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2장 상상의 틀, 여행의 수단
  • 1. 철도의 등장과 관광으로서의 여행
  • 경인선의 개통과 관광의 인식
성주현

우리나라 철도는 1897년(광무 1)에 인천 우각현(牛角峴, 현재 인천광역시 도원동)에서 공사가 시작되어 1899년 9월 18일에 제물포-노량진 구간 33.2㎞가 개통되었다. 곧이어 1900년(광무 4) 7월 8일에 한강 철교가 준공됨에 따 라 노량진-서울 구간이 개통되어 서울-인천이 완전히 연결되었다.

우리나라 철도는 노량진-서울 구간이 완공되면서 경인선이라는 이름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철도가 첫 선을 보일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용하던 육상 교통수단은 우마차(牛馬車), 가마, 인력거(人力車), 조랑말, 자전거 등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거대한 몸체에 사람과 짐을 싣고 철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열차의 등장은 일반인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경인선 개통 당시의 철도 현황을 보면 철도 종사원 119명에 차량은 증기 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28량이었다. 그리고 개통 당시에는 모갈(Mogul) 탱크형 증기 기관차에 객차 3량을 연결하여 편도 1시간 40분에 1일 1왕복 운행하였다. 당시 『독립신문(獨立新聞)』은 철도 개통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경인 철도 회사에서 어저께 개업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인천서 화륜차가 떠나 삼개 건너 영등포에 와서 경성에 내외국 빈객들을 수레에 영접하여 앉히고 오전 9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데, 화륜차 구르는 소리는 우뢰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에 굴뚝 연기는 반공(半空)에 솟아오르더라. 수레를 각기 방 한 칸 정도 되게 만들어 여러 수레를 철구(鐵鉤)로 이어 앞과 뒤를 상접하게 이었는데, 수레 속은 상중하 3등으로 수장하여 그 안에 배포한 것과 그 밖에 치장한 것은 이로 다 형언할 수 없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대한 리수(里數)로 80리 되는 인천을 순식간에 당도하였는데, 그곳 정거장에 배포한 범절(凡節)은 형형색색 황홀 찬란하여 진실로 대한 사람의 눈을 놀래더라. 그 중에 가장 가관인 것은 인천항에 거류하는 일인(日人)들이 각기 집에서 국기를 세웠으며 축하하는 뜻을 표하여 유지 제씨가 연회장을 기묘한 불놀이하는 여화 23발을 보조하였는데……86)『독립신문』 1899년 9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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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 철도 개통식 모습
경인 철도 개통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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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에 처음으로 등장한 기차를 신문 기자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탑승하고 겪은 경험을 그대로 실은 것이다. 기자도 처음 겪는 기차의 경험은 “우레와 같이 천지를 진동하고, 또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할 정도”라고 하였듯이 온통 흥분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객관적이어야 할 기자의 표현이 이 정도라면 일반 민중들로서는 그야말로 경이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처럼 경인선의 개통으로 등장한 철도가 오늘날처럼 바로 여행이나 관광의 수단으로 활용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경인선 부설 자체가 일본의 조선 침략을 위한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객실 이용료도 비싸서 서민들에게 철도 이용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객실은 3등급으로 나뉘었는데 1등 객실 요금은 1원 50전으로 외국인과 귀족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2등 객실 요금은 80전, 3등 객실 요금은 40전이었다. 당시의 물가로 환산해 본다면 면포(綿布) 1필이 1원 4전으로 1등실 요금보다 쌌으며, 2등실 요금인 80전은 계란 100개 값이었으며, 3등실 요금인 40전은 닭 두 마리 값과 같았다. 또 당시 여인숙의 한 끼 식대가 5전에 불과하여 일반 민중들이 경인 선을 이용하여 여행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87)박천홍,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산처럼, 2003, 22쪽. 이에 따라 경인 철도 회사는 철도의 대중화와 고객을 유치하는 광고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 광고문에 따르면 “노량 철도는 미국에서 최근에 제조한 신법이요 천하의 희견(希見)할 바라” 또는 “동작양화(銅雀楊花)의 벽류(碧流)는 한산관악(漢山冠岳)의 최외(崔嵬)함에 대하고 주과부평(走過富平) 즉 만경평야(萬頃平野)는 맥수(麥秀)를 가(歌)할 만하고 사계광경(四季光景)이 소위 기상만천(氣象萬千)”이라고 하여 수송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관광의 요소를 부각시키고 있다.88)『철도 박물관 도록』, 한국 철도청, 2002, 35쪽. 곧 철도를 이용한 여행 또는 관광이라는 새로운 시공간의 볼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철도는 점차 관광의 수단으로 자리를 잡아 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렇다고 철도가 곧바로 관광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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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객차-귀빈 객차
경인선 객차-귀빈 객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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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객차-1등 객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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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객차-2등 객차
경인선 객차-2등 객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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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객차-3등 객차
