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1. 구중심처 들여다보기
  • 왕조의 상징, 궁궐
박홍갑

궁궐이란 궁(宮)과 궐(闕)의 합성어이다. 궁은 왕이나 그 가족이 살던 큰 집을 뜻하니 궁전을 말함이고, 궐은 궁전 출입문 좌우에 세웠던 망루와 담장을 뜻하니 궁성을 일컫는 말이다.59)이덕수, 『(신)궁궐 기행』, 대원사, 2004. 따라서 궁전과 궁성을 아우르는 일체의 공간을 궁궐이라 할 수 있겠다.

한자 ‘궁(宮)’은 상형 문자로, 사각형 마당 주위에 네 개의 방이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마치 건축물 평면도 모습으로 표기되던 궁이 점차 글자로 진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큰 지붕 아래 여러 개의 방을 둔, 규모가 큰 건물이 궁이었다. 옛 중국에서 “궁(宮)을 궁(穹)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으니, 가옥이 담 위로 우뚝 보이는 모양을 잘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조선 건국에 초석을 다졌던 정도전(鄭道傳)은 궁궐에 대해, “임금이 정사를 다스리는 곳이요, 신민이 다 나아가는 곳이니, 제도를 장엄하게 보이고 이름 또한 아름답게 붙여, 보고 듣는 자를 감동하게 해야 한다.”라고 설명하였다.60)『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10월 정유(7일). 이렇듯 궁궐은 국가 최고의 정청(政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국왕 개인의 사가(私家)이기도 하다. 왕은 많은 식솔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인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궁궐 안은 항상 복잡하기 마련이었다. 흔히 ‘궁실(宮室)’이라고도 부른 것은 사람과 사물이 집 안에 가득한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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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모습
궁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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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은 왕조 국가가 성립하면서이다. 우리나라에서 초기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계급 발생과 함께 일정 지역에 성을 쌓고 그 안에 지배자의 거처 및 정치 집회소를 세웠는데, 통상적으로 정치와 종교·경제 중심지에 그런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이후 왕은 중앙 정부 조직과 함께 도성 안에 거처를 정하고 외부 세계와 구분하였는데, 고조선의 왕검성(王儉城), 고구려 졸본성(卒本城), 백제 한성(漢城), 가락국 나성(羅城), 신라 금성(金城)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렇듯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가가 형성되면서 수도를 정하였고, 수도를 둘러 싼 도성(都城) 안에 궁성(宮城)을 두기 마련이었다. 이때 궁성은 도성 계획의 일부로 건설하였지만, 지배층의 최고 정점인 왕의 거주지란 점에서 매우 중요하였다. 다양한 용도의 건물이 복잡하게 배치되는 궁궐은 일차적으로 궁성이 에워싸고, 이차적으로 도성이 또 한 번 에워싸고 있다. 신라 왕실 1000년을 지탱하였고, 고려와 조선 왕실 500년을 지탱한 것도 바로 그 궁궐이었기에, 왕조 국가에서 가장 핵심 되는 곳이 바로 궁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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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도(景福宮圖)
경복궁도(景福宮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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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법도에 궁궐을 지을 때면 ‘오문삼조(五門三朝)’라는 원칙을 따졌는데, 이는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규정되어 있는 궁궐 배치의 기본 틀이다. 궁성으로 둘러싸인 궁궐 내부는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지며, 각 구역을 들어갈 때마다 문을 통과해야만 하였다. 통상적으로 궁궐 건물은 남면(南面) 배치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내부의 각 구역도 남에서 북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이때 고문(皐門), 고문(庫門), 치문(稚門), 응문(應門), 노문(路門)이라 이름 붙은 다섯 개의 문을 통과하도록 설계하는데, 이 다섯 개의 문이 구역을 자연스럽게 나누어 주었다. 첫 번째 고문을 통과한 지역을 외조(外朝), 네 번째 응문을 통과한 지역을 치조(治朝), 다섯 번째 노문 안을 연조(燕朝)라 하고, 이 셋을 합쳐 삼조라 부른다. 이리하여 생긴 이름이 ‘오문삼조’인데, 때로는 삼문삼조(三門三朝)의 형식으로 궁궐을 짓기도 하여 고정불변의 원칙은 아니었다.

외조는 군왕이 문무백관(文武百官)을 거느리고 국정을 논하는 곳으로, 그 북쪽은 생활 공간인 내정(內廷)이다. 따라서 궁궐을 크게 외조와 내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경복궁(景福宮)으로 치자면 외조는 근정문(勤政門) 앞이나 경회루(慶會樓) 남쪽 혹은 건춘문(建春門) 안의 남쪽 공간이 된다. 여기에는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상서원, 사옹원, 빈청, 오위도총부, 내의원, 수직사 등과 같은 관청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이들 관청을 궐내 각사(闕內各司)라 불렀는데, 국왕과 직결된 임무를 수행하는 곳이기에 궐 안에 두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궁궐은 오문삼조 원칙을 지키되, 지형과 쓰임새에 따라 독창적인 면을 추가한 것이 많다. 중국에서 만든 원리에 억지로 맞추기보다는 외전(外殿), 내전(內殿), 동궁(東宮), 생활 주거 공간, 후원(後苑), 궐내 각사, 궁성문(宮城門) 등으로 짜여 있는 우리 궁궐을 보노라면,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간 것이 우리 문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울러 궁궐을 중심으로 남쪽을 볼 때 좌측에는 종묘(宗廟)를, 우측에는 사직(社稷)을 두는 ‘좌묘우사(左廟右社)’가 도성에 주요 건물을 배치하는 기본 원칙임도 알아야 한다. 전통시대 관념으로 보면 왼쪽은 양(陽)이고 오른쪽은 음(陰)이다. 동시에 동쪽은 양이고 서쪽은 음이다. 그러니 경복궁을 기점으로 동쪽이자 왼쪽인 명당에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를 두게 되고, 오른쪽이자 서쪽이 되는 곳에 토지와 곡식 신을 모시는 사직을 두게 된 것이다. 길손들이야 무심코 지나치지만, 알고 보면 모두가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과 오행에 입각한 배치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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