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3장 관광 명소의 탄생과 숙박 시설
  • 2. 온천과 벚꽃 명소
윤소영

일제 강점기의 여행 명소 중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곳은 온천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조선 총독부 지질 조사소(地質調査所)가 지적하고 있듯이,284)朝鮮總督府 地質調査所, 『朝鮮地質調査要報』 3, 1926, 144쪽. 조선의 온천은 동래 온천처럼 비교적 긴 온천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입욕(入浴) 습관이 발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통의 미발달로 온천을 대중적으로 이용하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일 병합(韓日倂合) 후 온천을 개발한 주역은 분명 일본인이었다. 한일 병합 후 도로와 철도 개통에 힘입어 전국에서 온천이 개발되고 새로운 여행지로 부상하는 과정이 전개되었다. 1926년 당시 전국의 주요 온천장으로는 남부 지방에 동래 온천·해운대 온천, 중부 지방에 유성 온천·온양 온천, 황해 지방에 신천 온천·용강 온천, 강원 지방에 온정리 온천, 함경 지방에 주을 온천이 있었다.285)朝鮮總督府 地質調査所, 『朝鮮地質調査要報』 3, 1926, 145쪽. 이들 온천장의 개요를 정리하면 표 ‘일제 강점기의 전국 주요 온천’과 같다.

전국의 주요 온천장 가운데 일찍부터 관광 온천으로 발달한 것은 동래 온천이다. 조선 총독부 철도국에서 발행한 『조선 여행 안내기(朝鮮旅行案內記)』에는 동래 온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표> 일제 강점기의 전국 주요 온천
구분
온천명
소재지 교통 풍경 설비
동래 경남 동래군
동래면 온천리
-부산부에서 4리
-자동차· 전차 있음
-다소 단조로움
-유람지로 해운대·범어사·통도사·금정산지 등이 있음
-일본 여관은 설비 양호
-내탕 완비
-욕장도 설비 좋음
해운대 경남 동래군
남면 우리
-부산부에서 4리
-자동차로 동래 온천에서 3 리 반 떨어져 있음
-바다와 육지의 풍광이 아름다우며 훌륭함
-유람 및 자연적인 오락이 있음
-일본 여관과 욕장 설비는 불충분
-내탕 없음
유성 충남 대전군
유성면 봉명리
-경부선 대전역에서 2리 반
-자동차 있음
-유성 구온천은 반 리 더 떨 어져 있음
-좋지는 않음
-부근에 계룡산 등 유람 탐승지 있음
-유성 구온천에는 일본 여관 4, 5개 있음
-내탕 없음
-유성 신온천은 설비 다소 좋음
-내탕 있음
온양 충남 아산군
온양면 온천리
-경부선 천안역에서 경남 철도선으로 30분 소요
-온양온천역에서 가까움
-좋지 않음
-단조하고 부근에 탐방할 명승지도 없음
-일본 여관 설비는 불충분하나 숙박은 불편하지 않음
-내탕 없음
신천 황해도 신천군
온천면 온천리
-경의본선 사리원역에서 조철 황해선으로 2시간
-신천온천역에서 10정(町) 정도 거리
-단조로움
-부근에 명승 구적 없음
-일본 여관 설비 정돈된 편
-내탕 있음
-욕장 설비도 갖춘 편
용강 평남 용강군
해운면 온정리
-진남포에서 7리
-자동차 있음
-진남포선 진지동역에서 5리
-자동차 있음
-단조로움
-부근에 고분 구적 없음
-일본 여관 설비 부족
-내탕 설비 부족
온정리 강원도 고성군
신북면 온정리
-조선 우선의 기항지인 장전항에서 2리 반
-자동차·인력거 있음
-유명한 외금강
-환경 우수
-금강산 호텔 그 외 조선식 여관 다수
-설비 양호
-내탕 있음
주을 함북 경성군
주을온면
-함북선 주을역에서 약 3리
-자동차 있음
-산간의 계류에 면해서 경치가 볼 만함 -일본식·조선식 여관이 십여 채
-설비 다소 부족하나 내탕 있고 입욕과 숙박에 족함
✽朝鮮總督府 地質調査所, 『朝鮮地質調査要報』 3, 1926, 146쪽에서 작성.

