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1장 근대 여행의 시작과 여행자
  • 2. 개항 전후의 여행자
황민호

개항(開港)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여행과 관련한 기록은 주로 당시에 발행된 잡지나 신문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국외 여행을 한 이들은 외교관, 고관, 왕족이었으며, 민영익(閔泳翊)·박정양(朴定陽)·민영환(閔泳煥)·유길준·윤치호(尹致昊)·박영효(朴泳孝)·영친왕(英親王)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1883년(고종 20) 7월 미국 측의 공사 파견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전권 대사로 하는 보빙사절단(報聘使節團)이 미국에 파견되었다. 사절단은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으며,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들은 미국 횡단 기차 편으로 12일에 시카고에 도착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9월 18일 뉴욕의 한 호텔에서 미국 대통령 아서(Chester Alan Arthur)와 접견(接見)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사절단은 민영익의 지시에 따라 이마가 땅에 닿도록 서서히 몸을 굽히며 큰절을 하였으며, 이는 미국 언론에 사진과 함께 소개되기도 하였다.14)김한종 외,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금성출판사, 2006.

1887년(고종 24)에는 주미 전권 공사 박정양이 관원들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때 방문단에 참가하였던 이상재(李商在)는 후일 회고담을 남겼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미국인들 가운데 시골 사람은 공사(公使) 일행을 여자로 대접하기도 하였는 데, 미국 여자들이 실내에서도 모자(帽子)를 쓰고 있는 것처럼 공사 일행도 갓을 쓰고 있었고, 공사 일행의 의복도 울긋불긋한 비단옷으로 여자의 옷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 일행 중에는 수염 많은 사람이 없었는데, 있다 해도 미국 여자의 수염만도 못하였기 때문에 미국인들로서는 여자로 착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시 청나라 공사는 조선을 속방(屬邦)으로 생각하여 박정양이 미국 국무성과 단독으로 접촉하여 외교 문제를 협의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고 하며, 조선에서 파견된 통역관이 외아문(外衙門)에서 불과 1년 정도 영어 공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미국 관리와의 회담은 미국의 반벙어리와 조선의 반벙어리가 이야기하는 우스운 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5)이상재(李商在), 「상투에 갓 쓰고 미국(米國)에 공사(公使)갓든 이약이, 벙어리 외교(外交), 그레도 평판(評判)은 조왓다」, 『별건곤』 창간호, 1926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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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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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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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은 1896년(건양 1)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되어 인천 → 상하이(上海) → 나가사키(長崎) → 도쿄(東京) → 캐나다 → 뉴욕 → 런던 → 모스코바 → 시베리아를 여행하여 해외에 파견한 사절 중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기록을 남겼다.16)『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자. 개항 이후 일제 강점기까지의 여행자와 여행 형태에 대한 서술은 한경수, 「한국의 근대 전환기 관광(1880∼1940)」, 『관광학 연구』 51, 한국 관광학회, 2005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여행기 『해천추범(海天秋帆)』에서 캐나다 밴쿠버 호텔에서 처음 타 본 엘리베이터에 대한 경험에 대해 “호텔은 5층 높이 넓게 트인 집인데 오르고 내리기가 쉽지 않은 것을 헤아려 아래층에 한 칸의 집을 마련하여 전기로 마음대로 오르내리니 기막힌 생각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르샤바에서는 “이곳은 옛날에 가장 개화한 자주국이었는데 백여 년 전 정치가 점차 쇠약해지고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능멸하고 학대하여 내란이 일어나도 다스릴 수 없었다. 결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세 나라가 그 땅을 나누었으니 나라를 도모하는 자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폴란드의 현실을 개탄하기도 하였다.17)민영환, 조재곤 편역, 『해천추범(海天秋帆)』, 책과 함께,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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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만국 박람회의 한국관