경인선 객차-3등 객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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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인선에 이어 경부선과 경의선 등 철도망이 확충되면서 사회 경제의 중심이 개항장(開港場)과 포구(浦口)로부터 철도 노선이 통과하는 신흥 도시와 정거장으로 옮겨 갔으며, 철로가 어디를 지나느냐에 따라 쇠락하거나 발전하는 도시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명승지가 있거나 가까운 곳은 관광 도시 또는 관광지로 새롭게 부상하였다. 곧 철도는 산업 개발, 인구 증가, 도시 촌락의 개선 등에 직접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명승지와 유람지를 제공하여 발달시키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금강산 관광을 위해 금강산 전기 철도(金剛山電氣鐵道)를 철원에서 장안사까지 설치하였고, 중앙 철도(中央鐵道)는 경주를, 서선 식산 철도(西鮮殖産鐵道)는 황해도 장수산과 신천 온천을, 경남 철도(京南鐵道)는 온양 온천을 관광지로 조성하였다.89)賀田直治, 「鐵道と遊覽地經營」, 『鐵道協會會報』 1927年 10月號, 10∼11쪽. 황해도 송화(松禾)도 온천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황해 자동차부에서 각 노선이 송화를 거쳐 갈 수 있도록 조정하여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90)「송화 온천 발전」, 『중외일보(中外日報)』 1927년 6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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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령 전경
단발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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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철도 회사나 역에서 자체적으로 관광객 유치를 위해 선전을 하 기도 하지만 수입 증가의 한 방법으로 관광 안내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91)조선 총독부 철도국에서 간행한 관광 안내서는 『서선 안내(西鮮案內)』, 『남선 안내(南鮮案內)』, 『만포선(滿浦線)』 등이 있다. 이 밖에도 한국 철도 협회에서 회보를 통해 철도 연선을 통해 주요 도시와 관광지를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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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열차의 1등 전망차
특급열차의 1등 전망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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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금강산의 경우에는 청년 단체나 사회 단체의 하계 강습 개최를 적극 유도하기도 하였다.92)賀田直治, 앞의 글, 14∼15쪽. 실제로 조선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는 금강산에서 하령회(夏令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93)『동아일보』 1921년 7월 1일자. 그뿐 아니라 1920년대 들어서면서 관광은 좀 더 대중화되어 각종 사회 단체에서 탐승단, 관광단, 시찰단을 조직하여 관광지를 탐방하였다. 이로써 철도는 점차 여행이나 관광이라는 상상의 틀로 인식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행이나 관광은 여전히 일반인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1등실에서 3등실까지 등급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3등실 이용도 기회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1930년대에 유명 문인들이 한 기차 여행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한 잡지사가 실시한 설문 조사를 보면 당시 문인들은 대부분이 3등실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문인들의 경제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던 까닭도 있지만 객실 요금이 여전히 서민이 이용하기에는 비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돈이 좀 넉넉하면 1등실은 아니더라도 2등실에라도 타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중에는 차 안에서 도시락 등으로 식사를 해결하기도 하고 과자, 빵, 바나나, 샌드위치 등을 주전부리로 먹기도 하였다. 특별한 경우에는 위스키, 커피 등을 마시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문인들이다 보니 차 안에서 책을 읽으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 개중에는 차가 속도를 내어 달릴 때면 ‘혹 탈선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더 앞섰다는 이도 있었고, ‘인생의 걸음이 이보다 더 빠를까’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여행 중에는 적지 않은 로맨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여행을 떠나면서 기차에 오를 때는 혹 옆자리에 어떤 사람이 함께 탈까 하고 자못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여행 중에는 이성과의 재미있는 로맨스도 종종 있었다. 당시 신문 소설로 유명하였던 송영(宋影)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도 하였다.

토성(土城)에서 연안(延安) 건너가는 곳에 벽란도라는 강이 있는데, 같이 자동차를 타고 오던 부인 한 분이 나에게 배를 탈 때에 손목을 잡아 달라고 했습니다. …… 처음으로 젊은 부인의 손목을 잡아 본 나는 무지개 같은 공상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선중(船中)에서도 그 부인은 내 팔을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승객들은 우리 둘을 부부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가 대안에 닿자 그이 남편 되는 청년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아 갔습니다. 부인은 인사도 없이 그 남자와 어깨를 가지런히 하고 사라졌습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생각나면 쓸쓸해집니다.94)「여행 설문 중(旅行設問中) 송영(宋影)의 답변」, 『조광(朝光)』 3권 4호, 조선일보사 출판부, 1937. 4, 251쪽.

이에 비해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崎, 1891∼1968)는 너무나 많아서 차라리 그만두겠다고 할 만큼 적지 않은 로맨스가 있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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