신라시대부터 이미 알려진 온천장으로…… 교통은 매우 편리하여 부산역에서 기차로 동래역에서 하차하고 승합자동차(乘合自動車)로 가는 외에 부산에서 자주 전차가 있고 1시간 마다 승합자동차가 있다. 금정산의 기승(奇勝)을 뒤로 하고 앞에는 동래천이 흘러 훌륭한 온천 마을로서 행락지로 발전하여 웅장한 여관, 요정이 즐비하고 지금은 부산을 통과하는 여객이 반드시 여독을 씻는 곳으로 되어 있다. 수질은 약염류천(弱鹽類泉)이며 무취투명(無臭透明) 특히 위장, 신경, 부인병 등에 효능이 있다.286)朝鮮總督府 鐵道局, 『朝鮮旅行案內記』, 1934, 7쪽.

1917년 동래 온천을 찾은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부산진서 전차를 갈아타고 동래 시가를 바라보는 사이에 금산 밑 신라부터 금정(金井)으로 유명한 동래 온천에 달하였다. 온천 입구에는 녹문(綠門)이 새로 서고, 그 안에는 흰 장막을 치고 그 속에서 10여 인의 미인이 무슨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춘다. …… 이리 묻고 저리 물어 명호옥 여관(鳴戶屋旅館)에 무불(無佛) 사장을 찾아갔다. …… 오래간만에 친구를 대하고 냉수에 목을 추기고 수정같이 맑은 온천에 먼지를 씻고 나니 죽었다 살아난 듯하고 선경(仙境)에 오른듯하다. 참 상쾌하다. 앞뒤를 터놓은 넓은 방에는 유카타 입은 호한(好漢)들이 가로 세로 노워 코를 곤다. 다리를 버둥거린다 야단들이다. 그 한복판에서 금 쟁반에 옥을 굴리는 소리를 내는 이가 이번 탐량단(探凉團)의 홍일점(紅一點)인 장안 명기 금홍(錦紅)이다. 그 곁에 금시계 줄을 찬란히 드리우고 방실방실 웃던 것이 영주 명기 홍련(紅 蓮)이란 것을 그 후에 알았고 단 중에 어느 호쾌한 남자가 홍련에게 마음을 빼앗긴 줄도 그 후에 들어 알았다.287)이광수, 「오도 답파 여행」, 『반도 강산 기행 문집』, 『이광수 걸작 선집』 제1권, 영창 서관, 1917 : 『한국 현대 수필집 자료 총서』 4권, 태학사, 1987, 83∼85쪽.

이광수는 당시 도쿄에 유학하던 중이었지만 경성일보사에 임시 고용되어 남한 지방 답파(踏破)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그가 온천에서 먼지를 씻고 나니 죽었다 살아난 듯하고 선경에 오른 듯하다고 하여 온천에 푹 매료된 모습이나 함께 간 동료들이 동래 온천에서 여흥을 즐기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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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호 여관
명호 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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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온천
해운대 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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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18년에 조선을 찾은 일본인 나이토(內藤久寬)는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으로 부산에 도착하여 스테이션 호텔에 투숙하였다가 한 시간여 전차를 타고 동래 온천 봉래관(蓬萊館)으로 간다. 봉래관은 큰 욕조가 있어서 뜨거운 천연 온천이 끓고 있는데, 입욕 후 넓은 일본식 방에서 일본 요리를 대접받았고 예기(藝妓)도 여러 명이 와서 본국에 있는 것처럼 불편 없이 유쾌하게 식사를 하였다고 적고 있다.288)內藤久寬, 『訪隣紀程』, 文光堂書店, 1918, 3∼4쪽. 온천욕과 예기와의 유흥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해운대 온천은 부산의 재조(在朝) 일본인 와다(和田野茂)가 1905∼1906 년에 밭 가운데에서 온수가 용출하자 이를 개발하여 욕장(浴場)을 건설한 것이 시발이었다. 그러다가 구마모토 현(熊本縣) 출신의 이와나가(岩永米吉)와 공동 개발하여 1911년부터 온천장을 만들고 입욕료를 받아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는 조선에서 온천장을 영업한 효시(嚆矢)이다.289)朝鮮總督府 地質調査所, 『朝鮮地質調査要報』 3, 1926, 2∼3쪽. 이광수는 해운대 온천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천지개벽 적에 집혀 놓은 지심(地心)의 금석(金石)불에 끓인 물이 온천이다. 맑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에 신체를 잠그고 앉았는 맛은 참 비길 데가 없다. 얼른얼른하는 화강석 위에 앉아 말끔하니 전신을 씻고 나서 백설 같고 양모 같은 수건으로 몸을 씻고 하얀 모래, 푸른 소나무 사이로 솔솔 불어오는 청풍을 쐬면 육신의 먼지뿐 아니라 정신의 먼지까지 씻어지는 것 같다.290)이광수, 「오도 답파 여행」, 『반도 강산 기행 문집』(『이광수 걸작 선집』 제1권), 영창 서관, 1917 : 『한국 현대 수필집 자료 총서』 4권, 태학사, 1987, 8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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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관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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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관 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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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에게 온천은 육신의 먼지뿐 아니라 정신의 먼지를 씻고 소생할 수 있는 장소였으며, 그것은 ‘백설 같고 양모 같은 수건’이 제공되는 안락함 속에서 문명을 맛볼 수 있는 장이기도 하였다. 온천은 당시 조선인에게 새로운 문화였건만 이광수에게서 그에 대한 거부감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온천을 여행의 여독을 씻고 휴식을 배가시킬 수 있는 장치로 적극 활용하고 만끽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이 무렵에 해운대 온천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는데 이광수가 소개하자 일거에 명소로 발돋움하기도 하였다.

