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2장 상상의 틀, 여행의 수단
  • 1. 철도의 등장과 관광으로서의 여행
  • 철도 여행의 첫 인상
성주현

‘여행은 고속 철도로’ 철도나 지하철의 역을 지나치다 보면 만나는 문구이다. 고속 철도(KTX)가 등장하기 전에도 철도는 여행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고속 철도가 등장하면서 철도 여행은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이는 철도가 갖는 시공간(時空間)의 매력이 더 가까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빠른 이동 시간과 쾌적한 공간, 그리고 여행에 대한 기대감 등등. 이는 곧 관광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여행은 장사를 하기 위한 것이든지 종교 순례를 위한 것이든지 간에 예나 지금이나 늘 있어 왔다. 그렇지만 근대적 의미에서의 관광은 철도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띄게 되었다. 철도가 등장하기 이전의 관광은 대부분 말이나 마차를 이용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도보로 하였다. 도보로는 하루에 대략 30∼40㎞ 정도를 여행할 수 있었고, 말이나 마차를 타고서는 대략 200㎞ 정도를 여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조선시대에 말이나 가마를 이용한 사대부들의 금강산 관광은 서울에서 금강산까지 약 1주일 정도 소요되었다. 이와 같이 여유 와 시공간의 개념이 적었던 근대 이전의 관광은 철도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변모하였다.

1825년에 등장한 철도는 산업뿐만 아니라 관광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철도의 등장 이전까지 관광은 번잡한 세속을 떠나 내적 수양을 찾아 떠나는 수행자나 심신을 가꾸기 위해 금강산 등 명승지로 떠나는 사대부 같은 일부 계층의 몫이었다. 그러나 근대의 산물인 기차가 나타나면서 관광은 점차 대중화되었고, 단체화·상업화되면서 시공간에 얽매이게 되었다.76)부산 근대 역사관, 『근대, 관광을 시작하다』, 2007, 186∼189쪽. 그뿐 아니라 철도를 통한 관광이 등장하면서, 철도는 여행의 본질을 바꾸어 놓기도 하였다.

확대보기
한국 고속 철도(KTX)
한국 고속 철도(KTX)
팝업창 닫기

철도가 등장한 초기에는 운송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교통 기관은 어느 것이나 우선 운반 용구가 있어야 하고 그 용구를 운반할 동력(動力)이 있어야 하며, 통로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운반구·동력·통로를 합쳐서 교통 기관의 3요소라 한다. 철도도 교통 기관의 일종으로, 육상 운송의 대표적인 수송 수단이다. 다른 교통 기관과 근본 요소는 같지만 철도는 통로가 자유로운 통행에 제한을 받는 철의 궤조(軌條, 레일로 된 선로)로 되어 있다. 그 레일 위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특수한 차량과 동력으로 구성된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철도 선로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철도’, 중국에서는 ‘철로(鐵路)’, 영국에서는 ‘레일웨이(railway)’, 독일에서는 ‘아이젠반(Eisenbahn)’, 프랑스에서는 ‘슈맹 드 페르(chemin de fer)’ 등으로 불리고 있듯이, 그 어원이 ‘철 의 길’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철도의 현대적 의미는 단순히 ‘철로 만든 길’이 아니라 차량을 운전하여 여객과 화물을 수송하고 그에 따르는 조직·관리·영업을 계속하는 기업체로서 해석해야 한다. 단순한 철길은 철도 이전부터 광산 지대 등에서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사용되어 왔으나, 그것은 제한된 지역 내에서 운반을 쉽고 효율적으로 하는 수단으로 쓰였을 뿐 아니라 단순 운반 설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철도라고 할 수는 없다.

철도는 1814년에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8)이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여 동력이 기계화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었다. 철도의 시작은 교통수단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으며, 1825년 영국이 철도 건설을 시작하자 다른 나라에서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초기에는 철도 건설에 들어가는 자본과 기술의 규모가 워낙 방대한데다가 재래 교통수단의 저항으로 발전에 지장을 받기도 하였으나 급속도로 진전하여, 그것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비약의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899년(광무 3) 철도가 부설되면서 근대적 관광이 유입되었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는 개화와 보수의 갈등 속에서 국민 경제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철도 건설에 본격적으로 착수도 해보기 전에 일본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에 철도 부설권을 빼앗겼으며, 결국 일제의 침략적 정략(政略)에 의해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이 차례로 부설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 종관 철도(韓國縱貫鐵道) 중시 정책에 따라 간선 철도망(幹線鐵道網)과 이를 연결하는 지선(支線)이 확충되었다.77)한말과 일제 강점기 철도 부설과 일본의 침략성에 대해서는 정재정, 『일제 침략과 한국 철도』, 서울 대학교 출판부, 2004를 참조할 것.

