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4. 국왕을 국왕답게 하는 이름들
  • 왕이 받는 책봉 명칭들, 봉작명
신명호

세습 군주였던 조선시대 왕은 즉위할 때까지 몇 차례의 책봉 과정을 거쳤다. 그것은 출생 후의 원자, 10세 전후의 왕세자 또는 왕세제(王世弟) 혹은 왕세손(王世孫), 그리고 즉위 후의 조선 국왕(朝鮮國王)의 세 가지였다. 물론 이 같은 봉작명(封爵名) 또는 책봉명(冊封名)이 그대로 조선시대 국왕의 호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원자 책봉은 중국과 관계없이 조선 자체에서 거행되었지만, 세자 책봉과 국왕 즉위는 중국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하였다. 원자 책봉의 경우 왕의 적장자이면 출생 이후부터 자연적으로 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왕의 적장자가 아닐 경우에는 원자에 책봉되는 의식을 별도로 거쳤다.

예컨대 사도 세자의 경우가 그렇다. 사도 세자는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映嬪李氏)의 소생이었으므로 보통의 경우라면 일개 왕자군(王子君)일 뿐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당시 아들이 없었으므로 영빈 이씨의 소생을 출생하던 당일 특별히 명령하여 원자로 결정하였다. 이 밖에도 숙종의 후궁이었던 장 희빈(張禧嬪) 소생자로서 훗날 왕위에까지 올랐던 경종은 출생 후에 원자로 결정되기까지 복잡한 논란을 겪어야 하였다. 이렇게 원자로 결정되면 그 후부터 원자 아기씨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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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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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책봉은 중국에 보고하지도 않고 승인을 받지도 않았다. 따라서 왕의 적장자로서 원자가 되거나 아니면 특별히 원자에 책봉되는 경우에는 원자로 인정한다는 조선 내부의 책봉문만 있고 주청문(奏請文), 승인문(承認文), 도장 등이 없었다.

이에 비해 중국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하는 세자 책봉 및 국왕 즉위는 주청문, 승인문, 도장 등이 필요하였다. 예컨대 조선시대 세자 책봉이나 국왕 즉위 시에는 으레 책봉을 요청하는 주청문을 중국에 보내고 중국에서는 이에 대하여 고명문(誥命文)이라는 승인문을 보냈다. 아울러 세자와 국왕을 상징하는 도장도 제작하였다.

이 중 왕세자 또는 왕세제 혹은 왕세손에 책봉되는 것은 공식적으로 왕의 후계자로 결정되었음을 나타내는 의식이었다. 왕세자는 왕의 적장자가 받는 책봉 명칭이었으며 왕세제는 왕의 동생이 받는 책봉 명칭이었다. 예컨대 경종의 이복동생이었던 영조는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다만 정종의 동생으로서 왕의 후계자가 되었던 태종의 경우는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에 책봉되었는데, 이는 태종이 태조의 직계 후계자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왕세손은 왕의 손자로서 왕의 후계자가 되었을 때의 책봉 명칭이었다. 세자, 세제, 세손에 책봉되면 그를 상징하는 도장에 이 명칭을 사용하였다. 예컨대 세자의 도장은 왕세자인(王世子印)이었다.

왕위에 즉위할 때에도 중국에 사신을 보내 전왕(前王)의 작위(爵位)를 계승하여 책봉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중국에서 책봉한 공식 명칭은 조선 국왕이었다. 조선 국왕이라는 책봉 명칭은 왕이 중국이나 일본 등에 외교 문서를 보내 거나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릴 경우에 사용하였었다.

원자, 왕세자, 국왕이라고 하는 공식적인 책봉 명칭 다음에는 또한 궁(宮), 저하(邸下), 전하(殿下)라고 하는 경칭을 덧붙여 원자궁(元子宮), 왕세자 저하(王世子邸下), 국왕 전하(國王殿下)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궁, 저, 전은 본래 건물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궁, 저, 전은 격이 같은 건물이 아니라 서로 품격이 다른 건물이고, 그 명칭은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 결정되었다.

저하 또는 전하처럼 권력자의 존칭을 건물과 관련하여 부르는 관행은 중국 진시황 때부터 시작되었다. 진시황은 폐하(陛下)라는 경칭을 사용하였는데, 폐(陛)는 본래 계단이라는 의미였다. 계단 중에서도 아무 계단이 아니라 옥좌로 통하는 특별한 계단이 폐였다. 황제가 옥좌에 앉을 때 이 폐를 통해 올라갔던 것이다.

신하들은 모두 폐 아래에만 있고 그 위로는 올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할 말이 있으면 폐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 즉 폐하(陛下)에 있는 사람을 통해 말을 하였다. 결국 폐하는 ‘계단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계단 아래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상대해야 하는 존귀한 분’이란 경칭으로 바뀌었던 것이다.22)『사기집해(史記集解)』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제6, “蔡邕曰 陛階也 所由升堂也 天子必有近臣 立於階側 以戒不虞 謂之陛下者 群臣與天子言 不敢指斥 故呼在陛下者 與之言 因卑達尊之意也.” 조선에서의 저하, 전하도 마찬가지 의미에서 경칭으로 사용되었다.

국왕의 경우 전하 말고도 국왕을 상징하는 수많은 경칭(敬稱)이 있었다. 예컨대 주상(主上), 상(上), 성상(聖上), 당저(當佇) 등이었다. 이런 경칭들은 신료들이 왕을 지칭할 때 으레 사용되었다.

세습 군주제인 조선에서는 원칙적으로 전왕이 사망한 뒤에야 후계 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 현실에서 원칙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전왕이 살아있는 데도 후계 왕이 즉위하는 때가 그런 경우였다. 이런 경우 왕위에서 물러난 왕은 상왕(上王), 노상왕(老上王), 태상왕(太上王) 등으로 불렸다. 상왕, 노상왕, 태상왕은 특별한 책봉 의식을 거치지 않았다. 단지 후 계 왕이 살아 있는 전왕을 우대한다는 의미에서 이 같은 호칭을 올리고 예우를 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상왕, 노상왕, 태상왕은 존호(尊號)라고 하였다. 살아서 왕위에서 물러난 왕은 이 존호로 호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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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옹주가대사급성문(淑愼翁主家垈賜給成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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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은 현재 재위에 있는 왕의 아버지를 의미하였다. 예컨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왕위에 오른 정종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게 상왕이라는 호칭을 올렸다. 노상왕은 상왕의 형제인 경우에 사용하였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태종과 정종이 각각 상왕과 노상왕으로 불린 경우가 그러하였다. 이에 비해 태상왕은 최고의 예우를 할 때 올리는 호칭이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조선 건국 시조인 태조 이성계를 태상왕으로 올린 경우였다. 조선시대 원자, 세자, 세제, 세손, 국왕, 상왕, 노상왕, 태상왕 등의 호칭은 오직 세습 군주였던 왕의 경우에만 나타난다. 이런 호칭들이 바로 조선시대 최고 권력자였던 왕의 지위를 극명(克明)하게 대변하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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