한편 다른 이들의 온천 여행은 어떠하였을까? 희곡 작가 남우훈(南又薰)의 경우를 보자. 그는 1924년경 여름에 처음 온천을 가보았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이 온천이 불가사의하고 로맨틱한 장소라는 환상을 가졌던 점을 술회하고 있어 우리나라에 온천이 ‘이문화(異文化)’로 도입되면서 이에 대한 상상을 증폭시키기도 한 정경을 엿보게 한다.

처음 온천장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온천장이라는 곳을 불가사의한 로맨틱한 장소이거니-외국에서는 문헌이나 사실에 잇서 온천장을 무대로 만흔 로매쓰가 잇슬 뿐 안이라 조선에서도 그러한 사실이 만흠으로……291)남우훈(南又薰), 「온양 온천 삽화」, 『별건곤』 24, 1929년 12월 1일, 9쪽.

그런 온천에서 남우훈은 무엇을 느꼈을까? 1928년 말에 온양 온천을 여행하며 겪은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정거장에 나릴 때에는 어두운 밤이었다. 처음 길이 되여서 온천이 어데 잇는지 여관이 엇더한지 아모 것도 아지 못하는 나는 여관 안내자에게 끌여 그다지 크지도 안이한 여관에 들게 되었다. …… 욕장 근처에는 일본 사람들의 주택, 여관, 상점 등이 온천을 선두로 나라니(列)하고 잇다. 그리고 우리네의 거리(街)에서 볼 수 없는 활기를 그 곳에서 보게 된다. 조선의 도시 모다 그러한 것과 가티 조고마한 온천장까지도 그들의 독무대가 되고 잇다. …… 나는 20분 쯤 지나서 욕탕에서 나왓다. 온천에서 일을 보는 일녀(日女)가 “하야이데스네(빠르시네요).” 한다. 나는 우스면서 “하야이쟈 나인다. 구루시인다(빠른 게 아니라 괴로워).”라고 하였다.292)남우훈, 「온양 온천 삽화」, 『별건곤』 24, 1929년 12월 1일,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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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 온천
온양 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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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온천은 ‘일본인의 거리’이고 ‘조선인의 거리’와는 다른 활기가 넘쳤다고 한다. 그곳을 여행하는 남우훈도 역시 일본어로 일본인 종업원과 응대하고 있는데, 그 장면은 왠지 겉돈다. 남우훈의 뭔가 어색한 듯한 표정과 일본인 종업원의 능숙한 말솜씨가 대비되는 풍경이 떠오른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모든 온천을 독차지였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이 개발하고 경영하던 온천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중부 지방의 유성 온천이다. 『동아일보』 1927년 7월 26일자에는 유성 온천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 이름이 아즉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아니한데 비해서는 춘추로, 더욱이 성하절(盛夏節)에 각지로부터 피서객이 그 수가 적지 안타. …… 대정 원년(1912년)에 공주 김갑순 씨가 경내를 수축, 정리한 후에 이름을 유성 온천이라 하엿고……