파리 만국 박람회의 한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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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1898년(광무 2) 영친왕이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였고 1900년(광무 4)에는 학부 협판(學部協辦) 민영찬(閔泳瓚)이 파리 만국 박람회에 참석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박치수(朴致秀)라는 사람이 미국 유학을 떠났다는 신문 기사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해외 유학도 시작되었다. 1897년(광무 1)에 일본 유학생은 77명이었으며, 1902년(광무 6)에는 미국에 유학하는 학생이 뉴욕에 5명, 로스앤젤레스에 8명, 기타 지역에 10명, 오하요 대학에 부인 1명이라는 언론의 보도가 있다. 그뿐 아니라 당시의 신문에서는 추업부(醜業婦)와 무뢰한(無賴漢)의 외국 여행을 제한하기 위해 빙표(憑標, 여행 허가증) 발급 심사를 강화한다는 기사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당시 여행자들의 교통편은 국제 선박의 경우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 1848∼ 1901 : 한국명 목인덕(穆麟德)) 부부가 1882년에 유럽 → 수에즈 운하 → 싱가포르 → 홍콩 → 상하이 → 제물포 구간을 왕래하는 선박을 이용하여 국내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1904년(광무 8)에는 마이어 주식회사(E. Meyer & Co., 세창 양행) 소속의 함브르크 아메리카 라인(Hamburg Amerika Linie)의 레이멘호(S.S Lyeemoon號) 등이 제물포에서 상하이로 가는 여객을 모집하는 광고를 내기도 하였다. 또 국제 우편선은 N.D.L(Norddeutscher Lloyd Imperial German Mail Line)이 2주에 한 번씩 함부르크 → 사우스햄튼 → 나폴리 → 수에즈 → 콜롬보 → 페낭 → 싱가포르 → 홍콩 → 상하이 → 나가사키 → 고베 → 요코하마를 왕복하고 있었다. 이 밖에 제물포에는 러시아(보스톡, 콜쓰), 독일(덧란), 일본(尾張, 筑後川, 肥後) 등의 선박이 운항하고 있었다.18)한경수, 앞의 글, 2005, 448∼44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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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여권
대한제국 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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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부관 연락선(釜關連絡船)의 취항으로 일본과 국내의 교통망이 형성되자 일본을 내왕하기 편리해지기는 하였지만, 대체로 조선을 찾아오는 일본인 여행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실제로 1905년에 4만 2460명이었던 재조(在朝) 일본인의 수는 1910년 말에는 17만 1543명으로 증가 하였으며, 연평균 2만 2000명 정도가 조선을 방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1915년 말에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약 4,100명이었으나 1916년 말에 약 5,650명인 것을 보면 1년 사이에 새로 도항(渡航)한 사람이 1,500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조선인의 일본으로의 이주가 상대적으로 극히 미약한 수준이었다.19)朝鮮總督府, 『朝鮮彙報』 1917年 8月, 34쪽. 부산에서 고베를 오가는 부관 연락선으로는 이키마루(壹岐丸, 1,680톤), 쓰시마마루(對馬丸, 1,679톤), 고라이마루(高麗丸, 3,029톤), 시라기마루(新羅丸, 3,021톤), 하쿠아이마루(博愛丸, 2,632톤) 등 다섯 척이 교대로 운항되고 있었다.20)윤소영, 「러일 전쟁 전후 일본인의 조선 여행 기록물에 보이는 조선 인식」, 『한국 민족 운동사 연구』 51, 한국 민족 운동사 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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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잔교
부산항 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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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은 주로 철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국내의 철도는 1899년(광무 3)에 제물포와 노량진을 구간으로 하는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하지만 초기에는 하루 승객의 수가 400명이었고 화물은 14∼15톤 정도가 운송되었으며, 하루 네 차례만 왕복 운행될 정도로 이용이 저조하였다.21)『황성신문(皇城新聞)』 1989년 12월 23일자. 이후 국내의 철도는 일제의 군사적 목적에 의해 확장되었지만 가장 대중적인 여행 수단의 하나로 정착되어 갔다.22)일제는 1901년 경부선 철도 주식회사를 발족한 이래 러일 전쟁 직전인 1903년 12월 28일에는 칙령(勅令) 제291호를 통해 이 철도의 완공을 독려할 정도로 철도 부설에 열을 올렸으며, 1906년 3월에는 국내 철도의 국유화를 추진하는 등 만주와 러시아를 연결하려는 군사적 목적에 따라 철도망 확장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서기재, 「일본 근대 여행 관련 미디어와 식민지 조선」, 『일본 문화 연구』 14, 동아시아 일본 학회, 2005).

