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2장 국왕과 그 계승자들
  • 2. 국왕을 계승하는 왕실 가족
  • 왕세손
김문식

조선시대에 국왕의 손자가 왕세손으로 책봉된 사례는 다섯 경우에 불과하다. 세종의 손자이자 문종의 장자인 단종, 인조의 손자이자 효종의 장자인 현종, 영조의 손자이자 장조(사도 세자)의 장자인 의소 세손(懿昭世孫), 영조의 손자이자 장조의 차자인 정조, 순조의 손자이자 익종(효명 세자)의 장자인 헌종이 그들이다. 그러나 단종과 현종은 왕세손으로 있다가 부친이 국왕이 되면서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의소 세손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왕세손에서 바로 국왕이 된 경우는 정조와 헌종뿐인데, 왕세손이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현 국왕이 재위하는 동안 왕세자가 사망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국왕의 손자가 태어나면 왕위를 계승하게 될 또 한 사람의 후계자가 태어난 셈이므로 왕실로서는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국왕들도 여느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맏손자인 원손(元孫)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이내 그를 왕세손으로 책봉하여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분명하게 했다. 원손이 왕세손으로 책봉되는 나이는 단종, 현종, 정조의 경우에는 모두 8세였는데, 이는 아동이 자라 소학(小學)에 입학하는 나이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소 세손은 2세, 헌종은 4세가 되었을 때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는데, 이는 손자를 빨리 후계자로 결정하여 왕실을 계승하게 하려는 국왕의 욕구가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조가 맏손자인 의소 세손을 왕세손으로 책봉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1750년(영조 26) 8월에 왕세자빈(王世子嬪) 혜경궁 홍씨가 원손을 낳았는데, 당시 영조의 나이는 57세였다. 조선시대의 조혼(早婚) 풍속을 고려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는 손자였다. 그해 11월에 영조는 세손의 사부(師傅)를 종1품 관리 중에서 선발하라고 명령했다. 태어난 지 3개월에 불과한 원손의 스승을 정한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너무 일렀을 뿐만 아니라 왕실의 선 례(先例)에도 없던 일이었다. 1751년 4월이 되자 영조는 왕세손을 책봉하기 위한 책봉도감(冊封都監)을 설치하고, 왕세손의 교육을 담당할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과 왕세손의 호위를 담당할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의 관원을 차출하라고 명령했다. 원손이 태어난 지 8개월에 불과한 시점이었다. 이때 원경하(元景夏)와 박문수(朴文秀)가 왕세손의 사(師)와 부(傅)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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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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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년 5월에 영조는 왕세손 책봉식을 거행했다. 영조는 백성들에게 사면령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인이 대통을 이었는데 원손은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이마에 상서로운 기운을 보이며 너그러운 품성은 중성(重星)의 밝음을 계승했고, 하늘이 징조를 보여 원손이 태어나던 집에는 한밤중에 빛이 뻗쳤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왕들이 남기신 은택을 생각하니 백 년에 두 번 있는 경사이고, 무릎을 싸고 원량(元良, 사도 세자)의 문안(問安)을 따라오니 한 궁전에 세 임금이 있도다. 어찌 나라의 복이 무궁할 뿐이겠는가? 또한 신인(神人)의 기대에도 맞는 것이다.39)『영조실록』 권73, 영조 27년 5월 기유(13일).

이를 보면 영조는 첫돌도 지나지 않은 손자가 부친인 왕세자를 따라와서 함께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을 보고 매우 귀여워했고, ‘한 궁전에 세 임금이 있다’고 하여 든든한 후계자가 있음을 뿌듯해 했다. 그러나 영조의 기쁨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1752년(영조 28) 3월에 왕세손이 갑자기 사망해 버렸기 때문이다. 왕세손의 수명은 햇수로는 3년이지만 실제는 1년 7개월에 불과했다.

정조의 사례를 통해 국왕의 원손이 왕세손을 거쳐 국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1752년 9월에 영조의 두 번째 손자인 정조가 태어났다. 의소 세손이 사망한 지 반년이 지나서였다. 맏손자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던 영조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원손의 ‘원(元)’은 장자를 말하는 것이므로 새로 태어난 손자를 바로 원손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실록에서는 이를 ‘왕손(王孫)’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영조는 신하들과 의논하여 새로 태어난 손자의 호칭을 원손으로 할 것을 결정했다.