김갑순(金甲淳, 1872∼1961)은 공주 감영(公州監營)의 하인이었다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갖은 방법으로 부를 일궈 ‘공주 갑부 김갑순’이라는 호칭으로 회자(膾炙)되었으며, 악명 높은 친일파로 조명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인이 개발하는 온천 사업을 눈여겨본 그가 이 시기에 유성 온천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유성 온천은 라듐(radium) 에마나티온(emanation) 함량이 다른 온천보다 많아 약천(藥泉)으로서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주목받았다.293)駒田亥久雄, 「儒城新溫泉調査報文」, 『朝鮮地質調査要報』 3, 朝鮮總督府 地質調査所, 1926, 73∼74쪽. 라듐의 약리성(藥理性)은 이미 1910년대부터 지적되고 있었다.

라듐의 방사선과 라듐 에마나티온은 동일한 성질과 작용을 하는데 사람의 인체에 불가사의한 작용을 하여 침통(沈痛), 제염(制炎), 살균, 발효 등의 작용이 있어서 중풍, 류마치스, 신경통 등의 치료에 다대한 효력이 있다.294)吉木彌三, 「ラヂウムに就て」, 『朝鮮及滿洲』 72號, 朝鮮及滿洲社, 1913.7.

유성 온천은 전국의 온천 가운데 이 라듐의 함량이 제일 많은 곳으로 알려졌다. 1926년에 김갑순은 유성 온천 주식회사를 창설하여 욕장을 일신(一新)하였는데 일본 여관도 몇 채가 건설되었다. 이에 따라 충청남도 도청에서는 신유성 온천과 구유성 온천 사이에 시가 건설을 추진하여 유성 온천 여행 유치를 촉진하였다. 1934년 4월 22일은 일요일이기도 하여 벚꽃 구경과 온천 목욕을 하려는 이들이 몰려들어 장날을 이루기도 하였다는 기사는295)「앞을 다투는 탐화객 유성 온천에 운집」,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34년 4월 29일자. 유성 온천이 중부 지방의 명소로 자리 잡았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함경도에 위치한 주을 온천은 온천 가운데에서도 특이한 곳이다. 그것은 1920년경 러시아 망명객(러시아 혁명으로 망명한 러시아 귀족들 일부) 60여 명이 옮겨와 러시아풍의 주택을 짓고 러시아 마을을 형성하면서296)「서양인 별장 지대 풍경」, 『삼천리』 6권 9호, 1934년 9월, 174쪽.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고자 하는 이들의 발길을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를 매개하고 촉진한 것은 역시 조선 총독부 철도국의 역할이었다. 청진원산선이 1921년 11월 21일부터 주을 온천장까지 연장 운행하였으며,297)「경성선 연장 개통」, 『동아일보』 1921년 11월 12일자. 1925 년 12월 25일부터 주을 온천 자동차 상회 경영 자동차와 여객의 연락 수송을 개시하여298)朝鮮總督府 鐵道局, 『大正十四年度年譜』, 1925, 24쪽. 온천 여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전반기까지는 아직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1923년경에 함경북도를 47일 동안이나 여행한 박달성(朴達成)은 청진에서 주을행 기차를 탔는 데에도 불구하고 주을 온천에 들를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나남으로 향하였다.299)박달성(朴達成), 「함북 종횡 사십유칠일(咸北縱橫四十有七日)」, 『개벽』 43, 1924년 1월 1일, 149쪽. 그러다가 1926년 주을 온천이 철도국이 선정한 조선의 명승(名勝) 42처에 들어간 일곱 개 온천 중 하나로 선정된 것을300)「반도의 명승 42처 선정」, 『동아일보』 1926년 5월 25일자. 계기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 같다. 1932년에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실린 기행문을 보면 1930년대에 들어 주을 온천이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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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을 온천의 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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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을 온천 입욕 기념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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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최근 철도국과 시인, 묵객(墨客)의 입으로부터 성(盛)히 선전되는 주을 온천을 기억하시겟슴니다. 주을 온천이란 아루까리 성분이 만허서 멀니 동래 온천이나 온양 온천을 능가하며 요모조모 헤치고 드러가는 입 로산수(入路山水)의 절미(絶美)로서 일본 사람들은 일본의 벳푸(別府) 온천보다 낫다고 경탄하며 또 만주 등지에서 오는 영·미국인들도 대련(大連)의 탕강자(湯岡子) 온천보다도 천질(泉質)이 조타고 격칭(激稱)하는 유명한 온천이외다.301)「노서아 망명객촌 볼세비끼 정부에 반긔를 들고 함북 주을의 60명 집단 촌락 광경」, 『삼천리』 4권 9호, 1932년 9월 1일.

