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4장 왕실의 권위와 상징물
  • 5. 어가 행렬을 통해서 본 왕실의 권위
  • 어가 행렬과 왕실의 권위 상징
  • 어가의 등장과 권위의 반영
신병주

어가 행렬의 핵심인 왕의 가마인 연(輦) 앞에는 사고가 있을 경우를 대비해 빈 가마인 부련(副輦)이 먼저 나선다. 비록 빈 가마이지만 부련 역시 왕을 상징하는 것인 만큼 부련에도 왕실의 권위를 나타나게 했다. 부련의 좌측과 우측에는 각 10명의 창검군(槍劍軍)이 창을 높이 들고 행렬을 따라가고 있다. 부련의 뒤 중앙에는 수정장(水晶杖), 양산(陽繖), 금월부(金鉞斧)를 든 3명이 나란히 선 모습이 나타난다. 이어 운검 차비(雲劒差備) 2명, 인배(引陪) 2명이 뒤따르고 그 뒤를 이어 말 탄 옥당(玉堂, 홍문관) 관리 4명이 따랐다. 옥당의 관원 뒤로는 노란색 옷을 입은 내취(內吹) 8명이 행렬의 흥을 고취시켰다.

내취의 뒤에는 무장한 병력이 등장하여 왕실에 대한 경호와 함께 절대적인 권위를 과시하였다. 말을 탄 사금(司禁), 무겸(武兼), 선전관(宣傳官), 총부 낭청(摠部郎廳), 병조 낭청(兵曹郎廳), 오위장(五衛將), 병조 당상(兵曹堂上), 패운검(佩雲劒), 봉보검(捧寶劍) 각 2명씩이 뒤따르고, 그다음에 별군직(別軍職) 6명이 말을 타고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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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련 부분 행렬
부련 부분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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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 행렬
어가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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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군직 다음에는 북을 두드리는 전부 고취(前部鼓吹) 8명과 장악원의 관리인 전악(典樂) 1명이 서고, 촛불을 손에 든 봉촉(捧燭) 10명, 별감 12명과 총을 소지한 무예별감(武藝別監) 18명이 뒤따른다. 어가 행렬에서는 그만큼 호위 병력도 많아지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어가 행렬의 좌우 역시 경호 임무를 맡은 금군(禁軍)과 특별히 발탁한 군사들인 가전별초(駕前別抄), 장교복을 입은 호위군관(扈衛軍官), 가후별초(駕後別抄)가 말을 탄 자세로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국왕의 행차 길에는 경호에 관계되는 각종 부대원이 총출동하여 왕의 안전을 도모하고 왕의 권위를 최대한 구현하였다.

최고의 경호를 받은 상태에서 왕이자 혼례식의 주인공인 영조가 탄 연이 나타난다. 영조의 가마는 사방에서 볼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았다. 왕의 가마가 개방되어 있어 백성들은 이날 국왕의 모습을 직접 접하였고, 이것은 왕에 대한 충성심을 끌어들일 수 있는 요소로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국왕의 모습은 반차도에 그리지 않았다. 아무리 중요한 국가 의식에서도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왕세자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 후대에도 신비 감 있는 존재로 영원히 남게 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영조가 군신들과 함께 성균관에서 활쏘기 행사를 한 그림인 대사례도(大射禮圖)나, 영조가 청계천 공사를 한 이후 활쏘기 행사를 베푼 그림인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 순조의 아들인 문효 세자(文孝世子)의 입학식 광경을 그린 왕세자입학도(王世子入學圖)와 같은 기록화에서도 분명히 왕이나 왕세자가 참여하였지만, 그 자리만을 그리고 왕이나 왕세자의 실제 모습은 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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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 후미 행렬
어가 후미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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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대
후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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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가마 뒤로는 어의(御醫), 승정원의 관리, 사관(史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사관 4명이 따르는 것은 이 행사를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사관의 뒤로는 약방(藥房) 도제조와 제조가 뒤를 따르며 혹시라도 있을 국왕의 신병에 대비하였다. 어가 행렬의 말미에는 후사대 병력을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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