이처럼 일제에 의해 철도가 부설되면서 일본의 관광이 그대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移植)되었다. 일제는 국권을 강탈하기 이전부터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등의 철도가 부설되자 일본인을 위한 관광 안내서를 간행하여 조선으로의 관광을 적극 권장하였고, 조선을 강점한 이후에도 이러한 기조 를 확대해 나갔다. 또 일제는 이른바 ‘내지 시찰단(內地視察團)’을 조직하여 일본의 근대 도시와 문화 유적지를 시찰토록 하여 식민지 조선과 일본의 비교를 통해 조선의 후진성과 일본의 우월성을 인식토록 하였다.78)일본 시찰단에 대해서는 이경순, 「1917년 불교계(佛敎界)의 일본 시찰 연구」, 『한국 민족 운동사 연구』 25, 한국 민족 운동사 학회, 2000 ; 조성운, 「1910년대 일제(日帝)의 동화 정책(同化政策)과 일본 시찰단(視察團)-1913년 일본 시찰단을 중심으로-」, 『사학 연구』 80, 한국 사학회, 2005 ; 박찬승,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의 일본 시찰-1920년대 이후 이른바 ‘내지 시찰단(內地視察團)’을 중심으로-」, 『지방사와 지방 문화』 9-1, 역사 문화 학회, 2006 ; 조성운, 「1920년대 초 일본 시찰단의 파견과 성격(1920∼1922)」, 『한일 관계사 연구』 25, 한일 관계사 학회, 2006 ; 조성운, 「1920년대 일제의 동화 정책과 일본 시찰단」, 『한국 독립 운동사 연구』 28, 한국 독립 운동사 연구소, 2007을 참조할 것. 그뿐 아니라 1914년 대정 박람회(大正博覽會)와 1922년 동경 평화 박람회(東京平和博覽會)의 시찰, 식민 통치의 치적을 확인시키기 위한 1915년 조선 공진회(朝鮮共進會)와 1929년 경성 박람회(京城博覽會)를 통해 식민지 조선에서 관광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와 더불어 금강산 관광지 개발은 일제의 관광 정책과 맞물려 식민지 조선인에게 적지 않은 관광 붐을 일으켰다. 더욱이 간선 철도망과 이를 연결하는 지선이 확충되면서 관광은 점차 일상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철도를 이용한 여행이 이루어진 것은 근대 문명의 상징인 서양보다도 훨씬 늦은 1900년대 초이다. 이는 철도가 유럽보다 늦게 부설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시찰단으로 해외에 파견된 인물 중에는 철도 여행을 경험한 이들이 있다. 1876년(고종 13)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金綺秀)는 첫 철도 여행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확대보기
김기수
김기수
팝업창 닫기

요코하마(橫濱)에서 신바시(新橋)까지는 화륜차를 탔는데 역루(驛樓)에서 조금 쉬었다. 일행의 행장(行裝)은 바로 에도(江戶, 동경의 옛 이름) 근항까지 직달(直達)하고 단지 몸에 필요한 의금(衣衾)과 기물(器物)만을 차에 싣기로 하였다. 차가 벌써 역루 앞에 기다린다고 하거늘, 역루 밖에서 또 복도를 따라 수십 칸을 지나가니, 복도는 거의 끝나 가는데도 차는 보이지 않았다. 장행랑(壯行廊) 하나가 40∼50칸이나 되는 것이 길가에 있어, 나는 “차 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니, 이것이 차라고 대답하였다. 그것을 보니 조금 전에 장행랑이라고 인정한 것이 차이고 장행랑은 아니었다. 차의 규모는 네 칸 한 차의 화륜(火輪)이 있는데, 앞에는 화륜이 끌고 뒤에는 사람을 실었다. 그 나머지는 차마다 삼 칸 반이나 되니, 삼 칸은 집이 되고, 반 칸은 승강구가 되었다. 쇠갈고리로써 이를 연결하고 차가 차를 연결하여 4∼5차, 10차까지 이르니, 능히 30칸∼40칸 또는 40칸∼50칸이 되었다.

