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1. 국호에 숨겨진 우리 역사
  • 황제의 출현과 국호, 대한제국
신명호

조선 왕국은 19세기에 들어 서구 열강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러시아, 미국, 독일 등 열강이 조선을 압박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종의 왕비 민씨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당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였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까지 있었다.

고종은 1896년(고종 33) 2월 11일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면서 왕태후 홍씨(헌종의 두 번째 왕비 효정 왕후(孝定王后))와 태자비 민씨(순종의 첫 번째 태자비 순명 왕후(純明王后))를 러시아 공사관에 가까운 경운궁(慶運宮)으로 옮기게 하였다. 고종은 장차 경운궁에 이어(移御)하여 그곳에서 제국을 선포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아관파천 기간 중 고종은 경운궁으로의 이어 및 제국의 선포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였다. 고종은 1896년 8월 10일 경운궁을 수리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경복궁에 있던 명성 왕후(明成王后)의 혼백과 유골도 경운궁으로 옮겨 왔다. 아울러 고종은 『독립신문(獨立新聞)』 창간과 독립문 건립을 후원하였는데, 이는 장차 제국 선포를 위한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6)이민원, 「칭제 논의(稱帝論議)의 전개와 대한제국의 성립」, 『청계 사학』 5,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청계 사학회, 1988. 이 런 준비 과정을 거쳐 1897년(고종 34) 2월 20일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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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덕수궁)
경운궁(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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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환궁한 이후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상소문(上疏文)들도 올라왔다. 당시 고종의 황제 즉위는 고종 자신의 의지는 물론 대신과 지식인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일제에 의해 추락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였으며, 대신들과 지식인들은 ‘황제가 없으면 독립도 없다.’는 인식이 강하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왕이란 칭호는 황제보다 낮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 조선인들은 왕을 황제에게 종속적인 존재로 여겨왔으므로 황제 즉위는 우리의 군주가 누구에게든 독립적이며 아무에게도 낮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최선의 수단’으로 간주하여 황제 즉위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 명성 왕후 시해에 항의하는 반일 여론이 황제 즉위 여론을 크게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7)한영우, 『명성 황후와 대한제국』, 효형 출판, 2001.

이 같은 여론에 힘입어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에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기 직전에 고 종은 대신들을 만난 자리에서 국호를 새롭게 하겠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대례의궤(大禮儀軌)』에 의하면 고종이 국호를 개정하려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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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어진
고종 황제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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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말하기를, “경들과 의논하여 결정하고 싶은 것이 있다. 지금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는 때이니, 모든 예법도 다 새로워져야 한다. 이제부터 환구단에 첫 제사를 지내려 하는 때에, 당연히 나라의 이름을 새로 정해야 할 것이다. 대신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으로서 나라의 초기에 천명을 받고 삼한을 통합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일찍이 여러 나라의 문자를 매번 보건대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한’으로 된다는 옛날의 징표로서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니 천하에 공포하지 않아도 천하가 모두 다 대한이라는 국호를 알 것이다.” 하였다.8)『대례의궤(大禮儀軌)』, 조칙(詔勅), 정유년(1897) 9월 17일.

고종은 옛날 천명을 받아 삼한을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였던 때처럼, 새로 천명을 받아 황제에 오르는 그 시점에서 국호를 대한으로 고침으로써 당시 이리저리 갈라진 국론(國論)을 대통합하여 새로운 도약의 전기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고종의 제안에 대신들도 모두 찬성함으로써 국호는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뀌었다.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던 그 시점에서 고종은 황제 였으므로 대한은 왕국이 아니라 제국이었다. 이처럼 대한제국이라고 하는 국호는 조선 왕국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일신(一新)하여 새로운 통합과 도약의 전기로 삼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고종의 황제 즉위와 함께 탄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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