그리하여 1937년 『동아일보』에 소개된 주을 온천은 경치가 수려하고 온천 유량이 풍부하고 라듐을 함유하여 류마치스, 부인병 등에 효능이 있다는 점, 여관 설비가 좋은 점 등을 선전하면서 ‘북국(北國) 대표의 명승지’로 부상하였다.302)「명승고적의 북국」, 『동아일보』 1937년 12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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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각 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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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온천이 ‘관광 명소화’되는 과정에는 조선 총독부 철도국이나 신문사의 선전과 기획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특히 철도국은 전국 각지의 온천 여행을 장려하기 위해 할인 요금 제도를 도입하였다. 동래 온천 여행은 1928년 5월 15일 조선 와사(瓦斯, 가스) 전기 주식회사와 연대하여 동래 온천행 할인 왕복 승차권 발매를 개시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설 철도와의 연계를 꾀하여 관광객을 유도하였다.303)朝鮮總督府 鐵道局, 『昭和三年度年譜』, 1928, 23쪽. 1928년 12월 1일부터 주말의 온양 온천행 여객에 대해 운임 4할을 할인하자 1929년 1월 1일부터 13일 동안에만 800명을 수송하기도 하였다. 이에 힘입어 신천·온양·용강·주을·오룡배·동래·유성의 온천행 여객에 대해 운임 할인을 3할 할인으로 개정하였고, 일요일과 제일에 한하여 경성역과 온양 온천역 간에는 직통 열차 운전을 개시하기도 하였다.304)朝鮮總督府 鐵道局, 『昭和三年度年譜』, 1928, 26쪽. 이러한 방식은 상대적으로 여행객이 적은 겨울철의 여행객 수요를 창출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것 같다.

1935년에 잡지 『삼천리』에 소개된 온천장 안내 기사를 토대로 당시 전국 온천장을 일람해 보면 표 ‘1935년의 전국 주요 온천’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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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풍리 스키장
신풍리 스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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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겨울철의 여행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관광 상품이 스키와 온천을 접목시킨 방식이다. 스키 여행은 1931년경부터 등장하였다. 조선 총독부 철도국은 1931년 12월 15일부터 왕장 퇴조행 스키 여객에 대해 운임 할인을 하고 있고 12월 26일부터 삼방행 스키 여객에 대한 할인을 실시하였다.305)朝鮮總督府 鐵道局, 『昭和六年度年譜』, 1931, 29쪽. 마침 1932년 1월 17일에는 원산에서 원산 체육 협회가 주최하는 전 일본 스키 선수권 및 메이지 신궁(明治神宮) 스키 경기회 조선 예선회가 열려 여기에 참가하는 이들에 대한 운임 할인이 있었다.306)朝鮮總督府 鐵道局, 『昭和六年度年譜』, 1931, 29쪽. 1933년에도 삼방·온정리·왕장 퇴조·성진의 스키장행 여객에 대해 운임 할인을 하고 있고, 1월에는 전 스키장에 대한 운임 할인을 하였다.307)朝鮮總督府 鐵道局, 『昭和八年度年譜』, 1933, 27쪽. 1934년에 발간한 『조선 여행 안내기』에 보면 겨울의 스키장에 대해 “동해안 지방의 삼방, 외금강, 퇴조 등 지방은 눈의 질이나 적설량이 좋아서 스키에 적합하여 점차 융성해지고 있다.”고 소개하였고, 특히 외금강 스키장은 온천과 숙박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어 연말연시에 금강산 탐승(探勝)과 스키를 즐기는 데에 가장 적합하다고 선전하고 있다.308)朝鮮總督府 鐵道局, 『朝鮮旅行案內記』, 1934, 218∼221쪽.

