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2장 상상의 틀, 여행의 수단
  • 3. 탐승 관광과 관광 열차의 등장
  • 명산과 고적, 온천 동굴, 섬 등 다양한 볼거리 탐승단
성주현

한편, 탐승 관광은 명산, 고적, 폭포, 약수, 온천, 동굴, 사찰, 섬 등에 대해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명산 관광으로는 설악산206)「인제 설악산 탐승원 모집」(광고), 『동아일보』 1929년 5월 28일자.·장수산207)「서선의 소금강 장수산 탐승 대회」, 『동아일보』 1923년 5월 8일자 ; 「양보 지국 주최 장수산 관풍 대회」, 『동아일보』 1925년 10월 13일자 ; 「장수산 관풍 대회」(광고), 『동아일보』 1925년 10월 18일자.·지리산208)「지리산 탐승」, 『동아일보』 1928년 8월 11일자 ; 「능주 지리산 탐승단 조직」(광고), 『동아일보』 1928년 4월 1일자.·두류산209)「두류산 탐승대 모집」(광고), 『동아일보』 1933년 4월 28일자.·칠보산210)「칠보산 탐승 단원 모집 내용」, 『동아일보』 1925년 8월 5일자 ; 「칠보산 탐승단」, 『동아일보』 1925년 8월 18일자 ; 「칠보산 탐승 단원 모집」(광고), 『동아일보』 1926년 9월 23일자 ; 「칠보산 탐승단 성진서 모집」, 『동아일보』 1928년 10월 2일자 ; 「함북 승지 칠보산 탐승 단원 모집」, 『동아일보』 1929년 5월 17일자 ; 「명산 칠보산 탐승단 모집」(광고), 『동아일보』 1929년 4월 18일자 ; 「각 단체 연합 칠보산 탐승」, 『동아일보』 1929년 10월 4일자 ; 「성황 이룬 칠보산 탐승」, 『동아일보』 1929년 10월 15일자.·묘향산211)「묘향산 탐승단 모집」(광고), 『동아일보』 1929년 7월 14일자.·관악산212)「관악 탐승대 인하 청년회 주최」, 『동아일보』 1929년 4월 18일자.·연화산213)「연화산 탐승 상남 농우회서」, 『동아일보』 1928년 7월 22일자.·황해 소금강214)「황해 소금강 탐승 단원 모집」, 『동아일보』 1928년 7월 19일자 ; 「황해 소금강 탐승단 모집」(광고), 『동아일보』 1928년 7월 23일자.·학가산215)「학가산 탐승단 모집」(광고), 『동아일보』 1928년 5월 16일자.·월출산216)「월출산 도갑사 탐승 단원 모집」, 『동아일보』 1928년 5월 3일자.·와암217)「와암 탐승 단원 모집」(광고), 『동아일보』 1927년 6월 4일자. 등이 있었으며, 사찰 관광으로는 안양사(安養寺)218)「안양사 탐승원 모집」(광고), 『동아일보』 1927년 5월 25일자.·송광사219)「사찰 탐승단 병영 지국이 모집」, 『동아일보』 1929년 4월 25일자.·통도사220)「명찰 통도사 탐승 단원 모집」, 『중외일보』 1930년 5월 11일자.·해인사221)「해인사 탐승단」(광고), 『동아일보』 1925년 5월 31일자 ; 「자연미에 도취, 해인사 탐방」, 『동아일보』 1925년 6월 13일자.·대원사222)「지리산 대원사 탐승 단원 모집」, 『동아일보』 1928년 4월 6일자.·구암사·내장사223)「탐승 대원 모집 22일로 연기」, 『동아일보』 1927년 10월 2일자.·백양사가224)「내장, 백양 양사 탐승 대원 모집」, 『동아일보』 1927년 9월 12일자. 있었다. 그리고 온천 관광으로는 온양 온천225)「부인 온천 견학단」, 『동아일보』 1929년 4월 26일자.·신령 온천(神靈溫泉)226)「신령 온천의 탐승단 모집」, 『동아일보』 1929년 5월 26일자.·갈산 온천(葛山溫泉)227)「갈산 온천 탐승 단원 모집」(광고), 『동아일보』 1927년 4월 10일자.·동래 온천228)「동래 온천, 범어사 탐승 대회」(광고), 『동아일보』 1928년 5월 15일자.·신천 온천229)「신천 온천 각희 대회(脚戲大會)」, 『동아일보』 1925년 10월 28일자. 등이, 약수 관광으로는 세포(洗浦) 은선동 약수(隱仙洞藥水)230)「은선동 약수 먹기 참가 신청 답지」, 『동아일보』 1926년 5월 29일자.·이천 약수(伊川藥水)231)「중추 15일에 이천 약수 탐방」, 『동아일보』 1927년 8월 28일자 ; 「이천 약수 탐승원 모집」(광고), 『동아일보』 1927년 9월 1일자. 등이, 역사 유적 관광으로는 경주232)「금천 은행 내경」, 『동아일보』 1923년 10월 7일자 ; 「천년 고도 경주 탐방단 모집」, 『동아일보』 1927년 3월 9일자 ; 「경주 탐승단 모집」, 『동아일보』 1927년 5월 31일자 ; 「경주 탐승 단원 모집」(광고), 『동아일보』 1927년 7월 3일자 ; 「경주 탐승단 모집」(광고), 『동아일보』 1927년 7월 15일자.·부여233)「부여 탐승단」, 『동아일보』 1928년 7월 17일자 ; 「백제 고도 부여 탐승」, 『동아일보』 1925년 8월 22일자 ; 「백제 고도 부여 탐승 단원 모집」, 『동아일보』 1925년 8월 23일자.·통영234)「통영 고적 탐승 대회」(광고), 『동아일보』 1928년 5월 29일자. 등이, 섬 관광으로는 신미도(身彌島),235)「신미도 탐승단 모집」, 『동아일보』 1929년 8월 17일자 ; 「신미도 탐승단 모집」, 『동아일보』 1928년 8월 4일자 ; 「지신미도 탐승단 모집」, 『동아일보』 1928년 7월 19일자. 폭포 관광으로는 박연 폭포236)「박연 폭포 탐승단」(광고), 『중외일보』 1930년 8월 3일자.·운림 폭포237)「운림 폭포 탐승단 본보 문천 지국의 모집」, 『동아일보』 1929년 8월 11일자 ; 「운림 폭포 탐승단 모집」, 『동아일보』 1929년 8월 13일자.·고음 폭포238)「풍류산 탐승단」, 『동아일보』 1925년 8월 7일자. 등이, 해수욕장으로는 황해도 장연의 명사십리(名沙十里)가239)「명사십리 탐승」, 『동아일보』 1925년 7월 15일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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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지 탐승단 모집 광고-평양 탐승단 모집 광고(『동아일보』 1927년 6월 2일자)
