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2장 국왕과 그 계승자들
  • 3. 국왕을 대신하는 정치
  • 대리청정
김문식

대리청정은 국왕이 나이가 많거나 중병이 들어 국정을 담당하기 어려울 때 그 후계자에 해당하는 왕세자나 왕세손, 왕세제가 국왕을 대리하여 국정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대리청정이 이루어진 것은 모두 여섯 경우가 있었는데, 세종대의 왕세자 문종, 숙종대의 왕세자 경종, 경종대의 왕세손 영조, 영조대의 왕세자 장조(사도 세자), 영조대의 왕세손 정조, 순조대의 왕세자 익종(효명 세자)이 대리청정을 실시했다. 이와는 별도로 선조대에는 왕세자 광해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논의가 무성했는데, 실제로 대리청정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조선시대에 대리청정에 관한 규정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세종대였다. 1442년(세종 24)에 세종은 동궁에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고 왕세자에게 국왕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왕세자는 29세의 성인이었고, 세종은 안질(眼疾) 때문에 국정 문서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세종의 명령은 선례가 없는 일인 데다가 국가의 명령이 두 곳에서 나올 수 없다는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밀고 나갔다. 세종은 당나라의 태자첨사부(太子詹事府) 제도를 원용하여 첨사원을 설치하고 소속 관리들을 임명했으며, 우선 국왕이 주재하는 강무(講武, 군사 훈련)를 세자가 대행하도록 했다.

왕세자 문종의 대리청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443년이었다. 세종은 명나라 태자가 태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담당하는 것을 근거로 왕세자에게 남면(南面)을 하여 조회를 받고 국정을 섭행(攝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남면하여 조회를 받는 것은 국왕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므로 세자에게는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결국 세종이 왕세자가 동쪽에 앉아서 서면(西面)을 하는 것으로 양보했다.

남면하는 것은 국왕이 정사를 듣고 판단하는 자리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남면하여 여러 신하의 조회를 받는데, 동궁이 어찌 감히 지존처럼 남면하고 조회를 받겠습니까? 제왕의 자리는 북극성이 그 자리에 있으면 뭇별이 둘러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동궁이 오늘은 북면(北面)하여 전하에게 조회를 드리고, 내일은 남면하여 신하들의 조회를 받는다면 일의 형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45)『세종실록』 권100, 세종 25년 4월 무신(23일).

이후 대리청정에 관한 제도는 빠른 속도로 정비되었다. 건춘문(建春門) 안에 왕세자가 조회를 받을 계조당(繼照堂) 건물을 세웠는데, 왕세자가 서면을 하는 것을 고려하여 집을 서향으로 지었다. 또한 섭정에 관련된 문서의 용어를 정비하고, 첨사원이 공무를 보고할 때에는 먼저 승정원과 협의한 다음 왕세자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받도록 했다.

1447년(세종 29)에 왕세자는 승화당(承華堂)에서 국정을 처리하기 시작했고, 왕세자를 위한 국가 전례(典禮)도 계속 추가되었다. 1449년에 세종은 세 가지 업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국정을 세자에게 일임했는데, 그 업무는 다음과 같다. 이를 보면 국왕 업무의 대부분을 왕세자가 대리했음을 알 수 있다.

1) 사대(事大)와 제향(祭享)에서 따로 의논할 일

2) 군대를 움직이는 일

3) 당상관을 임명하고 죄주는 일46)『세종실록』 권124, 세종 31년 6월 임자(4일).

왕세자 경종의 대리청정은 앞서 세종대에 정비된 규정을 근거로 했다. 1717년(숙종 43) 7월에 숙종은 왕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다. 이 무렵 숙종은 안질 때문에 왼쪽 눈은 거의 보지를 못했고 오른쪽 눈도 물체를 희미하게 보는 정도에 불과했다. 숙종은 대리청정의 절목(節目)을 만들기 위해 기 왕의 사례를 검토하게 했다. 강화도 사고(史庫)를 방문하여 세종대의 기록을 검토했고, 당나라의 사례도 조사했다. 당나라의 사례는 앞서 세종대에 첨사원을 설치할 때도 검토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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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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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청정 절목은 1717년 8월에 완성되었다. 이 절목은 신하들이 세종대와 당나라의 사례를 보고하면, 숙종이 최종 결정하는 방식으로 마련한 것이다. 이때에 정비된 대리청정 절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왕세자 처소는 시민당(時敏堂)으로 하며, 조참(朝參)과 인접(引接) 등의 일도 모두 이곳에서 시행한다.

2) 청정할 때의 좌향(坐向)은 역대의 사실과 본 왕조의 전례를 따라 서향(西向)으로 한다.

