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4. 내시
  • 내시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박홍갑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에게 다리가 잘리고 혓바닥이 뽑혀도 바른 말로 간하길 멈추지 않았던 내시 김처선(金處善, ?∼1505) 같은 이가 있었기에 우리나라 내시의 역사를 좀 더 자랑스럽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의 곁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호의호식(好衣好食)한 내시 또한 적지 않았다.

내시는 왕과 더불어 24시간을 보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비록 신분이 천하고 거세된 채 생활하였다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공신(功臣)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수가 많았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공신 반열에 오른 김사행, 수양 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할 때 공을 세워 공신에 책록(冊錄)된 하음군(河陰君) 전균(田畇), 남이(南怡) 장군 옥사를 기화로 공신이 된 흥양군(興陽君) 신운(申雲)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연산군을 몰아낼 때 공신으로 책봉된 내시가 6명이나 되었고, 임진왜란 때 선조 피난을 도와 공신에 오른 자도 24명이나 되었을 정도이다.

내시의 발호를 제도적으로 막은 조선에 들어와서도 이런 정도였으니, 환관이 국정을 농단하던 고려 말의 상황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려 의종 때 큰 위세를 떨친 정함은 행랑채만도 200여 칸이 넘는 집에서 살았다 한다. 원나라 황실에서 활약하며 충선왕을 귀양 보낼 정도로 위세를 떨친 백안독고사, 충혜왕을 귀양 가게 할 정도여서 임금도 쩔쩔매며 눈치를 살피게 한 고용보, 토지 4,000묘를 소유한 당대 제일의 세도가 방신우, 이들은 모두 원 간섭기의 파행적 정국이 빚어 낸 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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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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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 무덤의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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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조선 건국 이후에는 내시에게 신분을 확실히 보장해 주는 반면에 정치 개입은 아예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또 가정을 꾸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지웠던 것이 조선의 내시 정책이었다. 태조의 관대하였던 내시 정책에서 벗어나 불같은 성정으로 내시를 다잡았던 태종이나 깐깐한 원칙을 고수하였던 세종이 있었기에 조선의 내시 제도가 제대로 정착할 수 있었다. 특히 세종은 내시의 임무를 등불을 밝히고 소제하는 정도로 한정하여 왕명 출납 같이 중요한 것은 맡기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궁녀는 결혼할 수 없었지만, 내시는 정상적으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면서 살았다. 이것이 중국 환관과 다른 점이다. 중국에서는 환관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궁녀와 은밀히 연분을 맺고 부부임을 맹약(盟 約)하여 남몰래 정절(貞節)을 지키며 사는 이도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내시의 결혼을 매우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긍익(李肯翊)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내시들이 장가들고 가정을 가지는 것은 이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성인의 법도가 아니다.”라고 한 것에서도,125)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10, 관직전고(官職典故), 환관. 그런 시각이 잘 드러난다. 그러니 사대부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내시가 처첩 두는 것을 금지하자고 외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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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 무덤의 상석
내시 무덤의 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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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는 대개 집단적으로 마을을 이루며 살았는데, 내시부가 있던 효자동이나 인근의 봉익동, 계동 일대가 그들의 집단 거주지였고, 또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과 응암동, 구파발 일대 역시 내시 마을이 있던 곳이다. 서울 외곽 지역에는 양주 장흥면 일영과 화도읍 마석, 안양 인덕원 일대도 내시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 청도에는 16세기 이후 대대로 내시가 살았다는 임당리 내시 고택이 현존하고 있다.

내시가 가계를 잇기 위해서는 양자를 들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세 살 이전에 양자를 삼는 것은 법으로 허락된 일이었고, 양자로 들어왔다 할지라도 원래의 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입양된 형제들 간에도 성이 틀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내시 족보인 『양세계보(養世系譜)』에서도 확인된다.

이성(異姓) 입양이 많았던 것은 같은 혈족 내에서 양자를 구하기가 힘들었다는 증거이다. 인위적으로 거세하는 것보다는 사고나 선천적인 면에 의존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시에게 권세와 부가 보장된다 할지라도 이 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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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 고택
내시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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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어느 양반가에 태어난 선천적 고자를 내시 가문에서 양자로 들이자 인연을 끊고 살았다 한다. 인조 때 어느 내시의 숙부가 승지가 되어 대궐 안에 입직(入直)하고 있었는데, 조카가 궁 안에서 얻은 귀한 감귤 몇 개를 숨겨 승지에게 바쳤더니, 남북사(南北司)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이 국법이라 하여 받기는커녕 자기 집 왕래도 못하게 막았고, 끝내 서로 대면하지 않은 채 죽었다고 한다.126)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10, 관직전고, 환관.

이토록 한 많은 인생을 살았을 남정네가 조선시대 내시였다. 내시가 죽음을 맞이하면, 잘라 보관하였던 양물을 바늘로 시신에다 봉합하였다고 한다. 구천을 떠돌다 조상님을 떳떳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신체발부(身體髮膚)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관념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죽은 후에야 당당한 남자로 돌아갈 수 있는 자가 바로 내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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