승강구로 오르고 내리며 집에 앉게 되었다. 밖에는 나무 무늬로 장식하고 안에는 가죽과 털 등으로 꾸몄다. 양쪽은 의자처럼 높고 가운데는 낮고 평편한데 걸터앉아서 마주 대하니, 한 집에 여섯 명 또는 여덟 명이나 되었다. 양쪽 끝은 모두 유리로 막았는데 장식이 찬란하여 눈이 부셨다. 차마다 바퀴가 있어 앞차의 화륜이 구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서 모두 구르게 되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같이 날뛰었다. 한 시간에 300∼400리를 달린다고 하였는데, 차체는 안온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다만 좌우에 산천초목과 가옥, 사람들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 번쩍하므로 도저히 잡아 보기가 어려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신바시(新橋)까지 도착하였으니, 그 거리가 95리나 왔던 것이다.79)김기수(金綺秀), 『일동유기(日東游記 )』 권2, 1877 ; 『수신사 기록 ; 한국 사료 총서』 9, 국사 편찬 위원회, 1895, 27∼36쪽.

일본에서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철도 여행을 경험한 김기수는 별천지에 온 느낌이었을 것이다. 김기수는 기차에 타면서도 그것이 기차인지도 몰랐으며, 달리는 기차를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처럼 날뛴다고 표현하였다. 실로 꿈에서도 보지 못한 신비한 괴물이었다. 그러면서도 기차는 평온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였다.

확대보기
『일동기유』
『일동기유』
팝업창 닫기

또 이종응(李鍾應)도 1902년(광무 6) 특명 부영 대사(特命赴英大使)인 이재각(李載覺)의 수행원으로 영국을 기행하고 『서유견문록(西遊見聞錄)』이라 는 사행 가사(使行歌辭)를 남겼다. 이 『서유견문록』은 현전하는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세계 기행 가사라는 문학사적 의미도 있다. 이 가사에서 이종응은 철도 여행에 대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관속소 하연후에 화륜거에 올라보세

봉명사신 대접으로 특별거가 분명하다

어렵도다. 어렵도다. 일만여리 철로로다

철로공작 볼작시면 귀신인가 사람인가

산을뚫어 길을내고 강을건너 다리놓고

산은높고 골은깊어 안고돌고 지고도네

밤낮가는 기차상에 안전경개 평논하세80)이종응(李鍾應), 『서유견문록(西遊見聞錄)』, 1902 ; 김상진, 「이종응의 「서유견문록」에 나타난 서구 체험과 문화적 충격」, 『우리 문학 연구』 23, 우리 문학회, 2007, 47쪽 재인용.

확대보기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팝업창 닫기

이 글은 이종응이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한 후 하루를 쉬고 다음날 기차를 타고 퀘벡 항으로 가는 도중 베이커 산을 지나면서 느낀 점을 표현한 것이다. 이종응 역시 국내의 기차와 달리 빠른 속도에도 놀랐지만 터널을 뚫어 산을 관통하고 강 위에 다리를 만들어 철로를 부설한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귀신이 철로를 만든 것’라고 할 정도로 놀라고 있다. 또한 영국 리버플 항에서 런던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본국서울 육백리를 기차타고 행차하면 사시간 도달이요. 의관정제 출문하야 기차에 올라타니 풍우같이 가는 기계 정거장에 벌써왔네”라고 하여, 서울에서 600리는 4시간이 걸리지만 영국에서는 바람처럼 빠르게 느꼈던 것이다. 이는 당시 경인선보다 세 배나 빠른 속도라고 할 수 있다.81)김상진, 앞의 글, 46∼48쪽.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는 철도 여행은 옛 기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역마다 고객을 유혹하고 있는 ‘여행은 고속 철도로’라는 현수막은 이 시대의 문명이고 새로운 기록이 될 수 있다. 고속 철도의 첫 탑승 경험이라 할까. 근대 문명의 괴물로 인식되었던 기차는 점차 우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