3) 처음 청정할 때 조참을 한 번 하고, 상참(常參)은 일이 없을 때 한다. 신하들이 절하는 것은 세종대에 정해진 것을 따르고, 종친과 문무 관리 중에서 1품 이하의 관원들은 뜰아래에서 두 번 절하고 왕세자는 답하지 않는다. 다만 종실의 백부와 숙부, 사부(師傅)는 먼저 건물 안에 올라가서 두 번 절하고 세자는 답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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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당도(時敏堂圖)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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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향(祭享)은 세종대에 정해진 것을 따라 종묘와 산릉(山陵)은 모두 세자가 대행한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국왕이 직접 제사하는 예를 따르도록 한다.

5) 5일마다 빈청(賓廳)에 모이는 대신과 비변사(備邊司)의 신하들은 시민당에 들어가 만난다. 담당 승지는 서연(書筵)에 참석하는 이외에 청정하는 날 승지를 불러서 만날 때에도 참석한다. 승지가 참석할 때는 한림(翰林)과 주서(注書)도 한 명씩 따라 들어간다.

6) 정무를 처리하는 것은 세종대를 따르는데, 사람을 등용하는 것, 군대를 동원하는 것, 형벌을 주는 것은 국왕이 직접 판단하고, 나머지 서무는 모두 세자가 처리하는 예를 따라 거행한다. 상장(上章), 삼사(三司)의 차계(箚啓), 지방관의 장문(狀聞), 각사(各司)의 계사(啓辭)는 모두 동궁에게 올린다. 그 중에 일이 중대하여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운 것은 국왕에게 보고한다.

7) 상소나 계사 중에 사람을 등용하는 것, 군대를 동원하는 것, 형벌을 주는 것에 관한 일은 뽑아내어 따로 써서 국왕에게 보고하고, 내관(內官)과 외관(外官)의 교체나 파직에 관한 것은 모두 입계(入啓)한다. 이조와 병조의 임명, 대소 관원의 교체, 의금부와 형조의 큰 범죄의 처결, 병조 소관인 내외 군병(內外軍兵)의 당번과 훈련, 새해 초 숙위군(宿衛軍)의 교체, 군호(軍號), 궁성과 도성 문의 개폐에 관한 것은 모두 입계한다.

8) 명령을 출납하는 것은 세종대의 사례를 따라 청정하는 날부터 세자의 명령은 승정원에서 주관한다. 시강원(侍講院)에서 거행하던 것은 예조에서 거행하는데, 명령 내리는 것은 휘지(徽旨)라 하고, 국왕이 계의윤(啓依允)이라 하는 것을 왕세자의 달의준(達依準)으로 고치고, 계사(啓辭)를 달사(達辭), 장계(狀啓)를 달(達), 계본(啓本)을 신본(申本), 계목(啓目)을 신목(申目), 상소(上疏)를 상서(上書), 백배(百拜)를 재배(再拜)로 고친다. 문서로 보고하여 거행한 것은 승정원에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뽑아서 기록하여 보고한다.

9) 조하(朝賀) 등의 의주(儀註)는 예조에서 세종대에 결정한 것에 의거하여 고금을 참작하여 새로운 방식을 만든다. 의장과 숙위하는 군사는 병조에서 세종대에 결정한 것에 의거하여 평소보다 수를 늘린다.47)『숙종실록』 권60, 숙종 43년 8월 임오(1일).

대리청정에 관한 절목은 세종대에 기초가 마련되었고, 숙종대에 세부 사항이 완전히 정리되었다. 영조대 이후의 대리청정은 모두 숙종대의 절목을 따라 시행되었다.

국왕이 질병으로 인해 국정을 직접 처리하기 어려울 때 왕세자를 비롯한 왕위 계승자가 국정을 처리하는 것은 장점이 있는 제도였다. 국정의 운영을 계속해 나갈 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자가 미리 국왕의 업무를 실습해 보는 기회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하는 왕세자로서는 조심 스러운 측면도 있었다. 국왕이 왕세자를 시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 명나라의 압력에 의해 왕위가 위태로워졌다. 명나라에서 조선이 국가 위기를 맞은 것은 국왕이 무능한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선조는 왕세자 광해군에게 대리청정을 하라고 하면서 왕세자가 혹시나 왕위를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시험했다. 그러나 선조의 본심은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경종이나 영조가 대리청정을 할 때에는 왕세자가 정치적으로 위기에 있었기 때문에 처신을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으며, 사도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다가 영조와 충돌하여 죽음을 맞았다. 대리청정은 왕위 계승자에게 약이 될 수도 있지만 독이 될 수도 있는 독특한 제도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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