<표> 1935년의 전국 주요 온천
구분
온천명
특징 차비 호텔과
일본식 여관
조선 여관
배천 -서울에서 가장 근접
-주말여행에 적합
-경의선을 타고 토성(土城)에서 갈아탐
-2시간 소요
3등 왕복(경성)
1원 83전
-천일각(天一閣) : 3원부터
-배천 온천 : 4원 50전부터
반도 여관, 조선 여관 : 1원∼1원 50전
온양 -경부 가도로 천안에서 경남 철도 환승하여 온양 온천역 하차
-온천 수질 양호
-평일 왕복(경성) 3할 할인 2원 78전
-주말 1원 98전
온천 호텔 : 4원 조선 여관 : 1원부터
동래 -부산에서 약 40리
-수질은 단순 함염천
-내탕 완비 등 조선 제일
  3원 50전부터 1원 50전
해운대 -이광수의 기행문으로 유명한 해변의 풍경 수려한 곳
-부산에서 40리, 동래에서 20리
-알카리성 다량 함유
-여름 해수욕장
  여관비 타 지역과 대동소이 여관비 타 지역과 대동소이
주을 -함경선 주을역에서 30리
-자동차 있음
-산간 계류 주변 풍경 절경
-러시아 인 별장 많음
  선선각(鮮仙閣), 천세관(千歲館)은 3원부터 온천 여관 : 1원 50전
용강 -진남포에서 북으로 70리
-300년 전 발견된 유래 있는 온천
     
신천 -조철 신천역 하차
-신경병 특효
-온천량 풍부
  여관비 대동소이 여관비 대동소이
온정리 -천하명승 금강산 내
-부근 탐승지
-원산과 장전에서 자동차 연락
-온도 낮은 것이 흠
     
기타 -경의선 남천서 80리에 평산 온천
-대전 20리 부근에 유성 온천
-신천서 50리에 달천 온천
-송화 온천
     
✽「온천장 안내」, 『삼천리』 7권 1호, 1935년 1월 1일에서 정리.

온천과 더불어 새로운 관광 상품으로 부상한 것은 봄의 벚꽃 구경이다. 일제 강점기에 벚꽃을 널리 심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병합 이래 내지인(內地人) 이주가 증가함에 따라 그들의 거의 국민성이라고 할 만한 벚꽃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고 고국의 봄을 생각할 때마다 조선에 벚꽃이 없는 것이 얼마나 쓸쓸하였을까? 그 결과 100그루, 200그루, 시험적으로 요시노 사쿠라를 이식(移植)하였는데…… 각지에서 이식하게 되었다.309)龜岡榮吉, 『四季の朝鮮』, 朝鮮拓殖資料調査會, 1926, 5∼6쪽 : 한국 지리 풍속지 총서 298권, 경인 문화사, 1995.

그뿐 아니라 1926년 당시 전국에서 벚꽃으로 이름난 곳은 마산, 호남선 의 장성·송정리, 수원의 화홍문·옛 행궁터·화산, 경성의 창경원·장충단·우이동, 인천 월미도, 개성 철도 공원 등이었다.310)龜岡榮吉, 『四季の朝鮮』, 朝鮮拓殖資料調査會, 1926, 7∼52쪽.

봄의 여행으로서 벚꽃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10년대 초로 보인다. 이 중 이른 시기에 명소로 자리 잡은 곳은 경성 우이동의 벚꽃이다. 『매일신보』 1915년 5월 7일자에는 우이동 벚꽃 명소에 대해 “우이동의 사쿠라는 3년 전 일본인이 처음 발견한 이후부터 앵화의 명승지로 경성 내외에 이름이 널리 났다.”고 소개한 것으로 보아 대략 1912년경부터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1915년 무렵에는 “사람들의 발자취가 낙역부절(絡繹不絶)하며 자동차, 마차, 인력거, 자전거가 연하여 왕래하여 하루에 그 수효가 기천(幾千)에 이르고 사람의 수효는 기만(幾萬) 명으로 가히 계산할지라.”311)『매일신보』 1915년 5월 7일자.라고 할 정도가 되었다.

우이동의 벚꽃이 만개(滿開)할 때에 즈음해서 철도국은 관앵 열차(觀櫻列車)를 운행하였다. 유흥객의 편의를 고려한 열차 운행은 『매일신보』 1915년 4월 25일자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수일래 봄바람이 맹렬히 불어 저녁이면 아주 선선하여지는 까닭에 꽃피는 때가 조금 느려진 모양이라. 금일의 일요일을 이용하여 철도국에서 우이동과 남대문 사이에 임시 기차를 운전하여 사쿠라 꽃구경 가는 이에게 편리케 한다 함은 누누이 보(報)한 바, 적은 비용 가지고 일요의 틈을 이용하여 유쾌한 천지에 환락을 취하고자 고대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 모양이라. 우이동 가는 열차(列車)는 금일 오전 8시 43분 남대문을 발하여 오전 9시 28분 창동역에 도착하였다가 오후 4시 24분 종일 유흥에 취한 손을 다시 싣고 창동역을 떠나 오후 5시 19분 남대문역에 도착하는데 떠나는 시각 돌아오는 시각이 아주 알맞고 차비는 왕복에 35전.312)「관앵 열차(觀櫻列車)」, 『매일신보』 1915년 4월 25일자.

