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3. 궁녀
  • 궁녀가 되는 길
박홍갑

궁녀는 각각의 명칭이 다르듯, 품계와 직무가 다르고, 신분 또한 달랐다. 삼국시대에는 천인 출신도 있었을 것이나,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귀족 출신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에 와서는 궁녀 가운데 천인 출신도 적지 않았다.

조선에 들어와서 궁녀를 내명부라는 관료 조직에 편입하여 제도권으로 끌어들였지만, 정작 『경국대전』에는 선발에 대한 규정이 없다. 다만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각 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계집종을 대상으로 하되, 내수사(內需司)에 소속된 여자종 중에서 뽑아야 하고, 다른 관청에서 데려올 때는 왕의 허락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양가(良家)의 여자는 아예 궁으로 들이지 못하게끔 규정하고 있는데, 이를 어긴 자는 곤장 60대를 맞고 1년 동안 강제 노역을 하는 벌을 받았다.93)『속대전(續大典)』 형전(刑典), 공천(公賤). 영조 때에는 이 규정보다 더 심하게 처벌하여 귀양을 보낸 기록까지 있을 정도이다.

『속대전』의 이 규정을 뒤집어 보면, 그 전에는 양가의 여자나 내수사 외의 다른 관청에 속한 계집종도 궁녀로 뽑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이 시기에 와서 국가와 왕실을 더욱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노력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내수사는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이기에, 이곳에 예속된 종으로 한정하여 공과 사를 좀 더 명확히 하자는 의도였다. 일종의 백성 안정책이었던 것이다. 궁녀를 충당하기 위해 함부로 민가를 뒤지는 통에 어린 딸을 어쩔 수 없이 시집보낸 사례가 간혹 보이는데,94)『효종실록』 권11, 효종 4년 9월 병진(24일) ; 『영조실록』 권11, 영조 3년 윤3월 경진(23일). 이를 통해 궁녀 선발 때 백성들이 겪은 고초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일반 사가의 거주 공간이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듯이, 궁궐에서도 왕과 왕비의 거주 공간이 따로 있었고, 후궁들의 생활 공간 역시 각각 독립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왕대비나 대왕대비를 비롯한 웃어른이나 미혼의 세자 등도 개별적으로 독립된 공간에서 살았다. 이에 따라 각각의 생활 공간에 따른 시녀들이 필요하였으니, 궁녀 선발도 각자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관례였고, 선발된 궁녀도 1차적으로는 자신의 주인에게 성심을 다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 권력 투쟁이나 갖가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죽어간 궁녀가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도 하다.

세자궁의 궁녀 선발은 왕이나 왕비에게 거의 위임되어 있었다. 어려서 책봉을 받기 때문이다. 각 처소에서 독자적으로 궁녀를 선발하였기에 이를 남용하는 일이 없어야만 하였다. 이리하여 각 처소의 격에 맞게 숫자를 제한하거나 왕에게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였지만, 정원을 크게 초과하지 않는 한 대체로 묵인하는 것이 관례였다.

대전을 비롯하여 각 처소마다 필요한 궁녀 수를 담당 환관(宦官)에게 통보하면, 노비를 관장하는 형조에서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만약 내수사가 아닌 다른 관청에서 궁녀를 뽑으려면, 좀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환관이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하는 단계가 더 들어가기 때문이다. 순조 이후 공노비(公奴婢)의 신분 해방이 이루어지자 공식적인 선발 과정을 밟을 수가 없었다. 자연히 상궁이나 나인의 알음알음으로 어린 처녀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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