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를 내면서
  • 식민지 조선의 근대 관광
조성운

관광의 탄생은 하나의 시선의 탄생이라고 한다. 이 말은 여행(Travel)과 관광(Tourism)의 의미의 차이를 설명해 준다. 여행은 여행자가 알지 못하는 미지(未知)의 세계에 대한 탐험이며 도전이지만 관광은 관광자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를 관광자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시선에는 관광자의 관점이 반영된다.

관광이 기본적으로 근대의 산물임은 틀림없다. 근대 관광이 탄생한 유럽에서도 ‘관광(Tour)’이라는 용어는 18세기에 들어서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그 의미도 오늘날과 달리 단순히 여행을 뜻하였다고 한다. ‘관광객(Tourist)’이라는 용어 역시 18세기 후반에 여행객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관광이라는 개념은 19세기가 되어서야 탄생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관광’은 19세기 이후 인간의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관광의 다양한 측면을 포괄하는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이는 관광이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탄생한 근대적 의미의 ‘관광’은 토머스 쿡(Thomas Cook)이 1841년 7월 5일 570명의 관광객을 모집하여 영국의 레스터(Leicester)에서 러프버러(Loughborough)까지 실시한 기차 여행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금주 운동(禁酒運動)의 일환으로 시행한 이 여행은 대중들의 폭발적인 지지와 참여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산업 혁명(産業革命) 이후 성장하기 시작한 시민-중산층의 등장과 철도(鐵道)라는 대규모 운송 수단의 발달 때문에 가능하였다. 즉 여행을 할 수 있는 계층의 탄생과 철도의 발달은 관광이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쿡은 몇 차례의 여행을 더 조직한 후 1845년 토머스 쿡 앤 선(Thomas Cook and Son)이라는 세계 최초의 여행사(旅行社)를 설립하였고,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다른 여행사가 설립되면서 여행은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근대 관광의 발달은 전근대의 여행과는 달리 대규모의 관광객을 좀 더 빨리, 좀 더 편안하게 이동시키기 위한 교통 시설의 발달과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시민 계급의 탄생을 전제 조건(前提條件)으로 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도 이러한 조건이 만족되지 않으면 근대 관광은 성립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조선의 근대 관광에서는 이 두 개의 조건 중 시민 계급이 탄생했는가 하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

한편 여행의 대중화는 식민지와 피식민지의 차별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토머스 쿡 앤 선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유럽 사회에서 광풍(狂風)처럼 유행하던 박람회(博覽會)와 해외 식민지 관광에 기인한 바가 컸다. 박람회가 ‘문명’과 ‘야만’이라는 시각으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벤트로서 제국주의적 성격을 갖는다면, 관광은 관광객-제국주의 국가의 국민들에게 ‘문명’화된 시선으로 ‘야만’ 사회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제국주의적 시선을 더욱 강화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근대 관광은 제국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일본의 근대 관광 역시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은 아시아 국가이면서 후발 제국주의 국가라는 측면에서 영국을 비롯한 선발 제국주의 국가와는 출발점이 달랐다. 바로 여기에서 일본과 서구의 근대 관광의 차별성이 기인(起因)한다. 즉 일본은 서구 제국에게는 ‘보여지는’ 주체이며, 동시에 아시아 국가에게는 ‘보는’ 주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 근대 관광이 발달하기 시작한 때는 일본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의 승리를 통해 제국주의로 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해외 전적지 탐방(海外戰跡地探訪)을 통해 제국 일본의 강력함을 확인하는 한편,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의 전적지 관광을 중심으로 조선과 만주에 관광단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반식민지(半植民地)였던 조선과 조선인은 일제의 ‘문명’화된 시선에 의해 ‘보여지는’ 대상임과 동시에 일본을 관광할 때는 일본의 근대 문물을 보고 감탄하는 대상이었다. 결국 조선은 관광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의 처지는 일제에 의해 규정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제는 20세기 초 해외 관광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이렇게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분명히 하였고, 조선의 근대 관광은 출발부터 식민지성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근대 관광이 탄생한 배경이 이와 같다면 이 시기 조선 국내의 관광은 어떠하였을까? 1910년대 초반의 국내 관광단이 방문한 지역이나 시설은 대부분 일제가 근대 도시로 건설하거나 일제에 의해 근대 시설이 조성된 지역이나 근대 시설이 중심이었다. 이렇게 보면 이 시기 국내 관광단의 방문지의 특징은 일본 시찰단의 방문지가 갖는 특징과 사실상 일치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일제 강점기 조선의 근대 관광은 식민지성을 가지고 탄생하였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의도는 이 시기에 발행된 관광 안내서, 엽서, 활동사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정보 위원회(朝鮮情報委員會)의 설치와 활동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는 3·1 운동 이후 문화 정책을 채택하면서 일본 시찰을 문화 정책의 주요 시책 가운데 하나로 이용하였다. 이것은 관광을 식민지 지배 정책에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소야마 타케시(曾山毅)는 근대 관광의 발달 조건으로 철도의 건설, 관광객 유치 체제의 정비와 함께 ‘근대’가 동시에 도입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근대 관광의 발달이 제국주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밝혔다. 여기에서 그는 제국주의에 의해 이식되었건 아니건 ‘근대’의 도입이 근대 관광이 탄생에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근대’의 도입이 제국주의의 지배 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을 간과하거나 경시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배 정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식민지 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제에 의해 이식(移植)된 조선의 ‘근대’에 탄생한 ‘관광’은 제국주의 침략 정책의 산물이라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한편 조선 철도는 일제의 대륙 진출의 수단으로서 뿐 아니라 일제의 ‘환상(幻想)의 시선(視線)’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11년 압록강 철교의 개통은 일제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총독부 철도국은 1913년 부산(釜山)-창춘(長春) 간의 급행열차를 1주에 3회씩 운행하기 시작하였으며, 경의선에 야간열차도 창설하여 경부선(京釜線) 및 안봉선(安奉線)의 주간 급행열차와 연결하여 유럽과의 연결을 원활히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인지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는 1913년 『조선 급 만주(朝鮮及滿洲)』에 ‘구아 연락 최첩 교통선(歐亞連絡最捷交通線)’이라는 제목의 광고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 또한 일본 내에서는 1906년 만한 순유단(滿韓巡遊團) 이래 일본-조선-만주를 잇는 관광이 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20년대 이후에는 금강산 전기 철도와 같이 관광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한 철도가 부설되고 있다. 그것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시행 예정이던 금강산 국립공원화(國立公 園化) 계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록 중일 전쟁의 발발로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였으나 조선 총독부는 국립공원법의 제정을 통해 관광 산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일제는 1904년 러일 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 근대적인 의미의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904년 일제는 도로 건설을 위한 기초 조사를 수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부터 도로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1910년 조선 강점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도로를 건설하였다. 그 결과 일제 강점기 건설된 도로의 52.14%가 1910년대에 건설되어 식민지 조선의 근대 도로의 기본축이 마련되었다.

이 밖에도 자동차와 배를 이용한 관광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부관 여락선(釜關連絡船)에 의해 일본이 대륙과 연결되었다는 점과 근거리 운송 수단으로서의 자동차는 관광용으로도 이용되어 관광버스와 관광택시가 운행될 정도였다는 점을 부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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