우이동의 벚꽃은 어떻게 하여 명소가 되었을까? 그 경위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15년 기사 가운데 당시 자작(子爵)인 조중응(趙重應)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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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동 벚꽃 보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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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서는…… 사쿠라 꽃은 그다지 진중하게 여기지 않고 또한 그 열매도 그렇게 귀중히 여기지 아니하엿건만은 아직까지 수만 주(株)의 벚나무가 남아 있어 경성 시민의 한 낙원을 이룸은 어찌한 까닭인지 한번 알 만할 일이라. …… 예전에 조선에서는 군기시(軍器寺)에서 모든 무쇠를 만드는 중 특히 활을 짓는 데 매우 힘을 들이던 바라. 그러나 경성 근처에는 활을 제조하는 데 극히 긴요한 재료 되는 벚나무가 드문 고로 벚나무를 많이 심기로 하였는데 벚나무는 화강석 바위가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고로 북한산맥이 떨어져 굴복한 우이동의 땅을 가리워 벚나무를 몇 천만 주나 심게 한 것이니, 즉 우이동의 사쿠라는 군사상의 필요로 심어진 것이라.313)「우이동앵(牛耳洞櫻)의 유래(由來)」, 『매일신보』 1915년 5월 5일자.

조선시대에 활의 재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화강암이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벚나무를 우이동에 심었다고 한 것이다. 그 후 “시세가 변하여 총의 소용이 늘고 활을 제조하지 않게 되면서 백성들이 벚나무를 남벌(濫伐)하는 한편 보다 열매의 효용이 큰 밤나무를 심어 매년 감소되어 왔다.”고 지적하고 이곳의 보호를 역설하는 한편, 경성의 유람할 곳으로 훌륭한 곳이라고도 하였다.314)「우이동앵의 유래」, 『매일신보』 1915년 5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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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동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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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록을 통해 우이동 벚꽃의 유래는 일본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조선 토종의 벚나무임을 알 수 있으나 그것이 보호를 받고 명소로 자리를 잡은 것은 역시 한일 병합 이후 일본인에 의한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일본 국내에서 봄의 여행 명소는 벚꽃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일본인의 벚꽃에 대한 동경’이 조선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던 벚꽃을 명소로 발견하게 하였고, 이에 조선 총독부 철도국의 정책이 맞물리면서 봄철의 관광 명소로 정착되는 과정을 밟은 것이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조선에서의 벚꽃 확산을 일본인들이 ‘야마토 민족의 발전을 보는 것’으로 설명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함경도에 들어가면 원산, 함흥, 성진, 주을 등에도 꽤 벚꽃이 심어져 북진(北鎭)의 중관(重關), 회령(會寧)에 이르기까지 거의 벚꽃이 재배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성황이다. 벚꽃과 함께 국력이 신장하여 야마토(大和) 민 족의 발전을 보는 것은 기쁜 일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조선의 봄도 내지에 뒤지지 않는 벚꽃을 보게 될 것이다. 특히 질서 있게 심어진 점에 산벚나무의 복잡함보다도 한층 경치를 좋게 하는 것이다.315)龜岡榮吉, 『四季の朝鮮』, 朝鮮拓殖資料調査會, 19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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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관앵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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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벚꽃 명소 유람은 이러한 의도 여하에 관계없이 조선인의 일상 속에서 봄철 유흥의 중심으로 정착된 것 또한 사실이다. 우이동에 벚꽃이 만개할 즈음에 철도국은 임시 열차를 편성하여 여행객을 유인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벚꽃 명소는 전국 각 지역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여기에는 언론사가 주최하는 여행단 기획이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예를 들면 1926년 4월11일 부산일보사 및 조선민보사가 주최하는 마산, 진해 관앵 단체 여행과 운임 할인,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경성일보』 지국 주최 경성 관앵단과 운임 할인이 있었으며,316)朝鮮總督府 鐵道局, 『大正十五年昭和元年度年譜』, 1926, 22쪽. 1927년 4월에 진해 벚꽃 명소에는 마침 진해에서 개최하는 경상남도 창원군 외 2부 18군 물산 공진회와 겹쳐 대활기를 띠어 진해 방면으로 가는 단체만으로 2만 명을 넘을 정도였 다.317)朝鮮總督府 鐵道局, 『昭和二年度年譜』, 1927, 25∼26쪽. 1928년 4월의 승차 인원은 216만 3006명이었는데 벚꽃 시즌을 맞이하여 각지의 관앵단을 위한 임시 열차가 운행되었다.318)朝鮮總督府 鐵道局, 『昭和三年度年譜』, 1928, 23쪽. 1931년에 철도국에서 운임 할인을 받은 여행단과 여행객은 표 ‘1931년 운임 할인 여행단과 인원’과 같으며, 이와 같은 신문사 주최 관앵단은 해마다 운영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행을 조선인이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식민지 현실은 조선인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 일쑤였다. 여행할 때의 복장은 한국식보다는 양복이 더 대접을 받는 상황이었고,319)「최후로 멧조각 잡동산이(雜同散異)」, 『개벽』 43, 1924년 1월, 189쪽. “양복쟁이라고 차장, 선인(船人), 여관 뽀이까지 별(別) 대접을 해준다. 하륙 시(下陸時)에도 양복쟁이를 만저 내리워 준다. 양복 멋이 조키는 좃타. …… 조선복을 입엇더니 차장이 주목, 선인(船人)이 주목, 여관 뽀이까지 우습게 보아 준다.” 여행지에서도 조국의 국토를 여행하면서도 손님이 된 듯한 느낌을 저버릴 수 없어 다음과 같은 탄식이 절로 나오기도 하였다.