유럽에서 철도를 이용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던 인물로는 스코틀랜드 왕립 지리학회 회원이자 화가인 켐프(Emily Georgiana Kemp)가 있다. 그녀는 1910년 2월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 편으로 만주를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의 여행기에서는 “국제 조류의 기회를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쇄국의 길을 선택하였던 한국인들은 너무나 쓴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하거나 “한국인들이 최근에 겪은 가장 슬픈 손실의 하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공작(公爵)을 잃은 것”이라고 하여 한국 문제에 대해 이중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켐프는 금강산 관광 도중에는 ‘무례한 일본 군인’들로부터 당한 감시와 수모에 대해 대단히 불쾌한 어조로 기록하고 있다.23)E. G. 켐프, 신복룡 역주, 『조선의 모습』, 집문당, 1999. 켐프는 국내에서 서울, 평양, 부산, 금강산 등지를 여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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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마루
이키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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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최남선(崔南善)이 1909년(융희 3) 『소년(少年)』에 발표한 기행문 ‘교남홍과(嶠南鴻瓜)’와 ‘평양행(平壤行)’에서 최초로 철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교남홍과’는 남대문역을 출발한 다음 구포역(龜浦驛)에서 하차하여 동래(東萊)로 들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평양행’은 남대문역에서 신의주행 기차를 타고 평양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평양행’은 평양에 도착하기까지 기차가 거쳐 가는 역의 이름, 역의 소재지, 철교의 이름과 길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마치 철도 여행 안내서를 방불케 하는 초기 여행기로서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24)우미영, 「시각장(時角場)의 변화와 근대적 심상(心象) 공간(空間)」, 『어문 연구』 124, 한국 어문 교육 연구회, 2004, 332∼333쪽. 1918년 11월 『반도 시론(半島時論)』에 게재된 ‘인천 여행(仁川旅行)’에서는 차창으로 보이는 경치가 마치 “추강산(秋江山)을 모사(模寫)한 활동사진(活動寫眞)과 같았으며 기차는 노량, 영등포, 오류동(梧柳洞), 소사, 부평, 주안(朱安)을 유시(流矢)와 같이 통과(通過)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25)일기자(一記者), 「인천 여행기(仁川旅行記)」, 『반도 시론』 제2권 제11호, 1918년 11월 10일. 개인의 국내 여행을 기록한 경우로는 전라북도 관찰사 이완용(李完用)이 정읍·순창 등을 유람하면서 낭비와 행패가 극심하였다는 신문 보도가 있다.26)『황성신문』 1989년 11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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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개통 당시 서대문역
경인선 개통 당시 서대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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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외국인들의 여행기에도 우리나라 사람의 관광 유형이 소개되어 있다.27)한경수, 「개화기 서구인의 조선 여행」, 『관광학 연구』 26, 한국 관광학회, 2002. 일본과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방문한 바 있던 그리피스(William Eliot Griffis, 1843∼1928)는 그의 여행기에서 “점잖은 옷을 입은 성지 순례자(聖地巡禮者)들은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찾아 여행을 하는데 남자들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빌고 여인들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으며, 명승지에는 술 마시고 시를 짓고 경치를 구경하려는 사람인 묵객(墨客)들이 모여 든다.”고 하였다.28)W. E. 그리피스, 신복룡 역주, 『은자의 나라 한국』, 집문당, 1999, 369∼370쪽. 비숍(Isabella Brid Bishop, 1831∼1904)은 “금강산을 방문하는 여행 자는 명성을 얻기 때문에 서울에 사는 많은 젊은이가 금강산 여행을 선망하고 있으며, 금강산은 조선에서 너무나 유명하여 그 그림 같은 아름다움은 조선의 시인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하였다.29)B. 비숍, 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2000, 139쪽.

