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4장 왕실의 권위와 상징물
  • 2. 궁중 의례
  • 궁중 의례에서 나타나는 왕실의 권위
  • 출생부터 신성시한 왕실의 태
신병주

궁중 의례는 왕실의 후계자 탄생 의식부터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왕실에서 새 왕자가 탄생하면 그 태(胎)를 모아서 땅에 묻는 과정을 기록한 『원자아기씨장태의궤(元子阿只氏藏胎儀軌)』가 있다. 왕실에 왕자가 태어나면 즉시 왕자의 태를 보관할 장소를 결정하고 현지에 태실(胎室)을 만들어 정중하게 안장하였다. 그리고 왕자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면 태실을 태봉(胎封)으로 격상시키고 주위의 석물을 추가로 설치하는데, 이때에는 『태실석난간조배의궤(胎室石欄干造排儀軌)』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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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대왕태실가봉의궤(正宗大王胎室加封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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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대왕태실가봉의궤(正宗大王胎室加封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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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출산 풍속은 민간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복잡한 의식이 따르는 특징이 있다. 먼저 왕비나 세자빈이 임신하여 산기(産氣)가 오면 출산에 필요한 각종 업무를 담당하는 임시 기구인 산실청(産室廳)이 설치되었다. 산실청은 대개 출산 전 5개월부터 3개월 사이에 설치하였는데, 출산과 관련된 인물이나 물품의 조달을 원활히 하기 위해 구성되었다. 산실청은 오늘날로 치면 산부인과의 역할을 한 셈이다. 산실청에는 약방제조(藥房提調)들이 번갈아 입직(入直)하고 의관(醫官)은 산모가 있는 궐 안으로 대령하는 등 행여나 있을 돌발 상황에 대비하였다. 비빈(妃嬪)의 산월(産月)에 임박하여서는 부형(父兄)이 들어와 입직을 하고 친정 모친이 미리 들어와 산바라지를 도와주는 것도 허용되었다. 출산이 임박하면 순산을 기원하는 부적(符籍)을 붙이고 산석(産席)을 깔았다. 산석 위에는 족제비 가죽을 둘렀는데 이것은 왕자 출산을 바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왕비나 세자빈이 분만할 때 산파 역할은 의녀나 혹은 미리 정해 놓은 유모(乳母)가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기(阿只)가 탄생하면 국왕이 친히 산실을 방문하여 문 위 중방(中枋)에 달아 놓은 방울을 흔들며 경사를 알렸다. 원자(元子)나 원손(元孫) 탄생의 경우 3일 후에 종묘에 고하였으며, 7일 후에는 백관의 하례(賀禮)가 있었다.

출산한 후에 태는 바로 깨끗이 씻었다. 백 번 정도 씻은 후에 항아리에 태를 넣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한 다음 붉은색 끈으로 묶어 밀봉하였다. 그리고 이 항아리를 다시 솜을 채워 넣은 큰 항아리에 다시 담았다. 태는 결국 두 개의 항아리에 보관된 셈이다. 왕실의 태를 보관한 두 개의 항아리는 당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던 항아리로서 현재에도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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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태 항아리
인종의 태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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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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