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4장 왕실의 권위와 상징물
  • 1. 왕국의 이념과 왕실의 권위
  • 고려 국왕의 권위
  • 고려 국왕의 특성
신병주

고려 국왕의 권위는 고대 국가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국왕권 자체가 초월적 지위로 보장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고려의 건국 과정과도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고려 왕조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 877∼943)은 개경 지역의 해상 세력 출신인 지방 세력의 하나였다. 왕건은 왕조 건국에 협조한 여러 지방 세력을 대표하는 수장(首長)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정치적 위상을 지녔다. 이는 족장 세력의 후예인 귀족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고 귀족 회의나 화백 제도 등을 통해 국왕과 귀족이 함께 국정을 논의하였던 군신공치(君臣共治)의 고대 국왕의 위상을 계승하는 측면을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왕실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近親婚) 같은 폐쇄적인 혼인 풍습을 관행화한 것이나, 장처전(莊處田)과 내장전(內庄田)을 경작하고, 요물고(料物庫)·내고(內庫) 등 독자의 왕실 재정 기구가 있었던 사실은 왕실이 하나의 독립된 정치 세력 단위임을 알려 주는 예가 될 것이다.129)이 부분은 박종기,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6, 139∼145쪽을 참조하여 서술하였다. 고려의 왕은 국가를 대표하는 입장과 함께 왕실 가족의 대표자라는 입장이 혼재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태조 왕건이 사망 직전에 왕가의 가훈적 성격인 훈요 10조(訓要十條)를 남긴 사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는 대외적으로 중국의 천자를 인정하고 책봉(冊封)을 받는 등 제후국(諸侯國)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대내적으로는 천자국(天子國)의 위상에 걸맞은 제도와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고려의 정치 체제는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상서성(尙書省)의 3성과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부의 6부(六部) 체제였는데, ‘성’이나 ‘부’의 호칭은 천자국의 관직 용어이며 제후국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제후국 국왕이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하던 ‘교서(敎書)’라는 용어 대신 천자의 용어인 ‘조서(詔書)’, ‘제서(制書)’, ‘칙서(勅書)’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국왕 자신을 ‘짐(朕)’이라 하였다. 이처럼 대내적으로 황제국 체제를 갖추어 국왕이 천자로 행세하였던 사실은 대내외적으로 제후국의 제도와 격식을 갖춘 조선과 다른 고려의 특성이었다.

고려 국왕이 초월적인 존재로서 전제적인 권력 기반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천자국 체제를 통해 스스로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정치적인 측면도 없지 않지만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약 반 세기 동안 사분오열(四分五裂)된 지방 사회를 수습해서 천하를 통일하였다는 자부심에서 나온 것이다. 즉 고려는 통일 이후 분열된 사회를 아우를 이데올로기로, 삼한(三韓)이 하나로 통일되었다는 일통 의식(一統意識)을 내세웠는데, 바로 이 일통 의식이 고려의 국가 체제를 천자국 체제로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었다. 다양한 지방 세력을 아울러 천하를 통일하였고, 그들을 제후로 간주하고, 국왕은 이 들 위에 군림하는 천하의 중심, 즉 천자라는 우월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조선이 건국하면서 국호를 결정한 후 명나라의 허락을 받은 것과 달리 고려의 국호는 독자적으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부분도 중국과의 관계에서 좀 더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였던 고려 왕실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예이다.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고려 국왕은 조선 국왕에 비해서 독자적인 측면이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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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주의 초상
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주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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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왕이 독자적인 측면이 강하였다는 점은 고려의 개혁 정책이 주로 왕이 주도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조선의 개혁 정책이 정도전(鄭道傳, 1337∼1398),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실학자(實學者) 등 신하들이 주도한 사례가 많다는 점과 비교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고려 전기 광종의 과거제와 노비제 개혁, 3성 6부제를 골간으로 하는 성종의 관제 개혁, 원 간섭기 충선왕·충숙왕·충목왕의 개혁, 고려 말 공민왕의 개혁과 같이 고려시대에는 국왕이 개혁을 주도하였다. 또한 개혁의 주도 과정에서 광종대의 쌍기(雙冀)나 공민왕대의 신돈(辛旽, ?∼1371)과 같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주목되는 점이다. 국왕이 개혁을 주도한 것은 정치 개입이나 정책 결정에서 상대적으로 국왕의 재량권이 컸던 사실을 뒷받침하는 예가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조선에 비해 고려 국왕의 권위가 컸음을 암시하고 있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 개혁 정치의 주체는 대체로 신하들이었다. 정도전의 개혁, 조광조의 개혁, 조선 후기 실학자의 개혁 정치가 구체적인 예가 된다. 고려 국왕이 개혁 정치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은 그만큼 국 왕이 신하들의 견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책 수행을 할 여지가 컸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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