한편 근대 문물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여행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키고자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저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행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음은 가리지 못할 사실(事實)이니 “미친놈이나 금강산(金剛山) 드러간다”, “팔도강산(八道江山) 다 돌아다니고 미친놈일세”, “자식(子息)을 글을 가르치고 싶어도 구경(求景) 다니는 꼴 보기 싫어 그만 두겠다” 하는 말은 다 이 경향(傾向)을 언명한 것이라. 대저 고대(古代) 태동사상(泰東史上)에 웅비활약(雄飛活躍)한 아 대한인(我大韓人)이 금(今)에 아무리 일시(一時)라도 굴칩(屈蟄)된 것은 전에 왕성한 여행성(旅行誠)이 금에 쇠강(衰降)한 까닭에 말미암음 또한 많은 것을 나는 말하려 하노이다. 보시오 고대엔 우리 민족이 흥국민(興國民)이 아니오니까…… 오늘날에 이르러 왜 이렇게 나약(懶弱)하여졌습니까 왜 이렇게 원기(元氣) 쇄침(鎖沉)하여졌습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여행성(旅行誠)이 감퇴(減退)하여 모험(冒險)과 경난(經難)을 싫어하는 까닭이 아니오니까 …… 바라노니 소년이여 울적한 일이 있을 리도 없거니와 있으면 여행(旅行)으로 풀고 환희(歡喜)할 일이 있으면 여행으로 늘리고 더욱 공부의 여가로서 여행에 허비하기를 마음에 두시오. 이는 여러분에게 진정한 지식(智識)을 줄 뿐 아니라 온갖 보배로운 것을 다 드리리이다.30)최남선(崔南善), 「쾌소년세계일주시보(快少年世界一周時報)」, 『소년(少年)』 제1권 1호, 신문관(新文館), 1908.

이 글은 1908년 국내에서 발간되던 잡지 『소년』에 게재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필자는 세계의 실상(實狀)을 시찰하여 지견(知見)과 안목(眼目)을 넓히고자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나는 최건일(崔健一)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여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고대에는 우리 민족이 흥 국민(興國民)이었으나 오늘날 ‘나약’하게 된 것은 여행을 싫어하기 시작한 것에 원인이 있음을 강조하는 한편,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행을 장려하는 ‘여행성’을 왕성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진정한 지식과 온갖 보배로운 것을 다 주는 여행을 우리나라의 소년들에게만이라도 권장하기를 바란다고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서우(西友)』에서는 동서고금의 명가(名家)와 호족(豪族)의 가헌(家憲)을 참고하여 일본의 시부사와가(澁澤家)에서 제정한 가훈(家訓) 가운데 여행의 중요성과 관련된 부분을 소개하고 있다. 곧 “남자(男子) 30세(十三歲) 이상(以上)에 지(至)면 학교(學校) 휴학중(休學中)에 행장(行狀)을 정(正)히 야 사우(師友)와 동(同)히 각지(各地)를 여행(旅行)케 함이 가(可)함”31)「일본(日本) 삽택가(澁澤家)의 가훈(家訓)」, 『서우(西友)』 제11호, 1907년 10월 1일.이라고 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또 1909년 7월에 발행된 『대한 흥학보(大韓興學報)』에서는 결혼하는 딸에게 역사서, 지리서, 전기(傳記) 등과 함께 여행기(旅行記)를 읽을 것을 강조하였다는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의 이야기를 소개하기도 하였다.32)산인, 「결혼(結婚) 낭자(娘子)의게 연(與) 서(書)(譯(역))」, 『대한 흥학보(大韓興學報)』 5, 1909년 7월 20일. 이 밖에 이 잡지에서는 동양의 선진국이며, 세계의 일등 국민인 일본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서양 여행 안내서와 『서양국진(西洋國盡)』·『서양 사정(西洋事情)』 등을 출간하였는데, 『서양 사정』은 25만여 부가 발행될 정도로 일반 국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이에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유길준이 집필한 『서유견문록(西遊見聞錄)』이 유지인사(有志人士)들이 일독(一讀)할 만한 가치가 확연하나 이 책의 출간에 대해 환영은 고사하고 심지어 배척할 정도로 정반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33)편집인(編輯人), 「일본(日本) 교육계(敎育界) 사상(思想)의 특점(特點)」, 『대한 흥학보』 13, 1910년 5월 20일.