명승지 탐승단 모집 광고-평양 탐승단 모집 광고(『동아일보』 1927년 6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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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탐승단 모집 광고(『동아일보』 1929년 6월 4일자)
설악산 탐승단 모집 광고(『동아일보』 1929년 6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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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탐승단 모집 광고(『동아일보』 1932년 9월 21일자)
금강산 탐승단 모집 광고(『동아일보』 1932년 9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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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1920년대를 중심으로 탐승 관광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들 탐승 관광지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명산의 단풍이나 폭 포, 달빛, 섬 등 자연 경관을 있는 그대로 관광하는 자연 탐승 관광, 둘째는 피서나 온천 등지를 찾는 휴양지 탐승 관광, 셋째는 박람회나 품평회 등 산업 시설을 관람하는 산업 탐승 관광, 넷째는 경주, 부여, 사찰 등 문화 유적지를 관광하는 문화 탐승 관광 등이다. 이와 같은 탐승 관광은 1930년대 이후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1920년대 탐승 관광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국내 관광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붐을 이루었다. 그뿐 아니라 신문과 잡지에서도 관광을 유도하는 사설이나 권두언(卷頭言)이 종종 게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1938년에 이르면 철도 이용객이 4505만 3752명에 달하였는데, 이는 1911년에 비해 거의 20배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이들 이용객 중 일부는 업무나 다른 용도로 열차를 이용하였겠지만 적어도 관광객이 크게 증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전국의 명승지를 무대로 한 탐승 관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의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조선 관광 협회(朝鮮觀光協會)의 조직 움직임도 있었다. 당시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소개된 기사를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수강산의 이름이 있는 조선에는 금강산을 비롯하여 세계에 자랑할 만한 명승과 고적이 허다하므로 이의 보관에 용감히 입개(入介)하는 동시에 널리 세계 각국에 선전할 필요가 있다. 하여 내지에 있는 관광국(觀光局)의 예를 본받아 조선에도 조선 관광 협회라는 것을 조직하고자 지난번부터 조선 총독부 철도국, 민간 대표 등이 회합하여 여러 가지로 타협한 결과 각 지방에 관광 협회를 두고 이를 세포(細胞)로 하여 조선 관광 협회를 조직하기로 결정되어 이에 의하여 경성과 부산의 두 개소에는 이미 그 설립을 보게 되었으나 모두 경비 관계로 휴면(休眠) 상태에 빠져 있어 대망(待望)의 조선 관광 협회는 전혀 유야무야 중에 있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총독부 관계자는 “그리 급속을 요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모처럼 성립된 계획을 굴절시키는 것은 가석한 일이므로 속히 어떻게 다시 방책을 세우고자 한다.”고 말하는데, 금년 내로는 재차 관계자의 회합을 구하여 본격적으로 설립에 노력하기로 된 모양이더라.240)「조선 관광 협회 부활을 기도」, 『매일신보』 1933년 10월 19일자.

이에 따르면, 1933년 들어 조선 총독부 철도국과 민간 대표들이 모여 지방에서 우선 관광 협회를 조직하고 이를 토대로 전국적인 규모의 조선 관광 협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울과 부산 두 곳에만 관광 협회가 만들어짐에 따라 중앙 조직으로서의 조선 관광 협회는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관광객이 많이 늘어나는 10월에 조선 관광 협회를 총독부의 지원으로 다시 조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관광 협회는 1937년 5월에 이르러서야 결성될 수 있었다.241)「4월까지 결성될 조선 관광 협회」, 『매일신보』 1937년 1월 18일자 ; 「외객 유치 강화 위한 조선 관광 협회 결성」, 『매일신보』 1937년 4월 15일자.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조선 관광 협회는 이후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 체제가 되면서 크게 활약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국내에서는 꾸준한 탐승단이나 관광단이 조직되어 관광이 점차 일상화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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