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2. 나라님의 여인들
  • 왕의 여인들, 후궁
  • 후궁이 되는 길
박홍갑

조선시대에 후궁의 품계를 8단계로 구분하였지만, 각 품계별로 인원수의 제한을 두지는 않았다. 태종 때에 『예기』의 ‘제후부인입삼궁(諸侯夫人立三宮)’ 제도에 따라 1빈 2잉제를 두었다. 중국 제후의 일취구녀제(一娶九女制)에 준하는 1왕비·3세부·5처 제도를 받아들이되, 칭호만은 세부(世婦)를 ‘빈(嬪)’, 처를 ‘잉(媵)’으로 바꾼 3빈 5잉제를 도입하자는 건의도 있었지만,74)『태종실록』 권3, 태종 2년 정월 신묘(8일) ; 『태종실록』 권22, 태종 11년 9월 정축(19일). 이보다 더 줄인 1빈 2잉제로 낙착되었다.

태종은 후궁 간택의 중요성이 후사와 내조에 있다고 보고 1빈 2잉제를 채택하였다. 하지만 그 수에 얽매이지 않는 호방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대통을 이은 세종 역시 규정보다 훨씬 많은 빈잉을 두고자 하였다. 이후의 왕들 역시 상황에 따라 한두 차례 정도 정식 후궁을 맞아들이기도 하였다.75)김선곤, 「이조 초기 비빈고(妃嬪考)」, 『역사학보』 21, 역사학회, 1963.

후궁이 되는 길은 두세 가지가 있는데, 우선 왕비나 세자빈과 같이 간택의 절차를 거쳐 들어오는 경우이다. 특히 왕비가 아기를 생산하지 못할 때 특별히 후궁을 간택하는 경우가 있다. 정조의 후궁 원빈(元嬪)과 순조의 생모 수빈(綏嬪)이 그에 해당한다. 간택 후궁은 비나 세자빈처럼 가례색(嘉禮色)을 설치하여 혼기가 찬 전국의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 후 간택하고 빙례(聘禮)를 갖추어 맞아들인다. 그러니 후궁이지만 왕비처럼 대우를 받는 것이다.

태조나 정종 때에는 제도가 미비한 상태였기에 가례색에 의한 간택은 없었다. 단지 몇몇 대신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딸을 바치는 경우가 있었다. 정식 가례색을 설치하여 간택하고 빙례로 맞아들인 정식 후궁은 태종의 정의 궁주(貞懿宮主)부터였다. 태종·세종·성종·선조·영조와 같이 치적이 뚜렷한 왕일수록 후궁 수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이들에게는 자녀를 낳은 후궁만도 9명 정도였고, 자녀를 낳지 못해 『선원보(璿源譜)』에 오르지 못한 승은 상궁(承恩尙宮)까지 합하면 전체 후궁 수가 몇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간택 후궁은 신분이 귀한 가문 출신이 대부분이지만, 궁녀로 있다가 승은을 입은 후궁들은 대개 보잘것없고 천한 신분이었다. 왕의 총애가 넘치거나 왕자를 낳고 특별한 공이 있는 후궁은 승격된 기록이 나타나지만, 실제로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승은 후궁이 더 많았을 것이다. 승은을 입어도 하룻밤 풋사랑으로 끝나버리거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궁녀는 후궁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고 궁녀 지위에 머물러야만 하였다. 임금 손길이 닿아도 종4품 숙원에 봉해져야 정식 후궁이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였다. 이를 승은 상궁이라 한다.

승은을 입어 후궁 지위에 오른 이로는 사도 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비록 이름도 없는 집안 출신이었지만,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고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최고의 영예를 누린 인물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정1품 빈의 지위에 머물러야 하였다. 품계를 초월한 왕비의 지위는 하늘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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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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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긴 하지만 간택에 들지도 아니하고 궁녀가 아니어도 후궁이 되는 경우가 있다. 왕이 궁 밖으로 나갔을 때 눈에 뜨여 후궁이 되는 길이다. 장녹수(張綠水)가 그에 해당한다. 기생에다 이미 남편과 아들까지 있던 장녹수는 연산군이 의지하던 제안 대군(齊安大君)의 여종(女從)이었는데, 연산군 눈에 들어 후궁이 된 특수한 경우이다. 또한 왕위에 오르기 전에 품었던 기생을 후궁으로 들이는 경우도 더러 있었으나,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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