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5. 국왕을 이름으로 심판하라
  • 존귀한 분에게는 존귀한 이름을, 존호
신명호

조선시대에 생전의 왕을 부르는 호칭 중에서 존호(尊號)는 현 국왕보다 존귀한 호칭이라는 의미로서의 존호와 왕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한 호칭이라는 의미로서의 존호 두 가지가 있었다. 국왕보다 존귀한 호칭은 물론 현 국왕보다 상위의 지위에 있음을 의미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 정종, 태종 등이 상왕이나 태상왕이 된 경우가 그것인데, 이런 경우에 현 국왕은 자신보다 존귀한 존재임을 표시하기 위해 상왕이나 태상왕이라는 호칭을 올렸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별로 많지 않았으므로 조선시대 왕의 존호는 주로 살아 있는 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이 같은 예에 의해 조선시대 국왕 가운데 생전에 존호를 받은 최초의 왕은 태조 이성계였다.26)신명호, 앞의 글.

태조에게 존호를 올리자는 요청은 권근(權近)이 시작하였다. 1399(정종 1) 10월 갑진일(甲辰日)에 권근은 상소문을 올려, 효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당시 상왕으로 있던 태조 이성계에게 존호를 올려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이때 권근은 태조 이성계에게 존호를 올려야 하는 근거로서 “근심하며 부지런히 덕을 쌓아서 왕업을 창건하고 대통(大統)을 전하여 억만년 무궁한 기업을 열어 전하에게 전하였으니, 높은 공과 성한 덕이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다.”는27)『정종실록』 권2, 정종 1년 10월 8일 갑진. 내용을 제시하였다. 즉 태조 이성계의 공덕을 찬양하는 존호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태조 이성계에게 존호를 올리기 위한 봉숭도감(封崇都監)이 1400년(정종 2) 6월 기유에 설치되었고 6월 계축에 ‘계운신무(啓運神武)’라고 하는 네 글자의 존호를 올렸다. 이 ‘계운신무’라고 하는 네 자의 존호는 태조 이성계가 신무로서 조선을 창업한 공덕을 표시하는 호칭이었다.

이후로 조선시대 내내 살아 있는 국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존호가 무수하게 올려졌다. 이때마다 상호도감(上號都監) 또는 진호도감(進號都監)이 설치되어 관련 업무를 추진하였다.

그런데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거쳐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승천체도 열문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라고 하는 여덟 자의 존호가 올라간 이후로는 으레 여덟 자의 존호를 올렸다. 또한 살아 있는 국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존호는 한 차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올리기도 하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존호를 올리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 예컨대 광해군은 여섯 차례에 걸쳐 존호를 받기도 하였다. 또는 대비 등에게 존호를 올릴 때 현왕에게 으레 존호를 올리는 일도 많았다. 이러다 보니 수차례의 존호를 받은 왕의 호칭은 수십 자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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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금보
태조의 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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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존호가 결정되면, 그 존호는 옥으로 제작한 책(冊)과 금으로 제작한 도장인 보(寶)에 기록하여 왕에게 올렸다. 왕에게 여러 차례 존호를 올렸을 경우 그때마다 책과 보를 제작하였다. 이 결과 조선시대 왕들 은 후기로 갈수록 더 많은 옥책과 금보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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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옥책
태조의 옥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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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을 거쳐 정한 존호는 왕의 공식적인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신하들이 왕에게 상소문을 올리는 경우에는 존호를 반드시 썼다. 존호를 여러 차례 받은 경우에 왕에게 상소문 등을 올린다면 받은 순서대로 존호를 썼다. 예컨대 세 차례 존호를 받았다면 여덟 자씩 순서대로 하여 24자의 존호를 쓰고 맨 뒤에 주상 전하(主上殿下)라고 쓰는 것이었다.

명분상 국왕의 존호는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호칭이었으므로 업적이 많은 국왕이 더 많은 존호를 받아야 하였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의도적으로 존호를 많이 받은 왕도 있고, 대비 등이 존호를 받을 때 의례적으로 존호를 받은 왕도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들은 점점 더 많은 존호를 받게 되었다. 이는 조선시대 왕의 존호는 각 왕대의 정치사에 밀접하게 관련된 호칭이었음을 의미하며 아울러 조선 왕조가 건국된 이후 유교적 사고방식이 심화될수록 왕의 공덕을 문자로 찬양하는 유교적 관행이 점점 더 강화되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조선시대 국왕의 존호는 기본적으로 살아 있을 때 국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올리는 호칭이었으며, 시호(諡號)는 국상(國喪) 이후 입관(入棺) 뒤에 왕의 생전 행적을 평가해 정하는 칭호였다. 그런데 어떤 국왕이 승하한 이후 그 국왕의 특정 업적이 갑자기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에는 추후에라도 존호를 더 올리곤 하였다. 이때는 나중에 올린다고 하여 추상존호(追上尊號)라고 하였다.

예컨대 1772년(영조 48)에 현종에게 존호를 추상한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772년 10월 22일에 영조는 현종을 불천위(不遷位)로 하고 아울러 현종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한 존호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에 조정의 대신, 중신들이 당일로 현종에게 추상할 존호를 논의해 올렸는데, 그것은 ‘소휴연경 돈덕수성(昭休衍慶敦德綏成)’의 여덟 자였다. 이렇게 올린 추상존호는 기왕에 올렸던 시호보다 앞에 쓰였다. 즉 현종의 존호를 추상하고 제작한 보(寶)에 ‘소휴연경 돈덕수성 덕문숙무 경인창효 대왕지보(昭休衍慶敦德綏成德文肅武敬仁彰孝大王之寶)’라고 새겼는데, 앞의 여덟 글자인 ‘소휴연경 돈덕수성’은 추상존호였고 뒤의 여덟 글자인 ‘덕문숙무 경인창효’는 현종 사후에 올려진 시호였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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