도록 명시하였다.

이 제도는 도시의 미적 환경 조성뿐 아니라 시민들이 미술에 익숙해지게 하고 미술가들에게도 혜택을 주기 위해 마련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施行錯誤)를 겪었고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기도 하다. 그 중 하나는 작품과 관람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냐 하는 것이다. 미술관에 미술 작품을 전시할 때는 관람자가 어느 정도 미술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공공 공간에 놓인 미술 작품은 미술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없을 수도, 심지어 적대적일 수도 있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과 마주치게 되기 때문이다.

확대보기
프랭크 스텔라의 꽃이 피는 구조물, 아마벨을 기억하며
프랭크 스텔라의 꽃이 피는 구조물, 아마벨을 기억하며
팝업창 닫기

이러한 문제가 불거진 유명한 예가 바로 1997년 강남의 포스코 건물 앞에 설치한 미국 미술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의 ‘꽃피는 구조, 아마벨을 기억하며’(1997)이다. 가로 11m, 세로 5m, 높이 11m인 이 조각품은 스테인리스 스틸 주조에 각종 기계 부품과 폐품 조각을 용접한 작품이다. 포항 제철은 당시 180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하여 최첨단 기법으로 건축한 자사 사옥(社屋) 앞에 세웠다. 이 작품이 논란에 휩쓸리게 된 것은 1998년에 ‘아마벨’을 예로 들어 해외 미술품을 지나치게 비싼 가격으로 구입하였다는 언론의 보도가 나오면서부터였다. 1997년 국제 통화 기금(IMF) 외환 위기 사태와 연관되어 과소비에 대한 비난 여론과 함께 불거진 이 소동은 곧바로 시민들 사이에 찬반양론(贊反兩論)으로 퍼져 나갔다. 반대 의견은 고철덩이가 흉물스럽다에서부터 작품이 추상적이고 난해하며 우리의 정서와 맞지 않는다, ‘아마벨’이라는 제목이 과연 포항 제철의 이미지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등이었다. 이에 대해 추상적이고 난해하다는 이 유만으로 배척하는 것은 후진적이며, 시간이 지나면 이해될 것이라는 의견에서부터, 오히려 유리와 철조로 지은 포스코 건축과 조화를 이룬다는 의견도 나왔다.319)성완경, 「한국 공공 미술의 허상과 위기, ‘아마벨’ 사건의 역설적 교훈」, 『디자인 문화 비평』 1, 안그라픽스, 1999, 34∼51쪽. 여러 가지 대안이 나왔으나 결국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아직도 원래의 위치에 놓여 있으며 그러는 사이에 논란은 어느덧 잠잠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공공 미술은 누가, 누구를 위해 제작하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부터, 공공의 권리와 작가의 책임, 그리고 미술과 대중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논의가 필요함을 인식하게 한다. 미국에서는 현대의 공공 미술이 전통적인 공공 미술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는 인식에서 ‘공공의 공간에서의 미술’ 또는 ‘새로운 공공 미술’이라는 용어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320)Mapping the Terrain, New Genre Public Art, Edited by Suzanne Lacy, Bay Press : Seattle, Washington, 1995. 확실한 것은 공공의 영역에 놓이는 미술 작품이 더 이상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고고하게 독백하기보다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다양하고 폭 넓은 관람자의 삶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대화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