이처럼 여행의 중요성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강조되는 가운데 1910년대에 이르면 해외로 나가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여행이라기보다는 연해주(沿海州), 하와이 등에 이주를 목적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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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견문』
『서유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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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1910)도 외국 여행자에 대한 여권 발급 상황 및 그들의 여행 목적(旅行目的)을 보면 유학 1명 상용(商用) 318명 농어업(農漁業) 116명 직공(職工) 4명 출가(出嫁) 2,400명 유력(遊歷) 2명 기타 73명 계 2,914명이고 향지국(向地國)은 러시아 2,804명 청국(淸國) 94명 미국(美國) 14명 도이치 프랑스가 각 1명이다.

금년(1917)도 외국(外國) 여행자(旅行者) 여권(旅券) 교부(交付) 건수(件數)를 국별(國別)로 보면 다음과 같다. 노서아(露西亞, 러시아) 6,435, 중국(中國) 68, 구라파(歐羅巴) 9, 미국(美國) 19, 가나다(加奈陀, 캐나다) 3, 비율빈(比律賓, 필리핀) 10, 향항(香港, 홍콩) 14, 불령 교지지나(佛領交趾支那, 코친차이나) 45, 인도(印度) 2, 포왜(布哇, 하와이) 131, 영령 마래 반도(英領馬來半島, 말레이 반도) 36, 난령 인도(蘭領印度) 29, 호주(濠洲) 1, 섬라(暹羅, 타이) 32, 면전(緬甸, 미얀마) 1, 합계(合計) 6,835.34)『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0年度 第76·77表,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7年度 第45表. 국사 편찬 위원회 역사 통합 정보 자료에서 인용하였으며, 조선 총독부가 재조 일본인에게 여권을 발행한 경우가 함께 포함되어 있는지는 구분되어 있지 않다.

앞의 내용은 1910년과 1917년 총독부가 발급한 외국 여행자에 대한 여 권 발급 현황에 관한 자료인데, 이를 통해서 보면 러시아, 중국, 미국, 하와이(布哇) 등지에 유학, 사진결혼(出嫁), 농어업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출국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비해 러시아 지역으로의 이주나 이동이 많은데, 이는 한일 병합(韓日倂合) 이후의 정치적 망명이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연해주 지역으로 떠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915년의 통계에서는 “금년에 교부(交付)된 해외 여권 수(海外旅券數)는 4,519건이며 도항자(渡航者)는 5,373인인데 그 중에 98%가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 방면(方面) 출국(出國)이다.”라는 기록도 있다.35)『朝鮮總督府官報』 1915년 4월 21일자.

따라서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개항 이후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해 지면서 해외여행이나 기차를 이용한 국내 여행이 늘어나는 추세였으며, 금강산 등의 명산대찰을 여행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여행 유형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행의 중요성이나 유익함을 강조하는 지식인들의 사회적 분위기도 확산되어 갔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해외여행은 일부 관료의 공무 수행이나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여행이 일반적 현상이었으며, 국내 여행도 활발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한일 병합 직후에도 여전히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1910년대에는 활발한 국외 여행이나 관광이 이루질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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