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2장 상상의 틀, 여행의 수단
  • 1. 철도의 등장과 관광으로서의 여행
  • 철도 부설 논의
성주현

교통수단의 하나였던 철도는 지금까지 비교적 저렴한 운임, 안전성과 신속성, 그리고 대량 수송으로 기간 산업의 건설과 고도의 경제 성장을 유도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광객 운송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곧 영국에서 처음으로 철도가 등장한 후 19세기 중반부터 관광의 대중화를 창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중반까지 관광 수단으로써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82)최영준, 「철도 여행의 개선에 관한 연구」, 『관광 레저 연구』 제10권 제1호, 한국 관광 레저 학회, 1998, 131쪽.

우리나라에서 철도 부설이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일본과 중국, 미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이후인 1882년(고종 19)부터였다. 영국에서 철도가 부설된 지 50여 년 만의 일이다. 한말 독일인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 한국명 목인덕(穆麟德))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철도 문제는 1882년 내가 조선에 갔던 직후에 일어났다. 정부는 여러 방면으로부터 그 이권의 양도가 요구되어 여하튼 간에 결정을 지어야 했다. 신청을 해 온 회사는 영국과 일본의 회사들이었다.83)『목인덕수기(穆麟德手記)』, 107쪽 ; 이현희, 『한국 철도사』, 한국 학술 정보, 2001, 33쪽.

당시 정부는 철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부설하고자 하였으나 재정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선진 기술을 가지고 있는 외국 자본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논의된 철도 부설에 참여한 나라는 영국과 일본이었지만 외교 고문으로 있던 묄렌도르프의 연기 요청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실 당시 조선 정부의 재정으로는 이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이후 1885년과 1892년(고종 29)에 다시 철도 부설을 논의하였지만 이 역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무엇보다도 시설비가 워낙 비쌌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서둘러 전기 통신 사업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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묄렌도르프
묄렌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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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 시기 일본에서는 철도 기사 가와노 텐스이(河野天瑞)를 보내 서울과 부산 간의 철도 노선을 답사하고 상세한 보고서와 도면을 작성한 바 있다. 이는 일본이 1890년대부터 조선을 침략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사전에 준비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한 사례이다. 특히 일본군 참모 차장 가와우에 소로쿠(川上操六)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우리나라 철도에 대한 침략적 근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일조(一朝)에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군대 군수품 등을 선운(船運)으로 운송하는 것은 해상권의 관계상 우선 곤란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부산에 상륙시켜 서울 방면으로 수송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일본의 손으로 경부 간(京釜間)에 철도를 부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84)朝鮮總督府 鐵道局, 『韓國鐵道史』, 1929, 96쪽.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철도 부설이 본격화한 것은 1894년 청일 전쟁이 계기가 되었다. 1894년 7월 일본 외상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다케우치 츠나(竹內網)를 파견하여 서울과 부산, 서울과 인천 간의 철도 부설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의 철도 부설 계획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용 철도(軍用鐵道)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나아가 대륙 침략을 위한 발판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내정을 간섭하였다. 이로 인해 정부 기구에 처음으로 철도 사무를 관장하는 철도국(鐵道局)이 탄생하였다. 당시 철도국의 업무 분장은 “도로를 측량하여 철도 가설에 대비하는 등의 사무를 관장하여 참의 1명, 주사 2명”으로 간단명료한 조직이었다. 오늘날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한 코레일(KORAIL)에 비하면 일천한 조직이지만,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탄생한 철도국은 근대적이고 공식적인 의미에서의 철도 사무를 담당하는 최초의 기관이었다. 이처럼 철도 전반의 사무를 관장하는 철도국이 조직되었지만 자력으로 철도를 부설할 능력이 없던 정부는 일본과 미국 등 서구 열강에게 철도 부설권을 넘겨주어야만 했다. 이후 우리나라 철도의 핵심인 경인선과 경부선 부설권은 결국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고, 일본의 자본과 기술로 철도가 본격적으로 부설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부산과 신의주을 연결하는 한반도 종단 철도 건설에 주력하였다. 또 극동으로 진출하는 러시아를 견제 하기 위해 러일 전쟁을 일으켰으며, 경부선을 병참로(兵站路)로 활용하기 위해 철도 부설에 진력하여 1905년 1월 영등포에서 초량을 잇는 경부선 철도를 개통하였다. 이어 러일 전쟁을 치르는 동안 경의선 부설 공사를 마치고 1905년 4월 용산과 신의주를 잇는 군용 철도의 운행을 개시하였다. 1908년 1월부터 한반도를 종단하는 부산과 신의주 사이에 직통 열차 ‘융희호(隆熙號)’가 운행을 개시하였고, 1911년 11월에는 압록강 가교(架橋)가 준공되면서 만주의 안둥(安東, 현재 단둥(丹東))까지 연장 운행이 가능해졌다. 이후 일제는 호남선, 경원선, 함경선, 황해선, 만포선, 동해 북부선 등 한반도의 간선과 지선 철도를 확충하였다. 이 과정에서 철도 부지의 강압적인 수용·가옥·분묘의 파괴, 노동력의 강제 동원과 사역(使役) 등으로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일제는 이를 철저히 탄압하였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라야만 했다.85)이에 대해서는 정재정, 「일제의 한국 철도 부설과 한국인의 저항 운동」, 『일제의 침략과 한국 철도』, 서울 대학교 출판부, 2004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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