금년 안에 왕손을 다시 보게 될 줄을 어찌 생각했겠는가. 슬픔과 기쁨이 마음속에서 교차한다. 지금 이후로 국본(國本)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지만 맏손자가 태어난 경오년(1750)과는 차이가 있으니, 이름을 지은 다음에야 국본을 공고히 하고 인심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빈궁(혜경궁)이 낳은 아들을 원손(元孫)이라 정호(正號)하고, 종묘에 알리고 교서를 반포하는 등의 일은 7일이 지난 이후에 거행하라.40)『영조실록』 권77, 영조 28년 9월 기묘(22일).

맏손자가 태어나자마자 스승을 정했던 영조였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영조는 원손이 3세가 되던 1754년(영조 30) 8월에 보양관(輔養官)을 선발하도록 했고, 민우수(閔遇洙)와 남유용(南有容)이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임명되었다. 원손의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755년 1월이었는데, 첫 교재는 『소학』을 요약한 『소학초해(小學抄解)』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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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용 초상
남유용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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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손 정조가 왕세손으로 책봉된 것은 1759년(영조 35) 2월이었고, 실제로 책봉식이 거행된 것은 윤6월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책봉식은 좀 특별한 점이 있었다. 왕세손을 책봉하는 절차는 기본적으로 왕세자 책봉식과 동일했다. 창경궁(昌慶宮) 명정전(明政殿)에 문무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영조는 왕세손에게 왕세손임을 상징하는 죽책(竹冊)과 교명(敎命), 왕세손인(王世孫印)을 하사했다. 다만 이날 왕세손은 오장복을 입어 칠장복을 입는 왕세자와 위격을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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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죽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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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교명
정조의 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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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왕세손인
정조의 왕세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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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조는 왕세손이 배례(拜禮)를 올린 다음에 궁전 안으로 불러들여 『소학』 제3장을 외우게 했다. 왕세손 책봉식에서 왕세손의 학문적 능력을 시험한 것이다. 왕세손이 훌륭하게 『소학』을 외워 나가자, 영조는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라는 훈계의 말과 함께 왕세손이 외웠던 『소학』 구절을 직접 어필로 써서 내려주었다. 손자를 훌륭한 국왕으로 키우기 위해 할아버지가 직접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인 행동이었다.

옛날에 무왕(武王)은 면복을 입고 스승 상보(尙保)에게서 단서(丹書)를 받았다. 지금 나는 칠장복(구장복이 맞음)을 입었고 너는 오장복을 입었다. 즉 시 글을 써서 주고 얼굴을 맞대어 훈계하는 것을 너는 스승 상보가 단서를 주는 뜻으로 받아들여라. 너는 나이가 어리므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가르치겠다. 반드시 어버이를 사랑하고 연장자를 공경하는 데 더욱 힘쓰도록 해라.41)『영조실록』 권93, 영조 35년 윤6월 경자(22일).

왕세손 정조는 1762년(영조 38) 7월에 동궁(東宮)이 되었다. 왕세자였던 사도 세자가 정치 싸움에 휘말려 사망해 버리자 그의 아들인 왕세손이 국왕을 계승할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왕세손의 나이 11세 때의 일이었다. 왕세손을 동궁으로 정한 것은 명나라 태조 대의 고사를 원용한 것이었다. 왕세손이 동궁이 되자 세손강서원은 ‘춘방(春坊)’이 되었고, 세손위종사는 ‘계방(桂坊)’이 되었다. 왕세손의 위격이 왕세자와 같은 수준으로 변했음을 보여 주는 조치였다.

동궁 정조는 1775년(영조 51) 12월에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영조가 대리청정을 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11월 말이었지만 동궁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신료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에 실제 시행을 둘러싸고는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1776년 3월에 영조가 사망하자, 예조에서는 왕위를 계승하는 절차를 정리하여 보고했고, 그로부터 5일 후에 동궁이자 왕세손인 정조가 왕위에 올랐다. 이를 보면 정조는 원손 → 왕세손 → 동궁 → 국왕의 과정을 통해 국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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