일본인 시가(市街)를 볼 때에는 맥이 풀니며 장태식(長太息)이 나올 뿐이고 조선인 시가를 볼 때에는 하염업는 눈물만 수루루 나올 뿐이다. …… 저건 누구의 것이며 이건 누구의 것이냐? 아-한아도 업구나 한아도 업서! 우리의 것이란 한아 업구나!320)박달성, 「함북 종횡 사십유칠일」, 『개벽』 43, 1924.1, 148쪽.

<표> 1931년 운임 할인 여행단과 인원
주최 행선지 인원(명)
조선민보사(4월) 마산-진해 관앵단 1,304
조선민보사(4월) 진해 관앵단 704
대구일보사(4월) 동래 온천 관앵단 704
조선 여행 구락부(4월) 경성 견학단 1,925
서선 여행 구락부(4월) 평양 견학단 3,842
서선 여행 구락부(5월) 안동 관앵단 1,115
개인 여행(5월) 영강대 284
서선 여행 구락부(5월) 제2회 안동 관앵단 964
✽『昭和六年度年譜』, 朝鮮總督府 鐵道局, 1931, 25쪽에서 작성.

그나마 도시의 하층민에게는 양복을 사 입는 것만도 여의치 않을 뿐더러 여행은 언감생심(焉敢生心) 빈곤한 삶과 아무 관계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하물며 조선(朝鮮) 호텔이나 명월관(明月館) 국일관(國一館)에서 선풍기(扇風機)ㅅ바람에 감기(感氣)들 근심을 하면서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따라 주는 어름보다 더 찬 맥주(麥酒)를 마시는 그러한 풍류(風流)는 오직 소수(少數)의 부신(富神)의 선민(選民)에게만 태운 복(福)이다. …… 돈푼이나 잇는 사람은 해운대(海雲臺)로 가네 석왕사(釋王寺)로 가네 삼방(三防)으로 가네, 다 피서(避暑)하러 다라나고 생활(生活)의 열패자(劣敗者)들만 비지땀을 흘리고 짓구즌 빈대밥 노릇을 하는 심이다.321)성서학인, 「서울의 녀름」, 『개벽』 38, 1923.8, 49∼50쪽.

그렇다고 해도 일제 강점기 여행은 꾸준히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였으며, 많은 조선인이 여행에 나섰다. 식민 상태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조선인이 가장 많이 여행한 곳은 어디일까? 아마도 금강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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